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천에서 만취를 - 금주 일지 43일(2022.10.26.)
1979년 10월 26일.
오늘은 내 금주와 아무 상관없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 부하의 총에 맞아 죽은 날이다.
난 그때 제대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채 치안본부 소속으로 군 복무 중이었다.
뉴스 보도보다 더 먼저 국가적 비상을 알게 되었지만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이날이 되면 그때의 장면이 실루엣처럼 떠오르곤 한다.
오늘은 조금 일찍 학교에서 퇴근하였다.
오래전부터 약속해 두었던 분들과의 약속 때문이다.
사실은 꽤 오래전에 이 두 분과 오찬을 나누면서 ‘언제 시간을 내어 막걸리 한 잔 나누자’고 약속한 바가 있다. 기실 이 두 분은 술을 별로 즐겨 하지도, 많이 드시지도 않지만 나의 애주에 함께 하기 위해 해 둔 약속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두 분은 모르는 사이에 이미 나는 금주를 선언하고 거의 한 달 반이나 지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약속은 약속인지라 술 한 잔 마실 자리로 만찬을 하기로 했다.
늘 그래왔듯이 평소에 맛집 및 지리 정보에 밝은 그중 한 분에게 모든 것을 다 일임하였다. 나중에 확인한 바이지만 나의 퇴근 시간에 맞춰 행선지와 만찬 장소를 맞춤으로 준비했다는 것이다. 전북 진안으로 가서 붕어찜을 먹고 산책을 할까 했으나 산중엔 어둠이 일찍 찾아와 산책하기에 어려워서 충남 보령의 대천해수욕장으로 가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거긴 밤이 되어도 조명이 있어 식사 후에 해변을 산책하는 여유를 가질 수 있어 좋다는 것이었다. 마음으로 좋으면서도 조금 멀지 않냐고 했더니 그래도 좋은 사람들끼리이니 금방 도착하게 될 것이라며 길을 나서게 되었다.
출발한 지 두 시간 만에 대천에 도착하였다.
식당 앞에 주차를 하니 저녁 6시 30분이었다. 대천해수욕장을 바로 앞에 두고 길게 식당가가 늘어서서 불을 밝히고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평일임에도 식당마다 손님들이 제법 들어 있었다. 얘길 들어보니 주말에 손님들이 줄을 선다고 했다. 아마 서울에서뿐 아니라 전국에서 찾아오기에 교통이 좋아서이지 않을까 싶다.
어쨌든 예정한 식당(?)에 들어섰다. 곳곳에서 손님들이 식사 중이었다. 식당은 엄청 넓었다. 무려 600석이란다. 모 방송국 ‘서민갑부’라는 방송이 나간 후 손님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특히 주말엔 자리를 잡기가 어렵다고 종업원이 자랑 겸 홍보를 한다.
자리를 잡고 앉아 주문을 했다. 이 집 주메뉴는 삼합이란다. 전라도에서 삼합이란 대개 홍어 + 돼지 수육+ 묵은지가 일반적이고, 요즘 장흥에서는 키조개 + 소고기 + 표고버섯을 삼합이라 하는데 이곳에서는 새로 개발한 삼합이란다. 이 새로 개발한 삼합 때문에 이른바 대박이 났다고 했다. 여기서 삼합이란 키조개와 전복을 비롯한 해산물과 대패삼겹살(육류) 그리고 버섯, 숙주나물 등 야채류를 일컫는 말이다. 처음 먹어보는 삼합이라서 종업원의 도움을 받아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하였다. 그러는 사이 맥주 1병(?)을 주문하였다. 내가 금주 중임을 미리 알고 있기도 했고 함께 하신 두 분도 술의 양이 한 병으로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맥주 1병을 주문하여 두 분이 사이좋게 나누어 드시고 나는 땅소주(?)로 잔을 채워 대천에서의 만찬 건배를 하였다. 2시간 동안 차를 타고 와서 만찬주로 맥주 1병만 하기엔 아깝다면서도 한마음으로 만취한 느낌이었다. 아, 이렇게 적은 양의 술로도 아니 술자리에 함께 한 것만으로도 만취의 느낌을 가질 수 있음을 체득하는 중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대천해수욕장을 천천히 산책하였다. 가을이고 평일인 까닭인지 대성황의 인파가 아니어서 다행이라 여겨졌다. 하지만 곳곳에서 폭죽으로 밤하늘을 불꽃으로 수놓으면서 그들만의 잔치를 축하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 일행 세 명은 그들의 축하잔치에 숟가락을 하나 얹은 것처럼 덩달아 추억을 소환해 가면서 정담들을 이어가며 서로를 축복하였다.
참 고즈넉하고 아름답고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는 포만의 밤이었다. 마침 밀물들이 서서히 차오르는 것과 함께.
8시가 되자 세상은 진한 어둠으로 이불을 덮고, 우리 일행 세 사람은 차 안에서 성능 좋은 스테레오를 통해 꿈길 같은 클래식 음악으로 영혼을 덮으며 광주로 돌아왔다.
술 한 잔 안 마시고 만취를 경험한 최초의 날이랄까.
첫댓글 만남을 가까이 하지 못해도 글을 통해
생각과 마음과 일상을 엿보며 미소 짓게 해 주신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점심 맛있게 드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