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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32권 : 경상도(慶尙道) 김해도호부(金海都護府)
樂民 장달수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2권 : 경상도(慶尙道) 김해도호부(金海都護府)
동쪽으로 양산군(梁山郡) 경계까지 42리이고 남쪽으로 웅천현(熊川縣) 경계까지 40리이며, 서쪽으로 창원부(昌原府) 경계까지 44리이고 북쪽으로 밀양부(密陽府) 경계까지 44리인데, 서울과의 거리는 8백 84리이다.
【건치연혁】 가락국(駕洛國)이다. 혹 가야(伽倻)라 하기도 하였는데 뒤에 금관국(金官國)이라 고쳤다. 시조(始祖) 김수로왕(金首露王)으로부터 구해왕(仇亥王)까지 무릇 10대, 4백 91년을 왕국으로 내려왔다. 구해왕이 신라에게 항복하니 법흥왕(法興王)이 객으로 예대(禮待)하고 그 나라를 읍으로 만들어서 금관군(金官郡)이라 불렀다. 문무왕(文武王)이 금관소경(金官小京)을 설치하였고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그대로 소경(小京)이라 하였다. 고려 태조(太祖)는 부로 강등시켰고 그 뒤에 또 임해현(臨海縣)으로 강등하였으나 얼마 안 되어서 군으로 승격시켰다. 성종(成宗)이 금주 안동도호부(金州安東都護府)라 고쳤고 현종(顯宗)은 방어사(防禦使)로 강등시켰다. 원종(元宗)은 방어사 김훤(金晅)이 밀성(密城)의 반란을 평정하고 또 삼별초(三別草)를 막아낸 공이 있다는 이유로 금녕도호부(金寧都護府)로 승격시키고 김훤을 발탁하여 도호로 삼아 진수(鎭守)하게 하였다. 충렬왕(忠烈王) 2년에는 안렴사(按廉使) 유호(劉顥)를 죽였기 때문에 현으로 강등시켰다가 뒤에 다시 금주목(金州牧)으로 승격시켰다. 충선왕(忠宣王) 2년에 여러 목을 가려내면서 다시 김해부로 만들었으며 본조(本朝)에서도 그대로 하였다. 태종조(太宗祖)에 도호부라 고쳤고, 세조조(世祖朝)에서 진(鎭)을 설치하였다.
【속현】 태산부곡(太山部曲) 엄산(嚴山)이라 하기도 하는데 부(府) 서북쪽 45리 지점에 있다.
【진관】 도호부 하나 창원(昌原). 군 하나 함안(咸安). 현 다섯 거제(巨濟)ㆍ칠원(漆原)ㆍ진해(鎭海)ㆍ고성(固城)ㆍ웅천(熊川).
【관원】 부사(府使)ㆍ교수(敎授) 각 1인.
【군명】 가락(駕洛)ㆍ가야(伽倻)ㆍ금관(金官)ㆍ임해(臨海)ㆍ금주(金州)ㆍ금녕(金寧)ㆍ분성(盆城).
【성씨】 본부(本府) 김(金)ㆍ허(許)ㆍ배(裵)ㆍ손(孫)ㆍ송(宋)ㆍ유(庾), 정(鄭) 해주(海州). 맹(孟) 익(益)이라 하기도 한다. 장양(長陽).태산(太山) 전(田)ㆍ태(太).
【풍속】 습속이 억세고 간소하다 관풍안(觀風案)에 있다.『신증』 석전(石戰)을 좋아한다. 매년 4월 초파일부터 아이들이 무리로 모여서 성 남쪽에서 석전을 연습하고 단옷날이 되면 장정(壯丁)이 다 모인다. 좌우 패로 갈려져서 기를 세우고 북을 두드리고 소리를 지르면서 뛰놀고 돌을 비 쏟아지듯 던져서 승부가 결판난 다음이라야 그만둔다. 비록 죽거나 다치는 사람이 생기더라도 후회하지 않아서 수령도 금하지 못한다. 경오년에 왜(倭)를 정벌할 때에 돌을 잘 던지는 자를 선봉으로 삼았더니, 적군이 앞으로 나아오지 못하였다.
【형승】 서남쪽으로 큰 바다에 닿았다. 권근(權近)의 응제시(應制詩)에 있다. 옛 가야 터이다. 정몽주(鄭夢周)의 산성기(山城記)에 있다. 산천이 빼어났고 아름다우며 인물이 많다. 세 갈래 물이 빙 둘렀고 일곱 점 산이 얼기설기하다. 모두 안숭선(安崇善)의 동헌기(東軒記)에 있다.
【산천】 분산(盆山) 부 북쪽 3리 지점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신어산(神魚山) 신(神)이 선(仙)으로 된 곳도 있으며, 부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귀지봉(龜旨峯) 부 북쪽 3리 지점에 있다.
○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 3월에, 가락의 9간(干)인 아도(我刀)ㆍ여도(汝刀)ㆍ피도(彼刀)ㆍ오도(五刀)ㆍ유수(留水)ㆍ유천(留天)ㆍ신천(神天)ㆍ오천(五天)ㆍ신귀(神鬼) 등이 물가에 모여서 술을 마시다가 귀지봉을 바라보니 이상한 기운이 있었다. 가서 보니 자색(紫色) 새끼줄에 매인 금합(金合)이 하늘에서 내려 오는 것이었다. 합을 열고 보니 해처럼 둥근 여섯 개의 금빛 알이 있으므로 아도의 집에 가져다 두었다. 이튿날 아홉 사람이 다 모여서 또 열어보니 알 여섯 개가 껍질이 쪼개져서 여섯 동자가 되어 있었다. 나이는 열다섯 쯤 되었고 용모가 매우 거룩하여, 모두 절하며 축하하였다. 동자는 나날이 자라나서 10여 일이 지나자 신장이 9자나 되었다. 무리들이 드디어 한 사람을 받들어서 임금으로 삼으니 이가 곧 수로왕(首露王)이었다. 금합에서 났다 하여 성을 김씨라 하고 나라 이름을 가야라 하니, 신라 유리왕(儒理王) 18년의 일이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자 헤어져 가서 다섯 가야 임금이 되니, 동쪽은 황산강(黃山江)을, 서남쪽은 바다를, 서북쪽은 지리산(智異山)을, 동북쪽은 가야산(伽倻山)을 경계로 하였다.
○ 수로왕이 왕위에 있은 지 1백 58년 만에 훙(薨)하였다. 다음으로, 거등(居登)ㆍ마품(麻品)ㆍ거질미(居叱彌)ㆍ이시품(伊尸品)ㆍ좌지(坐知)ㆍ취희(吹希)ㆍ질지(銍知)ㆍ겸지(鉗知)ㆍ구해(仇亥)가 서로 잇달아 왕이 되니, 나라로 있은 지가 무릇 4백 91년이다.
○ 다섯 가야는 고령(高靈)이 대가야(大伽倻), 고성(固城)이 소가야(小伽倻), 성주(星州)가 벽진가야(碧珍伽倻), 함안(咸安)이 아나가야(阿那伽倻), 함창(咸昌)이 고녕가야(古寧伽倻)였다. 가조산(加助山) 부 서쪽 5리 지점에 있다. 운점산(雲岾山) 부 서쪽 5리 지점에 있다. 장유산(長遊山) 부 남쪽 40리 지점에 있다. 명월산(明月山) 부 남쪽 40리 지점에 있다. 산 아래 구량촌(仇良村)에 견조암(見助巖) 수참(水站)이 있어서 왜(倭)의 사신을 접대한다. 산 꼭대기 돌 틈에 구멍이 있어 문이 되었는데, 높이와 넓이가 모두 5자쯤 되며, 깊이는 7자쯤 된다. 위아래와 사방이 편평하고 반듯하다. 그 안쪽 한복판에는 둥근 지름이 3자 되는 구멍을 이루고 있으며 구멍 속 물 깊이는 헤아릴 수 없는데, 그 지방 사람들은 용추(龍湫)라고 부른다. 자암산(子巖山) 부 북쪽 35리 지점에 있다. 식산(食山) 부 북쪽 30리 지점에 있고, 남쪽으로 분산(盆山)과 이어져 있으며 매우 높고 크다. 율천현(栗川峴) 부 남쪽 45리 지점인 웅천현(熊川縣) 경계에 있다. 웅저현(熊猪峴) 부 남쪽 38리 지점에 있다. 진현(陳峴) 부 남쪽 37리 지점에 있다. 노현(露峴) 하나는 부 서쪽 40리 지점에 있고 하나는 부 북쪽 15리 지점에 있다. 능현(綾峴) 부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금단곶(金丹串) 부 남쪽 50리 지점에 있으며 목장이 있다. 바다 부 남쪽에 있다. 덕도(德島) 부 남쪽 12리 지점, 강 중앙에 있다. 죽도(竹島) 부 남쪽 10리 지점, 강 중앙에 있다. 취도(鷲島) 부 남쪽 30리 지점에 있으며 둘레 20리에 흰 모래가 평평하게 깔려 있다. 섬 남쪽에 우뚝한 돌이 바다에 서 있는데 취암(鷲巖)이라 부른다. 섬 북쪽의 바닷물이 가장 깊은데, 배가 정박하여 밤을 지내는 곳이니, 취량(鷲梁)이라 한다. 명지도(鳴旨島) 부 남쪽 바다 복판에 있는데 물길로 40리 거리이다. 동쪽으로 취도와는 2백 보쯤 떨어져 있으며 둘레는 17리이다. 큰비나 큰 가뭄, 큰 바람이 불려 하면 반드시 우는데 그 소리가 어떤 때는 우레 같고 북 소리나 종소리와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 섬에서 들으면 그 소리가 또 멀어서 우는 소리가 어느 곳에서 나는지 모른다. 전산도(前山島) 부 남쪽 5리 지점에 있다. 도요저(都要渚) 부 동쪽 30리 지점에 있으며 강을 따라 민가가 있는데 거의 2백여 호가 된다. 집들이 빽빽하게 늘어서서 울타리가 서로 잇닿아 있는데 농업을 일삼지 않고 오로지 수운(水運)만을 익힌다. 바다에 들어가서 물고기를 잡아 팔아 상류쪽 여러 고을로 다니면서 재산을 만든다. 그곳 풍속이 순박하여 한 집에 객이 있으면 여러 집에서 각자 술과 음식을 가지고 와서 예를 차린다. 혼사와 초상ㆍ제사에 모두 그러하다. 한 집에 아내나 딸이 음행을 하였으면 여러 집이 회의하여 쫓아 버린다. 이웃 지역인 마휴촌(馬休村) 2백여 호의 풍속도 또한 같다. 『신증』 주민이 4백여 호나 되며, 마을에서 힘써 배워 과거에 오른 자가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앞다투어 힘써 학당을 짓고, 여럿이 모여서 글을 읽는데 과거에 응시하는 자가 제법 많다. 신교천(薪橋川) 부 서북쪽 30리 지점에 있다. 물의 근원이 창원부(昌原府) 염산(簾山)에서 나오며, 동북쪽으로 흘러 무송지(茂松池)에 합치고, 북쪽으로 흘러 해양강(海陽江)에 들어간다. 주포(主浦) 부 남쪽 40리 지점에 있다. 물의 근원이 명월산(明月山)에서 나오며, 남쪽으로 흘러 바다에 들어간다. 호계(虎溪) 부성(府城) 복판에 있다. 물의 근원이 분산(盆山)에서 나오며, 남쪽으로 강창포(江倉浦)에 들어간다. 강창포 부 남쪽 6리 지점에 있다. 뇌진(磊津) 부 북쪽 48리 지점에 있다. 해양강이라 하기도 하며, 밀양부(密陽府) 용진(龍津)의 하류이다. 황산강(黃山江) 부 동쪽 40리 지점에 있으며 양산군(梁山郡) 경계이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여관[傳舍]에서 밥 먹고 새벽에 강 건너니 강물은 아득하고 하늘은 푸르구나. 거센 바람 회오리치니 물결이 일어나 배는 황산과 함께 낮았다 높았다 하네. 나루터 사람은 우리가 평지 밟듯이 한 곡조 뱃노래를 장단 맞춰 부르네. 죽을 뻔하다가 겨우 살아서 앞 언덕에 이르니 느티 버들 그늘 속에 시골 길이 거칠구나.” 하였다.
○ 정포(鄭誧)의 시에, “강가에는 천 봉우리 빼어났고, 마을 서쪽엔 한 가닥 길 희미해라. 시골 사람은 대밭 너머로 이야기하고, 말 타고 노닐던 이는 꽃 속에서 돌아오네. 마음껏 아름다운 경치 즐기고, 거닐다 보니 해질 무렵 되었네. 해치려는 마음 이미 사라져 갈매기도 놀라 날아가지 않네.” 하였다. 『신증』 강혼(江渾)의 시에, “김해부에다 배를 대고 문득 진양산(晉陽山) 바라보네. 널따라니 구름 낀 하늘은 멀고, 아득한 수국(水國)은 넓기도 하여라. 강호에 오늘밤 흥겨우니, 거문고와 술로 보내는 삶이 한가로워라. 내일에는 봉래(蓬萊) 섬 가에 신선을 찾아, 연단(鍊丹) 짓는 것 배우리.” 하였다. 태야강(台也江) 부 남쪽 40리 지점에 있다. 삼분수(三分水) 전해 오는 속설(俗說)에, 낙동강(洛東江) 물이 남쪽으로 흘러 부 북쪽 뇌진(磊津)에 이르고, 다시 동쪽으로 흘러 옥지연(玉池淵)ㆍ황산강(黃山江)이 되며, 또 남쪽으로 흘러 부 남쪽 취량(鷲梁)에 와서 바다에 들어가며 예성강(禮成江)과 합류하니, 바닷물이 국맥(國脈)을 옹위하고 지겸(地鉗)이 서로 응한다. 이로 인해 고려 문종(文宗) 때에 본부(本府)를 오도 도부서 본영(五道都部署本營)으로 삼았다. 그 뒤에 도부서사(都部署使) 한충(韓冲)이, 도내(道內)가 넓고 멀다고 조정에 아뢰니, 3도로 나누어 각각 본영을 설치하였는데, 그날 저녁 황산강 물이 세 가닥으로 갈라져서 바다로 들어갔으므로 삼분수 또는 삼차수(三叉水)라 하였다고 한다. 양산군 칠점산(七點山)이 두 갈래진 사이에 있다. 방포(防浦) 부 서쪽 5리 지점에 있다. 물의 근원이 노현(露峴)에서 나오며 남쪽으로 흘러서 바다에 들어간다. 덕진교포(德津橋浦) 부 서쪽 10리 지점에 있다. 물의 근원이 운점산(雲岾山)에서 나오고 동남쪽으로 흘러서 바다에 들어간다. 주촌지(酒村池) 부 남쪽 15리 지점에 있으며 둘레가 4천 2백 30척이다. 순지(蓴池) 부 서북쪽 6리 지점에 있다. 무송지(茂松池) 부 서쪽 35리 지점에 있다. 삼백천지(三百川池) 부 서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동지방지(東地方池) 부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유등지(柳等池) 부 북쪽 5리 지점에 있다. 해택지(海澤池) 부 동남쪽 6리 지점에 있다.『신증』 덕지도(德只島) 부 남쪽 30리 지점에 있으며 덕진(德津) 하류이다. 곤지도(坤地島) 부 서남쪽 15리에 있다. 항간에 전해오는 말에는, “신라 때, 이 섬이 국도(國都)의 곤방 지역(坤方地域)이므로 이름하였다.” 한다. 불암진(佛巖津) 부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동래(東萊)로 바로 가려는 자는 여기에서 배를 타고 양산 용당포(龍堂浦)에 닿는다. 동원진(東院津) 덕산역(德山驛) 밑에 있다. 태산진(太山津) 태산역(太山驛) 동쪽에 있는데, 곧 밀양 수산현(守山縣) 앞 나루이다.
【토산】 철 부 동쪽 감물야촌(甘勿也村)에서 나온다. 미역ㆍ숭어[秀魚]ㆍ전복[鰒]ㆍ밴댕이[蘇魚]ㆍ병어[白魚]ㆍ농어[鱸魚]ㆍ붕어[鯽魚]ㆍ문어ㆍ청어ㆍ웅어[葦魚]ㆍ대구[大口魚]ㆍ토화(土花)ㆍ굴[石花]ㆍ조개[蛤]ㆍ곤쟁이[紫蝦]ㆍ석류ㆍ꿀[蜂蜜]ㆍ오사(烏蛇)ㆍ산무애뱀[白花蛇], 죽전(竹箭) 덕지도와 죽도(竹島)에서 나온다. 지치[紫草]ㆍ표고[香蕈] 『신증』 홍어ㆍ잉어[鯉魚].
【성곽】 읍성 석축이다. 둘레는 4천 6백 83척이고 높이는 15척이다. 성안에 샘 28개소와 냇물 하나가 있는데 사철 마르지 않는다. ○ 정몽주(鄭夢周)의 기문(記文)에, “옛날 선왕(先王)께서 남쪽 지방을 순행(巡行)하시면서 상주(尙州)에 머무르셨다. 그때 나는 부름을 받아 한림(翰林)으로 있었는데, 박후 위(朴侯葳)를 여관에서 처음 알게 되어 상종하다가 좋아하였다. 이로부터 10여 년 동안 어깨를 나란히 하여 선왕을 섬기며 그의 재능에 탄복하였다. 지금 임금께서 즉위하신 다음해에 내가 죄를 입어 남방에 유배를 갔는데, 그해 겨울에 왜적이 김해(金海)를 함락시켰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김해는 왜와의 요충지대이다. 지금은 이미 함락된 데다가 전쟁 뒤끝이니, 비록 지혜가 있는 자라 하더라도 아마 다스리기 어려울 것이다.’ 하였다. 얼마 뒤에 박후가 수령이 되어 나갔다는 것을 듣고 사람들을 돌아보며, ‘나는 박후가 반드시 이곳을 처리할 수 있을 것임을 안다.’ 하였다. 박후가 고을에 처음 이르러서는 이내 능히 밤낮으로 정력을 쏟고 사려를 다해, 계획을 세워서 왕은(王恩)이 미치도록 하였다. 얼고 굶주리던 자를 배부르고 따뜻하게 하고 신음하던 자를 은덕을 칭송하게 하며, 불타고 재가 된 것을 장대하고 아름답게 하고 깨어지고 무너진 것을 굳고 치밀하게 하여서, 한 달 동안에 온갖 황폐했던 것이 새로워졌다. 박후는 그래도 마음이 차지 않아 얼굴빛에 근심스러움을 띠면서, ‘이 어찌 족히 잘 다스린 것이겠는가. 근일 왜적에게 함락된 뒤에 남편은 처자를 잃어 울고, 자식은 부모의 죽음에 곡을 하여서 우는 소리가 서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 기회를 놓치고 도모하지 아니하면 이 뒤에 다시 이런 꼴이 될 것이니 나는 이 점을 마음 아파한다.’ 하였다. 이에 대중들에게 말하기를, ‘왜적의 형세가 나날이 성해져서 바다에서 백 리 거리가 되는 곳도 오히려 왜적의 침해를 당하는데, 하물며 이런 바닷가 고을이겠는가. 이 고을은 물이 그 경계를 두르고 있으니 참으로 사지(死地)이다. 그러니 만약 험한 곳에 변고를 대비하는 설비를 하지 않아서는 될 수 없다.’ 하였다. 이리하여 영을 내려 옛 산성을 수축하여 넓고 크게 하였다. 돌을 포개어 견고하게 하고 산세를 인해서 높게 하였다. 공역(工役)을 마친 뒤에 밑에서 바라보니 성벽이 천 길 깎아질러 서서 비록 한 사람에게 문을 지키게 해도 만 명이 성문을 열 수 없을 만하였다. 부(府) 사람 통헌대부(通憲大夫) 배원룡(裵元龍) 공이 나에게 편지를 보내와서 청하기를, ‘산성을 수축한 것은 만세(萬世)의 이로움이다. 우리 박후를 아는 사람으로서 자네 만한 이가 없으므로 감히 기문을 청한다.’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험한 곳에 변고를 대비하는 설비를 하는 것은 나라를 지키는 도이다. 예로부터 제왕(帝王)이 이런 설비를 이용하여 다스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맹자(孟子)》에 이르기를, ‘천운[天時]이 아무리 좋아도 지형(地形)이 좋은 것만 못하고, 지형이 좋아도 사람의 화합만 못하다.’ 하였으니, 대개 경중(輕重)과 대소(大小)의 차이를 말한 것일 뿐이지, 그 중에 하나만이 필요하고 둘은 없어도 좋다는 것은 아니었다. 아, 조종(祖宗)께서 창시하신 방법이 또한 주밀하였다. 내가 일찍이 삭방(朔方)에서 좌막(佐幕)으로서 동북쪽 변방가를 살피러 다닌 적이 있었다. 옛 산성이 산천을 가로질러 처음부터 끝까지 천 리는 되는데, 그 사이에 요해 지역과 순찰하고 지키기 위해 주둔한 곳이 천이요 백이었으니, 당시에 왜적을 방어하기 위해 계획한 자취를 대개 볼 수 있었다. 지난날 거란ㆍ금 나라ㆍ원(元) 나라와 국경이 맞닿은 적이 되어 몇 해나 항전하면서 옛것을 잃지 않고 지금에 이르는 것이 어찌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겠는가. 지금 국가에서 군사를 움직인 지 20여 년인데 성과 진 터, 해자(垓字)는 곳곳이 헐고 무너져 있으니 태평하여 근심 없는 시대와 다름이 없으니, 대저 지금 계책을 꾀하는 신하와 슬기로운 장수가 계획에 실수한 것이 없건마는 어찌 성과 해자가 도적을 방어하는 것인지 모른단 말인가. 도리어 버려두고 하지 않으니, 그들의 뜻은 장차 긴 창과 억센 활을 가지고 적과 전쟁을 벌여 평평하고 넓다란 들판에서 베어 죽이고 모조리 무찔러 마음에 유쾌하게 하며, 저 험한 곳에 적을 방어하는 설비를 하여 나라를 지키는 일은 졸렬한 계책이라고 여긴단 말인가. 왜구가 도둑질하는 것은 소규모로되 국가의 재력은 고갈되니, 이에 매번 군사가 나가도 매양 패한다. 전날의 긴 창과 억센 활을 가지고 마음을 유쾌하게 하려던 계획이 도리어 적에게 웃음거리만 될 뿐이니 아, 애석하여라. 거란ㆍ금 나라ㆍ원 나라 같은 적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어쩌면 그리도 장하였던가. 그런데 지금은 무엇 때문에 도리어 이 좀도둑에게 곤란을 당하는가. 박후의 거조는 대개 이것을 분하게 여긴 것이리라. 김해 백성은 평소에 사변이 없으면 산성에서 내려와 밭을 갈고 바다에 들어가 고기 잡다가, 봉수(烽燧)를 보게 되면 처자를 거느리고 성에 들어갈 것이니, 베게를 높게 베고 누워도 좋을 것이다. 험한 곳에 방비를 설치하여 스스로 단단하게 하는 것을 누가 졸렬한 계획이라 하는가. 내 장차 옛 가야터를 찾으려 하니, 마땅히 새로운 성 위에서 술잔을 들며 박후가 정치에 공적을 이룬 것을 축하하리라.” 하였다.
【관방】 금단곶보(金丹串堡) 부 남쪽 52리 지점에 있으며 석성(石城)이다. 둘레가 2천 5백 68척이고, 성안에 큰 우물이 있다. 권관(權管)을 두어서 머무르며 국경을 지킨다.
【봉수】 분산 봉수(盆山烽燧) 남쪽으로 성화례산(省火禮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자암산(子巖山)에 응한다. 성화례산 봉수(省火禮山烽燧) 부 남쪽 51리 지점에 있다. 남쪽으로 웅천현(熊川縣) 가덕도(嘉德島)에 응하고 북쪽으로 분산(盆山)에 응한다. 자암산 봉수(子巖山烽燧) 남쪽으로 분산에 응하고 북쪽으로 밀양부 남산(南山)에 응한다.
【궁실】 객관(客館) 정통(正統) 계해년에 부의 공해(公廨)가 화재로 소실되어, 부사 박눌생(朴訥生)이 중건하고 안숭선(安崇善)이 기문을 지었다.
『신증』 영추당(迎秋堂) 서헌(西軒)의 아래에 있다. 회로당(會老堂) 부 성의 북쪽에 있다. 홍치(弘治) 신해년에 고을 부로(父老)들이 건립하였다.
○ 김일손(金馹孫)의 기문에, “당(堂)을 회로(會老)라 이름한 것은 향당(鄕黨) 부로들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이다. 모이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향음(鄕飮)과 사어(射御)ㆍ독법(讀法)이 어느 것이든 아님이 없다. 당이 부성의 북쪽에 있으니, 10년 전에 부 사람 김순손(金順孫)이 옛터에다가 건립한 것이다. 조종조부터 유향소(留鄕所)로 짓자고 건의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설치했다가는 파하였고, 뒤이어 복구하였다가는 또 폐하였다. 향음과 사어와 독법 등의 일을 조정에서 뜻을 두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향당에서 그 일을 맡은 이가 없었으므로 당은 우뚝 선 빈 집이 되었다. 기유년 봄에 조정에서 시골 습속이 예전 같지 않음을 염려하여 특별히 유향소를 복구하고 향정(鄕正)을 세웠는데, 영(令)을 정하기를 주와 부에는 다섯 사람, 군에는 네 사람, 현에는 세 사람이 각자 온 고을에서 명망 있는 사람을 추천하여 그 책임을 맡도록 하였다. 김해는 부이므로 전 의성 현령(義城縣令) 김계금(金係錦) 선생, 전 청산 현감(靑山縣監) 백계영(白啓英), 전 인의(引儀) 배형(裵炯), 전 참군(參軍) 송숙형(宋叔亨)과 나의 종형 진사(進士) 김백견(金伯堅)이 다섯 사람의 수효에 차니, 모두 온 부에서 명망이 있는 분이었다. 고을에 공사(公事)가 있으면 모두 이 당에 모여서 논의하였다. 부는 옛 가락국(駕洛國) 터이니, 시조 수로왕의 묘(墓)가 지금 서쪽 성문 밖에 있으며, 관(官)에서 나무하는 것을 금단한다. 예로부터 부로들이 제수(祭需)를 갖추어서 제사하여, 철상(撤床)하면 고을 사람이 함께 음복(飮福)하는 것을 해마다 상례(常例)로 한다. 나는 김해가 본관이다. 선대(先代)부터 서로 전하는 말에, 우리 집 세계(世系)는 수로왕에서 나왔다 하나, 옛일이 아득하여 밝힐 수 없다. 매양 능(陵) 앞을 지나도 곽숭도(郭崇鞱)가 자의(子儀)에게 배례(拜禮)하던 일처럼 혐의스러워서 감히 스스로 붙이지 못하였으나 제사 때는 고을 사람의 뒤를 따라 조두(俎豆 제물 담는 그릇)를 진설(陳設)하였다. 지난해 겨울에 내가 도주(道州 지금의 경상북도 청도군)의 시골에서 오니, 마침 고을 사람이 능에 제사한 뒤에 음복하는 중이어서 이 당에 크게 모여 있었다. 내가 당 아래에서 부로에게 배례하였더니, 김 선생이 나를 맞이하면서 말하기를, ‘이 일은 우리 고을 사람의 풍속이다. 전해 온 지도 이미 오래이나 옛 도리[義]에 거리낌은 없는가.’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무슨 거리낌이 있겠습니까. 예로부터 제왕으로서 공덕 있는 분에게는 세대가 끊어진 뒤에도 그 지방 백성이 사당을 세우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전기(傳記)에도 가끔 발견됩니다. 요순(堯舜)과 대우(大禹) 같은 분의 사당(祠堂)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후세의 한(漢) 나라 고조(高祖)와 광무(光武), 촉(蜀) 나라 선주(先主)도 모두 사당이 있어서, 일반 백성이 빌 일이나 아뢸 것이 있으면 그곳에서 제사하였습니다. 비록 경문(經文)에는 맞지 못하나, 나라 사람이 끝없는 그리움을 품고 영원한 공경심을 일으키는 것은 곳곳마다 금단하지 않았습니다. 일찍이 수로왕에 대한 문적을 상고하니, 후한(後漢) 건무(建武) 18년에 개국(開國)하여 4백 년 11대를 전해 왔고, 마지막 임금 구해왕(仇亥王)에 이르러 항복하여 신라 판도(版圖)에 들어간 지가 이제껏 천여 년입니다. 왕국의 자취도 사라졌고 남긴 은택도 없어졌건만 고을 사람이 오히려 향기로운 제물을 바치며 태만하지 않는 것은, 대개 수로왕이 우리 고을 백성의 처음 임금이었으므로 추모하여 보답하는 것을 그만두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진실로 우리 고을의 좋은 풍속이니, 우리 고을에서 대를 이어가며 지키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좋다. 국가에서 유향소를 구한 것은 고을 습속을 선하게 하려는 것이다. 자네가 이것을 우리 고을의 좋은 풍속이라 하였으니, 이 모임이 이 당에 빛남이 된다. 내가 이미 회로(會老)로써 이름했으니 자네가 기문을 짓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내가 일어나서 답하기를, ‘오늘 이 당에 모인 사람은 모두 부형과 종족이고 딴 분이 아니니, 그 화목하기를 강구하는 바가 의당 지극하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다만 한 고을에는 반드시 그 고을 습속이 있는데 고을 풍속은 그대로 따르기에는 선한 것도 있고 선하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선한 것은 비록 국가 전례(典禮)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버릴 수 없으며, 나쁜 것은 비록 전해져 온 옛 습속이라 하더라도 결단코 남겨 두어서는 안 됩니다. 온 고을 자제를 거느려서 선으로 교화시키고 악을 경계하는 것이 부로의 책임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유향소는 곧 옛날 향대부(鄕大夫)입니다. 삼물(三物)과 팔형(八刑)으로 가르치고 규찰하는 것은 본래 그 사항이 있습니다. 혹 아비가 아비의 구실을 아니하고 자식이 자식의 도리를 아니하며, 형이 형의 구실을 아니하고 아우가 아우의 도리를 아니하며, 남편으로서 남편 노릇을 아니하고 아내로서 아내 도리를 아니하는 자나, 화목하지 않는 자[不姻者], 아랫사람으로서 윗사람을 거스르는 자, 아전으로서 백성을 침어(侵漁)하는 자는 모두 규찰하여야 합니다. 가르쳐 인도하고 깨우쳐 깨닫게 하며 심한 자는 유사(有司)에게 알려, 온 고을의 선을 몰아, 우리 고을을 질박하고 산만한 데에서 돌이킨 뒤에 화락하게 수로왕 시대의 순후(醇厚)한 습속이 될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다시 이 당에 돌아와서 잔을 잡고 태평춘(太平春 술이름)을 잔질한다면 한갓 한 고을의 다행일 뿐 아니라, 곧 국가의 다행일 것입니다.’ 하였다. 전 부사 이공 손(李公蓀)이 일찍이 묘전(墓田)의 밑천을 충당하였고 지금 부사 김의형(金義亨) 공 또한 우리 고을 사람이니 우리 고을 습속을 선하게 하는 데에 부로들이 바야흐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이보다 먼저 김백견(金伯堅) 형이 재실(齋室) 5칸을 당 서쪽 곁에다 지었는데, 밭을 끼고 있어서 제용(祭用)에 이바지하고 집이 있어서 재계(齋戒)를 다할 수 있다. 서직(黍稷 제물)을 받드니 수로왕이 흠향(歆饗)하지 않으랴. 제사하고 음복하니 부로들에게 즐거움이 어찌 없으랴. 몇 년 후 머리 희어지면 나 또한 이 당의 늙은이가 되리라. 드디어 신(神)을 맞이하는 노래를 지어서 부로들과 함께 노래하기를, ‘자색(紫色) 끈이 땅에 드리워 왕통(王統)을 전하여 면면(緜緜)히 이어졌네. 세상[九宇]에 임금 없었는데 하늘에서 내려왔네. 바닷가에 도읍 정하여 4백 년을 내려왔네. 호적(戶籍)에 편입된 백성은 곤손(昆孫 적파자손)이요, 운손(雲孫 여러 자손)일세. 철마다 제사하여 부로가 바삐 움직이네. 고목(古木)과 황량한 들판이로다. 신의 까마귀 울며 흩어지니 제기는 정결하고 서직은 향기로워라. 피리 소리 북소리 울리건만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네. 신이 오시니 구름처럼 취하고 배불러 넘실대네. 우리 백성에게 어이 복주지 않으리. 우리 백성 은혜를 받네. 아아, 즐겁고 편안하여라. 흰 머리 너풀너풀하네. 구장(鳩杖) 소리가 쟁쟁하여라. 해마다 해마다 노래하며 춤추네. 한없이 영원하리라.” 하였다.
【누정】 연자루(燕子樓) 호계(虎溪) 위에 있다. ○ 주열(朱悅)의 시에, “연자루 없어진 지 몇 해나 되었나. 푸른 사창(紗窓) 붉은 난간이 벌써 티끌 되었네. 호계의 울어예는 물 소리 어느 때에 다하리. 구름 흩어진 지 천 년에 사람 보이지 않네.” 하였다. ○ 고려 김득배(金得培)의 시에, “분성(盆城)에 부임한 지도 20년이니, 그때 부로들의 반은 진토(塵土)되었네. 서기(書記)로부터 원수(元帥)가 되었으니, 손꼽아 보아도 나 같은 이 몇이나 되리.” 하였다. ○ 왕강(王康)의 시에, “가야국의 아름답던 일 얼마나 지났는가. 금휘(金徽) 가 적막한데, 뽀얀 먼지만 덮였네. 초현대(招賢臺) 위엔 달이 떠 있을 뿐, 깨끗한 빛이 아직도 예와 지금의 사람을 비추네.” 하였다. ○ 정몽주의 시에, “옛 가야 찾아오니 풀빛 푸른 봄이로세. 흥망이 몇 번 변해 바다가 진토 되었나. 당시에 애끊으며 시 남긴 객은 본래부터 맘이 깨끗해 물 같은 사람이었네.” 하였다. 주열을 가리켜 말한 것이니, 충렬왕이 일찍이 이르기를, “주열이 모습은 귀신같이 추하여도 마음은 물같이 깨끗하다.” 하였다. ○ “칠점산(七點山) 앞에 저녁 노을이 비끼고, 삼차수(三叉水) 나루터엔 푸른 물결 일어나네. 봄바람 부는 2월에 금주(金州)의 길손은 꼭 강남(江南) 길을 가는 듯하네.” 하였다. ○ “연자루(燕子樓) 앞의 제비[燕子]는 돌아왔는데, 낭군(郞君)은 한번 가더니 다시 안 오네. 그때 손수 심은 매화나무는 몇 차례나 동녘 바람에 꽃 피었던가.” 하였다. ○ 이행(李行)의 시에, “길손의 걸음 분성(盆城)에 오니 또 봄이로구나. 집집마다 긴 대나무 깨끗하여 티끌 하나 없네. 시를 지어 묻노니 초현대(招賢臺)의 객이여, 우선(羽扇) 잡고 윤건(綸巾) 쓴 이 몇 사람이던가.” 하였다. ○ 맹사성(孟思誠)의 시에, “가락국 빈 터에서 몇 해 봄을 보았던가. 수로왕 문물(文物)도 티끌뿐일세. 가련한 제비는 옛일을 생각하는 듯, 높은 누각 곁에 와 주인을 부르네.” 하였다. 『신증』 김감(金勘)의 시에, “원교(員嶠)와 방호(方壺)를 어느 곳에 찾으리. 흥이 나면 바로 이곳에 올라 내려다볼 뿐이네. 가인(佳人)은 예로부터 늙기 쉬운데, 제비는 누굴 위해 지금껏 머무나. 옛 무덤 황량한 누대엔 가을이 일찍 들고 그윽한 꽃 참대 밭은 낮에도 그늘지네. 솔솔 바람 손길 따라 남은 술에 부는데, 애조(哀調) 띤 관현(管絃) 소리 단가(短歌)에 섞이네.” 하였다. 청심루(淸心樓) 남관(南館) 동쪽에 있으며 호계를 걸쳐서 지어져 있다. 매균각(梅筠閣) 동헌 북쪽에 있다. 지금은 임금당(臨錦堂) 동쪽에 옮겨 지었다.『신증』 임금당(臨錦堂) 『신증』 김일손의 기문에, “호계의 물이 분산에서 나오는데 흐르는 소리가 콸콸거린다. 북곽(北郭)으로 흘러 들어서 파사탑(婆娑塔)을 지나며, 온 성을 가로질러 남곽을 통해 바다에 모여든다. 물이 얕아서 겨우 부들풀[束蒲] 따위를 흘려 보낼 정도이나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으니, 대개 근원이 있는 흐르는 물이기 때문이다. 성안에는 물 좌우에 돌로 둑을 쌓아서 시내의 흐름을 막고 그 가운데를 비우고는 위에다가 높은 누각을 지었으니, 연자루라 한다. 그러나 누각은 높은데 시내는 졸졸 흐르는 물이어서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 또 그 아래로 50보쯤 되는 곳에 누각 하나를 지으니 청심루(淸心樓)라 하는데, 이 누각은 조금 낮고 시냇물도 조금 고여서 물소리가 객의 자리에까지 들리니, 물과 함께 제법 알맞다. 그러나 그 훌륭함을 다 차지하지 못하였으므로 내가 항상 조물(造物)을 위해 한스러워 하였다. 홍치 계축년(1493, 성종 24) 봄에 내가 윤음(綸音)을 받들어 유지(諭旨)를 반포하면서 부에 다다르니, 그때의 부사 단양(丹陽) 우공(禹公) 모(某)가 나를 새 당(堂)에 머무르게 하였다. 당은 연자루와 청심루 사이에 있으며, 현판을 임금(臨錦)이라 하였는데, 나의 벗인 월성(月城) 이종준(李宗準) 후가 명명(命名)하고 현판을 쓴 것이었다. 나는 당의 이름을 임금이라 한 뜻은 모르지만, 송(宋) 나라 융덕(隆德) 고궁(故宮)에 임금당이란 것이 있었고, 원 나라 선비가, “임금당 앞에 봄물이 물결치네. 한 원 나라 유사의 시구가 있으니, 아마도 그 물결의 무늬가 비단 같은데 당이 그 위에 임하고 있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 중류에 집을 지은 것을 바라보니 누각이 아니라도 시원하고 동서쪽도 곁채가 있어 따스하고 서늘한 것이 각각 알맞게 되어 있다. 굽이굽이 난간이고 곳곳이 창호(窓戶)인데 영롱(玲瓏)하고 완전(宛轉)하다. 난간 아래 시냇물은 엎드리면 손으로 움킬 만하며, 시내와 당의 밝고 고움이 서로 비친다. 또 백로와 갈매기 두어 쌍을 물 위에 놀게 하여, 울움이 옹옹(雝雝)하며 소리가 집을 울린다. 그것들을 몰아내니, 비로소 내가 앉았는 자리 밑에서 가장 기이한 일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거문고를 퉁기니 공중(空中)과 소리가 서로 응하여 맑고 화하며 멀리 전해진다. 큰 줄은 퉁퉁하여 더욱 웅장하고, 작은 줄은 갱갱하여 더욱 높은데 또한 이 당의 제일 기이한 것이다. 술이 반쯤 되었을 무렵에 우공(禹公)이 나에게 기문을 부탁하므로, 나는 잔을 잡고 응낙하였다. 이어 공에게 말하기를, ‘천지간에 모든 물건은 반드시 서로 어울리는 것이 있으니, 어울리지 못하면 조물의 뜻을 얻지 못한 것이다. 초당과 모옥(茅屋) 같은 것은 처사(處士)에게 알맞고, 넓고 큰 집과 금으로 꾸민 집은 왕손(王孫)에게 알맞은 것이니, 여기에 주인을 바꾸게 되면 어울리지 않는다. 홍도(洪都)에는 등왕각(滕王閣)이 있었고, 파릉(巴陵)에는 악양루(岳陽樓)가 있었으니, 그런 다음이라야 동정(洞庭)과 팽려(彭蠡)의 드넓은 경치와 상대할 수 있다. 두 공부(杜工部)의 당(堂)은 완화계(浣花溪)에 알맞고, 유(柳) 유주의 집은 우계(愚溪)에 적당하니, 그 사람 그 지역에 따라 각자 어울리지 않는 것이 없다. 김해는 오래 된 부이니, 부 안에 많은 누대(樓臺)와 관사(館舍) 중에 호계를 따라 늘어선 것이 하나둘이 아니건만, 우공이 지은 임금당이 있음으로써 비로소 어울린다. 아, 들어서 물건에 두면 물건마다 모두 어울릴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꼭 어울리도록 하고자 하면, 조물의 뜻을 아는 자가 아니고는 되지 않는다. 이 당의 규모(規模)를 가지고 우공의 가슴속을 살펴보면, 허다하게 건물을 지을 때에 의장(意匠)을 부려서 영근(郢斤)을 움직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은 능히 조물의 뜻을 알았던가. 내가 공을 보건대 공은 의젓한 웅표(熊豹)의 자질로 일찍 버들잎[楊葉]을 뚫었으니, 재간과 기국(器局)에 장성(長城)같이 씩씩한 기대가 있었는데, 원통하게도 이 부를 맡은 것은 또한 천수(天數)이다. 높은 아기(牙旗)와 큰 독기(纛旗)를 세우는 장수의 임무는 공의 능사(能事)이려니와, 쌀ㆍ소금 따위의 문서를 살피는 것도 공은 능하지 않음이 없다. 어찌 일마다 걸맞는 이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공이 조물의 뜻을 모른다고 할 수 없다. 공은 평소의 절조(節操)에 더욱 힘써 태만하지 말라. 공의 집은 한양 도성 영추문(迎秋門) 밖 소경전(昭敬殿)의 오른쪽에 있는데, 사문(斯文) 조백부(趙伯符)가 집을 빌려서 살고 있었다. 내가 전년에 조사문(趙斯文)을 찾아갔더니, 자연 경관은 매우 훌륭하였으나 집은 아주 비좁아서, 쓸쓸히 처사의 집 같기에, 마음속으로 공이 주변 경치에는 치우치게 좋아하는 습성이 있으나 살림은 등한시한다는 것을 짐작하였었다. 그런데 오늘 여기에 와서 보고 또 공이 주변 경관을 비록 매우 좋아하기는 하나, 있는 곳마다 한결같고 집을 짓는 데에 공(公)과 사(私)가 달랐다는 것을 알았다. 공의 당(堂)은 이미 호계(虎溪)와 어울리는데, 나의 문장은 졸렬하여 이 당에 알맞지 못하니 어리하리. 그러나 김해는 나의 관향(貫鄕)이고 나의 선대부(先大夫)께서 선존부(先尊府)와 통가(通家)한 좋은 의리가 있으니, 비록 어울리지 않더라도 감히 사양하지 않는 바이다.” 하였다.『신증』 함허정(涵虛亭) 연자루 북쪽에 있으며 부사 최윤신(崔潤身)이 건축한 것이다. 호계 물을 끌어서 연못을 만들고 그 복판에다 정자를 지었는데 매우 조촐하고 시원하다.
○ 김일손(金馹孫)의 기문에, “금관(金官)은 옛 나라이다. 그러므로 기이한 자취가 많다. 지금 부사 최후(崔侯)는 굳센 의지와 재간을 갖추어 이미 연자루를 중수하였고, 옛 나라의 문물을 빛나게 꾸미는 데에 극진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누 바로 북쪽, 파사탑(婆娑塔) 남쪽에 네모진 못을 파서 호계의 물을 끌어와 휘몰아 들게 하고, 못 복판에는 가짜 섬을 쌓아서 높은 축대를 만들었다. 축대 위에는 집을 지었는데, 띠[茅]를 덮은 정자와 물을 가로질러서 작은 다리를 만들었다. 고기를 넣고 연(蓮)을 심었으며 물새 따위를 넣어서 물오리ㆍ갈매기ㆍ따오기들이 떴다 잠겼다 하는 것을 바라본다. 작은 배에다가 기악(妓樂)을 싣고 중류에서 뱃노래하며, 능파(凌波 뱃놀이 할 때에 부르는 노래)의 노래를 짓기도 한다. 최후가 항상 빈객을 맞이하여 마시기를 즐기고 머무르게 하니, 사람들이 물 위의 신선같이 보았다. 수면이 맑디맑아 편평하게 엉긴 듯 아득히 물결이 퍼지고, 누관(樓觀)ㆍ성곽ㆍ봉우리ㆍ수목ㆍ해와 별ㆍ구름들이 물 속에 그림자가 거꾸로 잠기지 않는 것이 없다. 못 크기는 반 묘(畝)인데 물이 고여서 일렁이며 하늘을 머금고 있다. 최후가 좌상(左相) 어공(魚公 세겸(世謙))에게 정자 이름을 청하여 함허(涵虛)라고 명명하였다. 홍치(弘治) 무오년 중하(仲夏)에 내가 환난을 면하고 도주(道州)에서 와 조상 산소에 성묘하면서 잠시 산소 근처의 별장(別莊)에서 쉬고 있었는데, 최후가 방문하고 이어 나를 맞이하여 성에 들어 함허정을 보고 기문을 짓게 하는데, 늙고 병든 목숨이 부질없이 세상에 있으니 야인의 복색으로 강호에 노니는 것이 알맞을 뿐이므로, 스스로 성시(城市)에 출입하는 것이 겁나고 글솜씨가 난삽하다고 사양하였다. 그러나 사양하다가 부득이하여 최후에게 나중에 기문을 짓겠다고 청하니, 최후가 승낙하였다. ‘물의 본성은 두루 흘러서 머무르지 않지만 체(體)는 본래 허(虛)하다. 허한 까닭에 능히 물건의 그림자를 머금는다. 그러나 고인 물의 탁한 흐름에 마른 풀과 나무토막 따위가 떠서, 흐르면서도 그 본성을 흐리면, 어찌 능히 저같이 비치게 할 수 있으랴. 대개 사람의 마음도 용(用)은 움직여서 다함이 없고, 체는 고요하여 본래 허하다. 허한 까닭에 오덕(五德)과 만물을 구비하여, 천지와 일월이 모두 내 마음속의 물건이다. 한 번이라도 간사한 생각이 마음을 범하면 본체의 허함을 잃어서 만사의 용에 어긋나니, 마음에 응하고 정사(政事)에 통하여 오하(汚下)하지 않는 것이 없다. 공무의 여가에 아전들이 물러가고, 뭇 소란이 잠잠해졌을 때 두건을 높이 쓰고 정자에 오르면 바람과 달이 함께 맑으니, 물이 하늘을 머금어 비치는 것인가, 하늘이 물을 머금어 비치는 것인가. 어공(魚公)께서 명명한 것이 이에서 어울리며 최후가 그를 즐거워하니, 또한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겠다. 최후에게 청하노니, 잠자코 앉아서 고요하게 바라보아 그 마음을 깨끗하게, 그 생각을 맑게 하여 본체를 궁구하면, 사소한 찌꺼기라도 자신의 가슴속을 능히 더럽히지 못할 것이며, 소리개가 하늘을 날고 고기가 못에서 뛰노는 자연의 묘함[飛魚]을 또한 착실하게 이해하게 될 것이니, 청허(淸虛)함을 숭상하고 풍아(風雅)함을 꾸며서, 지나가는 객에게 칭을 받으려 힘쓰는 따위는 알 바 아닐 것이다. 나는 노쇠한 데다 병들었으니, 어찌 능히 수함(水檻)에 기대서 하늘 빛과 구름 그림자가 물 위에 배회함을 보며, 그 맑음을 움키며 활수(活水)의 근원을 찾을 수 있으랴.’ 하고 드디어 함허정의 경치를 적어서 최후에게 돌려주노라. 최후의 이름은 모(某)이고 자(字)는 모이며, 모향(某鄕) 사람이다. 집안 대대로 교분이 있으며 또 나의 고을 원이 되었으므로 의리상 적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학교】 향교(鄕校) 부 북쪽 3리 지점에 있다.
○ 이곡(李穀)의 〈수헌기(水軒記)〉에, “경원(慶源) 이국향(李國香)군이 도관정랑(都官正郞)으로서 양주(梁州)의 원이 되었는데 청렴하고 유능하다는 명망이 있었다. 국가에서 여러 도(道)의 수령을 오랫동안 교체하지 않아서 백성에게 모질게 하는 자가 제법 있자, 그중에서 우심(尤甚)한 자는 태거(汰去)하고 가까운 주(州)의 수령에게 겸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이에 따라 이 군이 이 부를 임시로 맡게 되었다. 정사를 보게 되자 문묘(文廟)에 가서 선성(先聖)을 배알하고 물러나서 여러 학생에게, ‘무릇 임금 섬김과 어버이 섬김, 몸을 닦음과 남을 다스림은 모두 배워서 아는 것이다. 배움이란 농부와 같은 것이어서 진실로 그 일에 태만하거나 그 시기를 잃으면 후회하여도 소용없다. 여러 학생이 힘쓰는데 이 학사(學舍)는 비좁고 더러우니 넓히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예전에는 학사 동쪽 시내 너머에 작은 정자가 있어서, 매년 여름 공부 때에 빈객이 오면 여러 학생을 그 밑에 앉게 하고, 초에 금을 그어 놓고 그 촛불이 금에까지 타는 것으로 시간을 한정하여 시를 지었다. 그러나 혹 장마비가 오면 사람이 모두 걱정하였는데, 이군이 그 까닭을 듣고 주의 아전에게 부탁하여 이내 농한기에 공사를 하게 하여 재목을 풍부히 가져다 터를 크게 하여 넓히고 새롭게 하였다. 예전에는 겨우 무릎이 들어갔으나, 지금은 함장(函丈 강사)과 빈객, 스승과 학생의 위치가 넉넉하고 여유 있게 되었다. 한창 여름날에 북산(北山)에 기대 앉아 남강(南江)을 굽어보면 물이 자리 밑에 흐르고 바람이 처마 사이로 분다. 악기를 타고 읊조리는 여가에 붓을 잡아 시를 지으면 정취가 초연(超然)하여 그런 줄을 모르면서 그런 것이 있다. 공역을 겨우 마쳤을 무렵에 내가 마침 도착하니, 이군이 여러 학생을 거느리고 그 사실을 말하면서 나에게 기문을 부탁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성스러운 원(元) 나라가 문치(文治)를 크게 일으키고, 또 천하에 조서를 내려 새 학교를 지으니, 내가 외람되게 천조(天朝 중국 조정) 신하의 반열에 참여하여 이 조서를 받들고 동방에 와서 반포하게 되었다. 여러 고을을 지나며 살펴보았는데, 문묘와 학교가 무너지고 헐었으며 생도가 학업을 게을리하는 것이 왕왕히 모두 이러하였으니 누가 성스러운 원 나라가 유술(儒術)을 높이는 아름다운 뜻을 알겠는가. 그러나 지금 이 부만은 어진 수령을 만나서 문풍을 진작시키니, 내 비록 배운 바 없으나 감히 그 사실을 기록하여 여러 후진에게 보이지 않으리오. 이미 이것으로써 이군에게 말하고, 또 여러 학생에게 나아가 이르기를, ‘옛사람 중에는 항아리 주둥이로 바라지[牖]를 대신하며 담을 규(圭) 모양으로 뚫은 허름한 집에서도 유행(儒行)을 닦은 자가 있었으니, 학문에 대한 부지런함과 게으름이 어찌 거처에 관계되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문묘와 학교의 제도는 삼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이공은 힘쓸 바를 알았다 할 수 있으며, 또 수헌(水軒)을 먼저 중수한 것도 대개 그 뜻이 있는 것이다. 중니가, 「물이여, 물이여.」 하신 것은, 장차 배우는 자로 하여금 아침저녁으로 보아서, 근원 있는 샘물이 밤낮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졸졸 흐르는 것을 본받게 하신 것이다.’ 하였다.” 하였다.
【역원】 남역(南驛) 부 동쪽 5리 지점에 있다. 덕산역(德山驛) 부 동쪽 37리 지점에 있다. 금곡역(金谷驛) 부 북쪽 35리 지점에 있다. 성법역(省法驛) 부 서쪽 28리 지점에 있다. 적항역(赤項驛) 부 남쪽 31리 지점에 있다. 태산역(太山驛) 태산부곡(太山部曲)에 있다. 남정역(南亭驛) 부 남쪽 5리 지점에 있다. 이수원(梨樹院) 부 동쪽 15리 지점에 있다. 황산원(黃山院) 부의 황산강(黃山江) 언덕에 있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한 무리 높은 누각이 물에 걸터앉아 솟았고, 올라서니 만 형상이 다 그림일세. 마름이 자라고 버들이 선 물가는 강 마을과 가깝고, 보리 언덕에 뽕밭이 있는 역참 외로워라. 물결 소리에 놀라 깨니 바람의 조화요, 산빛이 말갛게 씻기니 비의 공일세. 이 중에 좋은 경치 누가 거두어 모을까. 시인과 주객(酒客)이 아니라면.” 하였다. ○ “침침한 저문 경치 화루(畫樓)를 둘렀구나. 만 점 고기잡이 등불은 별이 모인 그림일세. 긴 병풍이 땅을 두르고 있는 것은 푸른 산이 합한 것이요, 한 자 되는 구슬이 하늘에 닿은 것은 외롭게 떠 있는 달이로다. 이슬이 솔가지에 내리니 학이 놀라고, 연기가 연잎에 자욱하고 거북이 안 보이네. 가엾어라. 온 세상이 명리(名利)에 분주하구나. 손 잡고 경치 찾으려도 함께 할 이 적어 안타깝네.” 하였다. 흥복원(興福院) 서쪽 7리 지점에 있다. 냉천원(冷泉院) 부 서쪽 30리 지점에 있다. 노현원(露峴院) 노현 아래에 있다. 초령원(草嶺院) 부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북정자원(北亭子院) 부 북쪽 7리 지점에 있다. 삼기원(三岐院) 부의 북쪽 10리 지점에 있다. 해양원(海陽院) 뇌진(磊津) 언덕에 있다. 태산원(太山院) 태산역 옆에 있다.
【교량】 방포교(防浦橋)ㆍ덕교(德橋) 덕포(德浦)에 있다. 배들이 그 밑을 지나서 주촌지(酒村池)에 정박하였다.
【불우】 감로사(甘露寺) 신어산(神魚山) 동쪽 옥지연(玉池淵)에 닿아 있다. 송(宋) 나라 이종(理宗) 가희(嘉熙) 원년에 중 해안(海安)이 건립하였고, 중 몽암(夢庵)의 기문이 있다. ○ 안유(安裕)의 시에, “수면 위에 한 잎 날아들고, 범왕궁(梵王宮) 금벽(金碧) 칠이 공중에 빛나네. 고갯 머리 푸르름은 산의 그림자 아니요, 돌 위에 졸졸거림은 빗소리 같구나. 햇살 따사로운 뜰에 핀 꽃은 옅은 푸름을 지녔고, 서늘한 밤이 찾아온 산에는 달 떠올라 어스름 한 빛 보내오네. 백성을 염려해도 도탄에서 건져내지 못하니, 부들 자리에 앉아 여생을 보내고자.” 하였다. ○ 이견간(李堅幹)의 시에, “선동(仙洞)에 오가면서 관평(寬平)함을 얻었고, 연방(蓮坊 절)이 고을 성과 멀리 있음을 기뻐하네. 삼면으로 반공(半空)은 모두 산 빛이요, 한 자락 빈 데엔 강물 소리 들리네. 앞 마을 아득해 고기잡이 등이 어둡고, 별원(別院)이 쓸쓸한데 안탑(雁塔)만이 환하구나. 어찌 임금을 받들어 축수하지 않으리, 자색 금니(金泥)로 포의의 선비를 기용하였네.” 하였다. 금강사(金剛社) 부 북쪽 대사리(大寺里)에 있다. 고려 충렬왕(忠烈王)이 합포(合浦)에 행차하였을 때, 여기에 와서 놀았다. 불훼루(不毁樓)가 있다. 하륜(河崙)이 기문에, “김해(金海)는 옛날의 가락(駕洛)이니, 가야(伽倻)이다. 가락은 신라와 함께 일어났고, 수로왕의 탄생은 참으로 기이하며, 내려온 습속에는 아직도 순박한 풍속이 있다. 또 등림하기에 좋은 경치도 남방에서 첫째인데, 그 중에서도 금강사의 소헌(小軒)이 제일이다. 사(社)에 산다수(山茶樹)가 있어 온 뜰을 덮었으니, 전조(前朝) 충렬왕이 보련(寶輦)을 여기에 멈추고 장군이라고 칭호를 내렸으므로 부로들은 이 일을 미담으로 서로 전해 온다. 내가 소년 시절에 객으로 왔었는데, 한 창 중춘(仲春)이어서 산다화가 활짝 피어 있기에 반나절이나 구경하였으나 흡족하지 않았다. 다만 마루가 낮고 작으므로 나뭇가지와 잎이 서로 가리워서 멀리 내다보기가 어려웠다. 문을 나서자 그제야 산과 바다의 참모습을 보게 되어 두루 거닐고 읊조리면서 한참 있다가 돌아왔다. 그 뒤에도 가끔 다시 유람하려는 계획이 있었으나 지금까지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제 그곳의 부사 우균(禹均)이 부 사람인 전 현감(縣監) 옥사문(玉斯文)을 나에게 보내 와서 청하기를, ‘유후(留後) 안공(安公)이 일찍이 본부 부사로 있었고, 도관찰(都觀察)이 되어서는 금강사를 두 번이나 유람하였는데, 그때 부사였던 현맹인(玄孟仁)에게 이르기를, 「사 남쪽에 작은 누(樓)를 지으면 반드시 기이한 경치가 될 것이오. 예전에 내가 그렇게 하고 싶은 뜻이 있었으나 이루지 못하였소. 지금 또한 백성을 번거롭게 할 수는 없으니, 만약 사의 중들을 시켜서 힘쓰게 하면 어렵지 않을 것이오.」 하였소. 현군이 이에 공인을 청해서 터를 잡아 짓기 시작하였는데, 중들이 각자 힘을 다해서 두어 달이 못 되어 완성하니, 한 구역의 훌륭한 경치가 모두 여기에 있게 되었소. 또 누 남쪽에 물을 끌어 못을 만들고 그 안에다가 연을 심었으며, 다시 그 동쪽에는 흙을 쌓아서 뜰을 만들고 그 위에다가 대를 심었소. 가까우면서 즐길 만한 것이 또 이와 같으니, 자네는 부디 이름을 지어주고 또 기문을 지어 누를 빛나게 해주시오.’ 하였다. 나는 나의 글이 비졸(鄙拙)하다고 사양하였는데 지금 그 부의 현량(賢良)으로 절제(節制)를 지낸 송득사(宋得師)군이 또 우군의 뜻으로 거듭 간청하였다. 생각하건대, 금강 불훼(金剛不毁)라는 것은 석씨(釋氏)의 말이니, 내가 그 뜻을 부연(敷演)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누의 터가 이미 사의 경내(境內)에 이어져 있고, 누를 완성한 것도 또한 사 중들의 손으로 지어졌으니 사를 이름한 말을 따서 누 이름으로 하여도 또한 구차하지 않으리라. 사가 허물어지지 않으면 누 또한 허물어지지 않을 것이며, 누가 허물어지지 않으면 여러분의 이름도 또한 없어지지 않으리라. 대개 누관(樓觀)을 짓고 제목으로 하여 글을 짓는 것이 세도와 관계가 없을 듯하나, 여기에서 세도의 오르내림을 볼 수 있다. 만약 정사가 화평하지 못하거나 송사가 다스려지지 않으며, 시절(時節)이 화하지 못하거나 풍년으로 여유롭지 않으면 백성과 함께 즐거움을 같이 하려는 뜻이 있는 자라 하더라도 능히 이르지 못할 것이다. 그러하니 여러분이 정성스럽게 한 계획이 완성되었고, 우군이 누의 기문과 이름을 구하는 데 유의(留意)하는 것이 어찌 모두 세도를 위해서 기쁜 일이 아니리오. 하물며 내가 옛날에 거닐던 곳임에랴. 내 이 때문에 굳이 사양하지 않고, 누를 불훼(不毁)라 이름하며, 또 예전에 일찍이 보고 들은 것과 오늘날 마음에 느낀 바를 적어서 기문으로 한다. 이 누에 올라서 이 글을 보는 자가 진실로 제 마음을 반성하여, 지나치게 즐기다가 그 절제(節制)를 허물지 않고, 방종과 오만으로 그 덕을 허물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마음으로 공도(公道)를 허물지 않고 편견으로 올바른 사리를 허물지 아니하며, 털끝만한 혹독함으로 인(仁)을 허물지 않고, 털끝만한 사욕으로 의를 허물지 아니하며, 국가의 전칙(典則)을 허물지 않을 바를 생각하고, 부조(父祖)의 훈계를 허물지 않을 바를 생각하여, 무릇 한 몸의 사업을 허물지 않을 것을 생각지 않는 것이 없어서 영원토록 허물지 않는 경지에 이르면, 이 누에 오른 이익이 진실로 적지 않으리라. 풍경의 묘함과 지음새의 정밀함은 내가 직접 보지 못했으니 자세히 적기는 어렵다. 어찌하면 하늘이 세월을 빌려주어 벼슬을 마치고 시골에 돌아와서, 촉석강(矗石江)에 배를 띄우고 흐름을 따라 내려와 황산포(黃山浦)에 이르러 한 번 누 위에 올라 다시 글 한 편을 지을 수 있을까. 안공의 이름은 순(純)으로 판문하(判門下) 쌍청 선생(雙淸先生)의 손자이며, 개국공신 흥녕군(興寧君)의 아들이니, 이번 일로 볼 때 그 분도 또한 아담한 도량과 문장의 풍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였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말 가는 대로 따라서 이름난 구역 다 지나고, 분성(盆城) 북쪽에 절을 찾았네. 금관(金官)은 옛 나라니 하늘도 땅도 늙었네. 옥련(玉輦)이 노닐었던 세월도 아득하다. 시조왕릉 그윽한데 산은 적적하고, 장군 나무 늙었는데 풀은 무성하다. 가야 옛 물건 가야금 아직 남아 있으니, 가인(佳人)을 시켜서 다시 한 번 나지막이 창(唱)하여 볼거나.” 하였다. 귀암사(龜巖寺)ㆍ십선사(十善寺)ㆍ청량사(淸涼寺) 모두 신어산(神魚山)에 있다. 이세사(離世寺) 신어산에 있다. ○ 고려 곽여(郭與)의 시에, “늦은 가을 푸른 바다 천 길 물결에 한 잎의 조각배 만 리 가는 사람일세. 멀리 종소리 듣고 절 찾아 와서, 잠깐 풍어(風馭 바람에 날리는 돛대)를 머물러 신선이 되고자 가야국 왕업은 강가 풀밭에 이어져 있고, 수로왕 후손은 고을 백성이 되었네. 남방 옛 도읍을 이제 이미 보았으니, 조각배 돌려 바다와 산의 봄을 멀리 향하고 갈거나.” 하였다. 운점사(雲岾寺) 운점산에 있다. 진국사(鎭國寺)ㆍ명월사(明月寺) 모두 명월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부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鄕校)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분산(盆山)에 있다. 송악당(松岳堂) 금강사(金剛祠)에서 서북쪽으로 2백 보쯤 되는 지점에 있는 작은 언덕 위에 신사(神祠)가 있는데, 송악당이라 한다. 전설에는, “고려 원종(元宗)이 원 나라의 명을 받들고 장군 김방경(金方慶)을 보내어 동쪽으로 일본을 정벌할 때에 금강사에 머물렀다. 그때에 이 언덕에서 송악의 신에게 제사하였다.” 한다. 고을 사람들이 그대로 따라 제사하여서 이 고을의 성황당 신에게 제사하는 자는 반드시 여기에도 겸해서 제사지낸다. 여단(厲壇) 부 북쪽에 있다.
【능묘】 수로왕릉(首露王陵) 부 서쪽 3백 보 지점에 있다. 해마다 봄ㆍ가을에 부중(府中)의 부로들이 함께 모여서 제사지낸다. ○ 한(漢) 나라 헌제(獻帝) 건안(建安) 4년에 가야국 시조 수로왕이 훙(薨)하니, 성 북쪽에 장사지내고 능 곁에 있는 밭 30경(頃)을 바쳐 봄ㆍ가을 제사하는 비용에 충당하였다. 신라 말에 장군 충지(忠至)가 금관성(金官城)을 진수(鎭守)하였는데, 영규(英規)라는 자가 장군의 위세를 빙자하고 제물을 빼앗아서 치고(致告)였더니, 사당의 들보가 부러지면서 영규의 이마에 떨어져서 마침내 죽었다. 충치가 두려워하여 왕의 진영(眞影)을 그려서 사당 벽에다가 봉안하고 조석으로 제사하였더니, 사흘이 되자 진영에서 피눈물이 흘러 땅에 고인 것이 거의 한 말이 되니, 충지가 두려워서 태워버렸다. 그 뒤에 도둑떼가 능 안에는 반드시 금은 보화가 감추어져 있을 것이라 여겨서 무덤을 파헤치려고 하였는데, 갑옷을 입은 용맹스러운 병사가 능 안에서 나와 여덟 사람을 쏘아 죽이니, 도둑이 놀라 달아났다. 며칠 뒤에 다시 갔는데, 길이가 30여 척이나 되고 눈빛이 번개 같은 큰 뱀이 능 곁에서 나와서 아홉 사람을 물어 죽이니, 나머지 도둑들이 모두 엎어지면서 달아났다. 순화(淳化) 2년에 양전사(量田使) 조문선(趙文善)이 능 밭을 반으로 줄여 백성에게 주려 하였더니, 그날 저녁 꿈에 신인(神人) 7, 8명이 칼을 들고 와서, “네가 큰 죄악이 있으므로 베어 죽이고자 한다.” 하였다. 조문선이 놀라 깨어 병이 나서 밤에 도망하다가 길가에서 죽었다.
○ 고려 문종(文宗) 때에 지주사(知州事)가 능명(陵銘)을 짓기를, “원태(元胎 천지)가 비로소 열리고 이안(利眼 선악을 가리는 눈)이 처음으로 밝았다. 사람의 무리는 태어났으나, 임금 자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중국 조정은 여러 대를 지났으나, 동국은 서울이 갈라져 계림(鷄林)이 먼저 정하고, 가락은 나중에 경영하였다. 본래 제대로 맡은 이 없으니 누가 백성을 살피리. 이에 하느님[玄造]이 저 창생을 돌보시어, 부명(符命 명령)을 전수하고 특히 정령(精靈)을 보내셨다. 산중에 알을 내리니, 안개 속에 형체를 감추었다. 안쪽은 오히려 막막하고 겉도 또한 어두웠다. 바라봐도 형상 없는 듯하나 이내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무리가 노래하며 연주하고 대중이 춤을 추며 올렸다. 이레 뒤에 한때를 만나, 바람 불고 구름 걷혀 공중이 파랗고 하늘이 푸르렀다. 여섯 개 둥근 알을 내렸는데 한 가닥 자색 끈이 드리웠다. 먼 지방 다른 지역에 집이 나란히 섰고 대마루가 잇닿았는데, 구경하는 자가 담같이 둘러섰고 보는 이들이 국처럼 들끓었다. 다섯 사람은 각 고을로 돌아가고 한 사람만이 이 성에 남았다. 같은 때와 같은 자취가 아우 같고 형 같았다. 진실로 하늘이 덕 있는 이를 낳았고 세상을 위해 법을 만들었다. 보위에 처음 오르니 천하가 청명하였다. 궁궐은 옛법을 따르고 흙 섬돌도 오히려 편평하였다. 만 가지 일[萬機] 비로소 힘쓰니 서정(庶政)이 시행되었다. 치우침이 없고 무리를 짓지 아니하며, 오직 한결같고 오직 정(精)하였다. 길 가는 자가 서로 길을 양보하고, 농사짓는 자가 밭두둑을 사양하였다. 사방이 베개를 편히 베고 만백성이 화평하였다. 얼마 후에 해로(薤露)가 마르니 춘령(椿齡)을 보전할 수 없었다. 천지간에 기운이 변하니 조야가 마음 아파하였다. 금으로 그 자취를 형상하고 옥이 그 소리를 거두었다. 묘예(苗裔 후손)가 끊어지지 않아, 올리는 제물은 오직 향기로웠고, 세월이 가도 의식은 기울지 않았다.” 하였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금릉(金陵) 지난 일은 누구와 함께 말하리. 천고에 오직 수로왕의 능만 남았네. 귀지곡(龜旨曲) 없어지고 사람도 안 보이나, 가야금은 남아 묘한 소리 들을 만하네. 동타(銅駝) 있던 옛 마을에 산이 창 같고, 옹중(翁仲) 빈 터에 나무만 구름 같네. 백 60년 동안 국가를 누렸으나, 가련하다. 황량한 무덤에 몇 번이나 저녁 해 비꼈던가.” 하였다. 허왕후릉(許王后陵) 귀지산 동쪽에 있다. 전설에, 왕비가 아유타국(阿踰陀國) 왕녀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남천축국(南天竺國) 왕녀라고도 한다. 성은 허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보주태후(普州太后)라 부른다. 고을 사람들이 왕릉에 제사할 때에 함께 제사한다.
【고적】 수로왕궁(首露王宮) 지금 부 안에 옛터가 남아 있다. 망산도(望山島) 동한(東漢) 건무(建武) 24년 7월에 허왕후가 아유타국에서 바다를 건너 왔다. 수로왕이 유천간(留天干)에게는 망산도에서 바라보게 하고, 신귀간(神鬼干)에게는 승점(乘岾)에서 바라보도록 명하였다. 붉은 돛과 꼭두서니 빛 깃발이 바다 서남쪽에서 북쪽을 지향하는 것을 보고, 신귀가 달려와서 아뢰니, 왕이 궁 서쪽에다 장막을 치고 기다렸다. 왕후는 배를 매고 육지에 올라, 높은 봉우리에서 쉬면서, 입었던 비단 바지를 벗어서 산신령에게 예물로 바쳤다. 왕후가 이르자 왕이 장막으로 맞아들이고 이틀 뒤에는 같은 연(輦)을 하고 대궐에 돌아와 후(后)로 삼았다. 그 뒤 영제(靈帝) 중평(中平) 6년 기사 3월에 후가 승하하였는데, 수명이 1백 57세였다. 나라 사람들은 처음 와서 배를 매어 놓았던 곳을 주포촌(主浦村), 비단 바지 벗던 곳을 능현(綾峴), 꼭두서니 빛 깃발이 들어온 곳을 기출변(旗出邊)이라 하는데, 주포촌 왼쪽에 있으며 지금도 그 이름이 남아 있다. 왕후사(王后寺) 옛 터가 장유산(長遊山)에 있다. 수로왕 8대손 질지왕(銍知王)이, 그때에 장막치고 합혼(合婚)하던 곳에다가 절을 세우고 왕후사라 하였는데, 뒤에 절은 파하고 장(莊)으로 만들었다. 초현대(招賢臺) 부 동쪽 7리 지점에 있으며 작은 산이다. 전설에는, 가락국 거등왕(居登王)이 칠점산(七點山) 담시산인(旵始山人)을 초청하니, 담시가 배를 타고 거문고를 가져와서 서로 더불어 즐겼으므로 그대로 이름하였다. 왕이 앉았던 연화석(蓮花石)과 바둑판 돌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파사석탑(婆娑石塔) 호계(虎溪) 가에 있으며 5층이다. 돌빛이 붉게 아롱졌으며 질은 좋으면서 무르고, 조각한 것이 배우 기이하다. 전설에는, 허왕후가 서역(西域)에서 올 때에 이 탑을 배에 실어서 풍파를 진정시켰다 한다. 진례성(進禮城) 부 서쪽 35리 지점에 옛터가 있다. 신라 때에 김인광(金仁匡)을 진례성제군사(進禮城諸軍事)로 삼았다. 수다부곡(水多部曲) 부 동쪽 15리 지점에 있다. 제을미향(齊乙彌鄕) 부의 남쪽 20리 지점에 있다. 성화례향(省火禮鄕) 부 남쪽 40리 지점에 있다. 달음포향(達音浦鄕) 부 동쪽 25리 지점에 있다. 감물야향(甘勿也鄕) 부 동쪽 20리 지점에 있다. 분산성(盆山城) 석축이며 둘레가 1천 5백 60척이었는데, 지금은 모두 무너졌다. 성안에 우물 둘이 있는데, 겨울이나 여름에나 마르지 않는다. 조전성(漕轉城) 부 동쪽 18리 지점에 있다. 석축이며 둘레는 2백 65척이다.
【명환】 신라 김인광(金仁匡)ㆍ충지(忠至) 고려 송언기(宋彦琦) 정사를 청렴하고 공평하게 다스리니 간사하고 사나운 이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김훤(金晅) 방어사(防禦使)로 있었는데 그때에 밀성(密城) 사람이 그 고을 원을 죽이고 삼별초(三別抄)와 호응하여 이웃 고을에 첩문(牒文)을 보내니, 모두 바람 따라 쏠리듯 하였다. 김훤이 정병(精兵)을 출동시켜서 먼저 적의 진로를 끊고 경주 판관(慶州判官) 엄수안(嚴守安)을 불러 와서 군대를 훈련하였으며, 안렴사(按廉使) 이숙진(李淑眞)에게 적을 토벌할 계책을 하게 하였는데, 숙진이 겁내어서 술승(術僧)을 불러 길흉을 점치며 일부러 머뭇거리는 것이었다. 김훤이 손에 칼을 쥐고 그 중을 치니 숙진이 두려워서 그 계책대로 따랐다. 적이 이 소식을 듣고 저들의 괴수를 베어서 항복하였다. 삼별초가 군사를 나누어서 경상도 방면으로 향하고자 하였는데, 금주(金州)가 변방에 있으므로 적의 침공을 먼저 받았다. 김훤이 계책으로 항전하여 적이 들어오지 못하니 온 도가 그의 덕분에 편안하였다. 논공(論功)할 때에 본주(本州)를 금녕부(金寧府)로 승격하고, 김훤은 예부 낭중(禮部郞中)으로 임명되었으며, 그대로 도호(都護)로 삼아서 진수(鎭守)하게 하였다. 한강(韓康) 수령이 되었다. 이보다 앞서 토지의 부세(賦稅)가 항상 액수를 채우지 못하여 그 때문에 연좌되어 파직된 수령이 많았다. 한강이 와서는 황폐된 둔전(屯田)을 다시 개간하여 곡식 2천여 석을 얻으니 아전이 단속되고 백성이 편안해졌다. 치적이 첫째를 차지하였으므로 불러올려 예부 낭중을 삼았다. 최득평(崔得枰) 수령으로 있었는데 백성들이 그의 은혜를 그리워하였다. 벼슬이 선부 전서(選部典書)에 이르렀다. 이우(李瑀) 수령이었을 때 인애(仁愛)하는 정사를 남겼다. 전신(全信) 부사였는데 백성이 오래도록 사모하였다. 윤선좌(尹宣佐) 장서기(掌書記)를 지냈다. 안축(安軸) 사록(司錄)을 지냈다. 이암(李嵒) 수령을 지냈다. 이언중(李彦仲) 목사를 지냈다.
본조 안순(安純) 판관(判官)을 지냈다. 김치(金峙)ㆍ우균(禹均)ㆍ윤기견(尹起畎) 모두 부사를 지냈다. 이맹현(李孟賢) 부사를 지냈다.『신증』 하경리(河敬履)ㆍ김숭해(金崇海)ㆍ김의형(金義亨)ㆍ손중돈(孫仲暾) 청렴ㆍ명백한 정사를 하니 아전이 두러워하고 백성이 감사하였다.
【인물】 신라 김무력(金武力) 수로왕의 10세 손으로, 신주도 총관(新州道摠管)이었다. 일찍이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왕(百濟王)을 잡았다. 김서현(金舒玄) 무력의 아들이다. 벼슬이 소판 대량주 도독 안무 대량주 제군사(蘇判大梁州都督安撫大梁州諸軍事)에 이르렀다. 김유신(金庾信) 서현의 아들이다. 서현이 일찍이 만노군 태수(萬弩郡太守)로 있었는데, 경진일(庚辰日) 밤 꿈에 형혹성(熒惑星)과 진성(鎭星) 두 별이 자기에게 내려왔다. 아내 만명(萬明)도 금갑옷을 입은 동자가 구름을 타고 당(堂)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얼마 있다가 아기를 배었다. 20개월 만에 낳으니 진평왕(眞平王) 건복(建福) 12년이고, 수(隋) 나라 문제(文帝) 개황(開皇) 15년 을묘년이었다. 서현이 부인에게 말하기를, “내가 경진일 밤 길몽을 꾸고 이 아이를 얻었으니, 이것으로 이름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예(禮)에, 일월(日月)로써 이름하지 않는다 하였다. 지금 경(庚) 자는 유(庾) 자와 비슷하고, 신(辰)은 신(信)과 음이 서로 같으니 어찌 그것으로 명명하지 않겠는가.” 하고, 드디어 유신이라 이름하였다. 나이 15세에 화랑(花郞)이 되니, 당시 사람들이 모두 복종하여 용화향도(龍華香徒)라 불렀다. 뒤에 신라 태종(太宗)을 도와서 당(唐) 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과 함께 백제를 멸망시키고, 또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나이 79세에 죽으니 비(碑)를 세워서 그의 공적을 기록하였고, 뒤에 흥덕왕(興德王)이 추후하여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봉하였다.
○ 김부식(金富軾)이 사론(史論)에, “어진 이를 임용하여서는 바꾸지 않고, 간사한 이를 버리는 데는 의심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신라가 유신을 대우한 것을 보건대, 친근하여서 간격이 없고, 위임하여서는 의심하지 않았다. 모의한 것은 실행되고 말은 들어주어, 써주지 않는 것을 원망하지 않게 하였으니, 육오 동몽(六五童蒙 아랫사람 말을 믿고 자기의 뜻만을 주장하지 않는 것)의 길함을 얻었다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유신이 제 뜻을 행할 수 있었으며, 상국(上國)과 꾀를 합하여 세 나라를 합쳐 한 나라로 만들었으며, 공명(功名)으로 끝마쳤다. 비록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지략(智略)과 장보고(張保皐)의 의용(義勇)이 있었으나, 중국 문서가 없었으면 사라져서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신의 경우에는 나라 사람들이 지금까지 칭송(稱誦)해 마지않는다. 사대부가 알고 있는 것이야 당연하지마는 초동 목수[蒭童牧豎]도 또한 알고 있으니, 그 사람됨이 반드시 남과 다름이 있을 것이다. 김삼광(金三光) 유신의 아들이다. 김원술(金元述) 삼광의 아우이다. 법민왕(法敏王)이 고구려를 배반한 백성을 받아들이고 또 백제의 옛 땅을 차지하니, 당(唐) 나라 고종(高宗)이 크게 노하여 장수에게 토벌하도록 명하였다. 왕은 장군 의복(義福) 등을 보내어 대방(帶方) 들판에서 방어하였으나 패전하였다. 원술이 전쟁터에 나가 싸우다 죽고자 하였으나 담릉(淡凌)이 만류하였다. 서울에 돌아오니 그의 아버지 유신이, “원술은 왕명을 욕되게 하였을 뿐 아니라, 가훈 또한 저버렸으니 참(斬)해야 한다.” 하였다. 왕이 용서하였으나 원술은 부끄럽고 후회되어서 감히 아버지를 뵙지 못하고 전야(田野)에 숨어 살았다.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에게 뵈옵기를 청하였는데, 어머니는, “부인은 삼종(三從)하는 의(義)가 있으니 자식을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원술은 이미 그 아버지에게 자식이 되지 못하였으니, 내가 어찌 어머니가 될 수 있으랴.” 하고, 마침내 보지 않았다. 원술이 탄식하면서, “담릉 때문에 그르쳐서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하고, 태백산에 들어가 버렸다. 그 뒤에 당 나라 군사가 와서 매소천성(買蘇川城)을 공격하니, 원술은 전일의 부끄러움을 씻고자 힘껏 싸워서 공과 상이 있었으나, 부모에게 용서받지 못한 것을 안스럽게 여겨서 벼슬하지 않고 몸을 마쳤다. 김윤중(金允中) 유신의 손자이다. 성덕왕(聖德王) 때에 벼슬이 대아찬(大阿飡)에 이르렀다. 중추일(仲秋日)에 왕이 월성 잠두(月城岑頭)에 올라서 조망(眺望)하면서, 시종관과 술자리를 벌이고 윤중을 부르도록 명하였다. 간(諫)하는 자가, “종실(宗室)과 척리(戚里) 중에 좋은 사람이 많은데, 어찌 소원(疏遠)한 신하를 부르십니까” 하니, 왕이, “과인이 경들과 함께 평안하고 무사한 것은 윤중의 할아버지 덕이다.” 하였다. 드디어 윤중을 불러서 가까이 앉도록 하고, 그의 할아버지의 평생 사적을 언급하였다. 날이 저물어서 물러가겠다고 아뢰자 절영산(絶影山) 말 한 필을 하사하니, 여러 신하가 섭섭해하였다. 김암(金巖) 윤중의 서손(庶孫)이다. 성품이 총명하고 민첩하였으며, 방술(方術)을 좋아하였다. 젊었을 때 이찬(伊飡)이 되었고 당(唐) 나라에 들어가서 숙위(宿衛)로 있으면서, 가끔 스승에게 가서 음양가법(陰陽家法)을 배웠다. 스스로 둔갑입성(遁甲立成)이라는 책을 저술하여 스승에게 바치니, 스승이 부끄러워하면서, “자네의 밝게 앎이 여기까지 도달하였을 줄은 생각하지 못하였다.” 하고 이후로는 제자로 대우하지 않았다. 대력(大曆) 연간에 나라로 돌아와 사천대박사(司天大博士)가 되었다. 양주(良洲)ㆍ강주(康州)ㆍ한주(漢州) 태수를 지냈고, 뒤에 집사시랑(執事侍郞)이 되었다.고려 허유전(許有全) 원종(元宗) 말년에 과거에 올랐고 벼슬이 정승에 이르렀으며, 가락군(駕洛君)에 봉하였다. 그때 충선왕(忠宣王)이 토번(吐藩)에 유배되었는데, 유전이 민지(閔漬) 등과 원(元) 나라에 가서 송환하도록 청하였다. 그때에 유전의 나이가 81세였고, 아내도 또한 늙고 병들어서 말리니, 답하기를, “사람은 누구나 한번은 죽는 것이오. 그런데 어찌 아내가 병들고 제 몸이 늙었다 하여 임금을 잊고 스스로 편안할 수 있겠소.” 하였다. 아들 허영(許榮)에게 간호하도록 부탁하고 영결(永訣)한 다음 떠나가니, 이 말을 들은 자들이 감탄하였다. 그 뒤 9일 만에 아내가 죽었다. 김보(金普) 충혜왕(忠惠王) 때에 지밀직(知密直)으로 임명되었고, 공민왕(工愍王) 때에 첨의평리(僉議評理)로 전임되었다. 연저(燕邸) 시종한 공이 1등으로 기록되어서, 금녕부원군(金寧府院君)으로 봉해졌다. 송천봉(宋天逢) 충목왕(忠穆王) 때에 과거에서 장원으로 뽑혔고, 벼슬이 여러 번 승진되어 첨서밀직사사 김해군(簽書密直司使金海君)이 되었다. 문장으로써 세상에 알려졌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김유(金庾) 공민왕 때에 홍건적(紅巾賊)을 평정하고 경성(京城)을 수복하였다.
본조 김조(金銚) 처음 이름은 빈(鑌)이다. 과거에 올랐고 집현전 제학(集賢殿提學)과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지냈다. 세종(世宗) 때 흠경각(欽敬閣) 간의대(簡儀臺)를 창설할 적에, 김조가 김돈(金墩)과 함께 참여하였다. 시호는 공간(恭簡)이다. 김계희(金係熙) 과거에 올랐고 벼슬이 한성 부윤(漢城府尹)에 이르렀다. 김극검(金克儉) 과거에 올랐고 또 병술년 중시(重試)에 장원으로 뽑혀서 벼슬이 동지중추(同知中樞)에 이르렀다. 성품이 청렴개결(淸廉介潔)하여 살림에 힘쓰지 않았다.
【우거】 본조 권형(權衡) 과거에 올랐고, 벼슬이 여러 번 옮겨져서 예조 좌랑(禮曹佐郞)ㆍ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을 지냈다. 뒤에 초계 군수(草溪郡守)로 임명되었으나 사직하고 돌아와서 부모를 봉양하였다. 부모가 죽자 슬퍼하는 것이 지나쳐서, 이 때문에 병에 걸려 벼슬하지 못하였다.
【효자】 본조 반석철(潘碩徹) 부모 상(喪)을 당하자 직접 스스로 흙을 져다가 무덤을 만들고 거려(居廬)하면서 슬픔을 다하였다. 상을 마친 다음에는 초하루마다 사당을 배알하고, 출입할 때에 반드시 고하여, 돌아가신 부모 섬기기를 살아계신 분 섬기듯 하였다.
【열녀】 본조 성이(性伊) 부의 아전 허후동(許厚同)의 아내이니, 20세 때에 남편이 죽었다. 아침저녁으로 전(奠)의 제물을 정결하게 하고자 하여, 솥과 제기를 별도로 두고 사용하였다. 초하루와 보름이면 그 철에 알맞은 옷을 짓고, 그 철에 나는 물품을 갖추어서 제사하며 제사한 다음에는 불살랐다. 항상 강포(强暴)한 자에게 욕을 당할까 염려하여, 칼과 노끈을 차고 스스로 맹세하기를, “칼로 자결하지 못하면 끈으로 목매겠다.” 하였다. 3년 동안 피눈물을 흘렸으며 일찍이 남과 얼굴을 대한 적이 없었으니, 일이 나라에 알려져서 정려(旌閭)하였다. 돈지(頓之) 백성 김종(金宗)의 아내이니, 김종이 죽자 남과 말한 적이 없었다. 3년을 마치고도 오히려 상복을 입으니, 그 어머니가 빼앗아서 불태우려고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신증』 현금(賢今) 율생(律生 법률을 공부하는 학생) 배문생(裵文生)의 아내이다. 지아비가 다른 여자를 좋아하여 아내인 현금을 버렸다. 그러나 현금은 항상 술과 음식을 갖추어서 시부모를 봉양하였다. 그 아버지가 개가(改嫁)시키고자 하니, 현금은 옷을 갈아입고 방에 들어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제영】 초현대하해파명(招賢臺下海波明) 주열(朱悅)의 시에, “수로왕릉 앞에 풀빛이 푸르고, 초현대 밑에 바다 물결 밝구나. 봄 바람은 유망(流亡)한 집에 고루 들며, 매화를 피워서 객의 마음 위로하네.” 하였다. 금중소월일륜명(琴中素月一輪明) 전녹생(田祿生)의 시에, “바다 위 일곱 점 선산(仙山)이 푸르고, 거문고 타니 한 바퀴 흰 달이 밝구나. 세상에 곱디고운 손길 없으면, 누가 능히 태고적 정을 타려[彈] 하리오.” 하였다. 칠점산전풍엽추(七點山前楓葉秋)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삼분수(三分水) 가엔 갈대꽃이 눈 내린 듯 칠점산 앞엔 단풍잎이 가을이라. 중류에 꽃배 띠우고 퉁소와 북 울리니, 한 구역 신선 경치 여기가 금주(金州)라네.” 하였다. 일대풍운성태고(一代風雲成太古) 권근(權近)의 시에, “한 시대 풍운도 태고적 일이 되었구나. 천년 능묘(陵墓)는 지금만 같구나. 주렴에 제비 나니 황매우(黃梅雨) 오고, 동산에 꾀꼬리 우니 녹수(綠樹)가 그늘지네.” 하였다. 칠점산여화(七點山如畵) 우균(禹均)의 시에, “칠점산은 그림 같고, 삼차수(三叉水)은 공중에 닿은 듯하다.” 하였다. 천요해접공(天遙海接空) 송득사(宋得師)의 시에, “산이 빼어나니 구름이 낮에도 생기고, 하늘이 아득하니 바다가 공중에 닿았네. 길다란 대는 섬돌에 흔들리며 푸르르고 아름다운 나무는 뜰 가득히 붉구나.”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좌부(左部) 동쪽으로 끝이 10리이다. 우부(右部) 서쪽 끝이 15리이다. 상동(上東) 처음이 20리, 끝이 40리이다. 하동(下東) 처음이 10리, 끝이 40리이다. 활천(活川) 남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5리이다. 대야(臺也) 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칠산(七山) 서쪽으로 처음이 7리, 끝이 15리이다. 율적(栗赤) 서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주촌(酒村)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진례(進禮) 서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유등야(柳等也) 서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30리이다. 잉천(芿川) 서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하계(下界) 서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태산(太山) 본래는 태산부곡이다. 서북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60리이다. 중북(中北) 서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하북(下北) 북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30리이다. 주림(朱林) 북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40리이다. 부내(部內) 끝이 5리이다.
○ 수다부곡(水多部曲) 동쪽으로 15리이다. 고을미향(高乙彌鄕)은 남쪽으로 20리, 성화례향(省火禮鄕)은 남쪽 40리, 달음포향(達音浦鄕)은 동쪽으로 25리, 감물야향(甘物也鄕)은 동쪽으로 20리이다.
【성지】 읍성(邑城) 고려 신우(辛祐) 때에 이 고을 부사(府使) 박위(朴葳)가 쌓았다. 둘레는 4천 6백 83척이며, 옹성(甕城)이 4, 샘물[泉]이 28, 여울[溪] 하나, 못[池] 하나였다. 분산성(盆山城) 둘레 1천 5백 60척, 우물2. 분성(盆城) 흙으로 쌓았다. 둘레 8천 6백 83척. 진례성(進禮城) 서쪽 35리이다.
○ 신라 때에 김인광(金仁匡)이 진례성 제군사(諸軍事)로 삼았다. 조전성(曹轉城) 동쪽으로 18리이고, 둘레는 2백 60척이다. 가곡산성(歌谷山城) 서쪽 20리에 있는데, 둘레는 6백 척이며, 우물이 하나이다. 마현성(馬峴城) 과녀산성(寡女山城)이라고도 한다. 북쪽으로 30리, 둘레 1천 30척. 우물 하나이다. 신답산성(新沓山城) 서쪽으로 15리, 둘레 7백여 척이다. 망산도성(望山島城) 이 고을 부사 박위가 지었다. 죽도왜성(竹島倭城) 남쪽으로 10리이고, 임진왜란 때에 왜인이 지은 것인데 둘레가 5백 80척이며, 외성(外城)의 둘레는 6백 15척이다. 마사왜성(馬沙倭城) 북쪽으로 40리에 있다. 흙으로 지었는데, 둘레는 7백여 척이다.
【영아】 별중영(別中營) 인조조 때에 두었다.
○ 별중영장(別中營將) 겸 토포사(討抱使)가 1명인데, 부사가 겸한다.
○ 속읍(屬邑) 김해ㆍ창원ㆍ함안ㆍ고성ㆍ칠원ㆍ거제ㆍ웅천(熊川)ㆍ진해.
읍창 셋.
○ 산창[蒜倉] 동쪽 30리 냇가에 있다. 영종 20년에 설치하고 별장(別將)을 두었는데, 36년에 별장을 없앴다. 해창(海倉) 남쪽으로 6리다. 설창(雪倉) 서북쪽으로 30리이다.
【진도】 뇌진(磊津) 북쪽으로 48리, 해양강(海陽江)에 있으며, 밀양(密陽) 용진(龍津)의 하류이다. 태산진(太山津) 태산역(太山驛)에 있으며, 밀양ㆍ수산(守山) 앞의 나루터이다. 동원진(東院津) 동쪽으로 40리인데, 월당진(月唐津)이라고도 한다. 덕산역(德山驛) 아래 있으며 양산군(梁山郡)과 통한다. 불암진(佛巖津) 동쪽으로 40리에 있으며, 동래(東萊)와 내왕하려면 이곳에서 배를 탄다. 양산의 용당(龍堂)에서 일박하고 황산강(黃山江) 하류로 해서 죽도(竹島)로 들어간다.
【교량】 삽교(揷橋) 신교천(薪橋川)에 있다.
【토산】 김[海苔]ㆍ감.
【능묘】 수로왕릉(首露王陵) 서쪽으로 3백 보(步)이데, 납릉(納陵)이라 부르며 봄과 가을에 제를 올린다. ○ 감(監) 1명인데 후손에게 시킨다. 수로왕비 허씨릉(首露王妃許氏陵) 구지봉(龜旨峯)에 있는데 왕릉과 함께 제사지낸다.
【사원】 신산서원(新山書院) 선조 병자년에 세웠고, 광해 을유년에 사액하였다. 조식(曹植) 진주 편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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