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내용과 형식을 생각한다
윤일현 시인
내용과 형식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70, 80년대에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안다. 형식이 중요하다고 말하면 사회 변혁 의지가 결여된 관념론자로 낙인찍혔다. 유물 변증법이 유행하던 시절에는 일차적으로 내용이 더 중요하다고 말해야 의식 있는 지성인 대접을 받았다. 그런 지적 풍토를 거치면서 우리는 잃은 것도 많고 얻은 것도 많다. 내용이란 본질과 현상 모두를 포함한다.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내용)은 나름의 형식을 갖고 있다. 책을 넣기 위해서는 책가방이 필요하다. 달걀은 타원형이라는 형식을 갖고 있다. 내용과 형식은 어떤 관계인가. 형식과 내용은 별개의 것이 아니고 상호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형식은 내용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규정을 받음과 동시에 내용에도 영향을 미친다. 형식은 내용을 제한하려고 하지만, 내용 역시 끊임없이 변화·발전하면서 형식의 변화를 요구한다. 내용에 맞는 형식은 내용의 발전을 촉진하지만, 맞지 않는 형식은 내용의 발전을 저해한다. 책의 크기가 달라 지면 그것을 담는 가방의 높이와 폭이 달라져야 한다. 내용의 질적 변화는 낡은 형식을 타파하고 새로운 형식을 요구한다. 권위와 형식 타파에 관심을 기울인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가 권위와 형식의 중요성을 더 절실하게 깨닫는지도 모른다.
시가 날카로운 창과 칼이 되기도 하는 시대다. 몸과 마음을 찌르고 할퀴어 사람을 아프게 하는 시가 있다. 수많은 문예지가 쏟아내는 다양한 내용과 형식의 시를 보라. 평생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있는 사람도 상당수의 작품은 이해하기 어렵다. 추상 회화를 감상하듯 언어가 만들어 내는 느낌과 이미지를 따라가며 아무리 애써도 끝내 와 닿지 않는 시가 많다. ‘지적 돌기를 자극하는 시’와 ‘감성 돌기를 자극하는 시’가 있다. 신선한 충격과 자극을 주며 기상천외한 상상력을 발동하게 하는 시도 좋고, 가슴 뭉클한 감동과 위안을 주는 시도 좋다. 우리에겐 둘 다 필요하다. 다만 편식이 문제가 되듯이 어느 한쪽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중시할 때 우리는 시로 인해 정신이 분열되고 황폐 해질 수 있다. 너무 많은 시인이 암호 같은 시로 독자의 이해를 요구한다. 독자들이 시를 떠나고 있다. 절대다수는 다만 떠날 뿐 시가 어렵고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안 읽으면 될 뿐 구태여 이해할 필요성을 느끼지도 않는다. 이 시점에서 자유시는 시조에 기대 자신이 걸어온 길과 갈 길을 한 번쯤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형식의 규제를 벗어난 자유시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가? 평론가 이경호의 ‘꿈과 리듬을 잃어버린 현대시’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그는 감성보다 지적인 관념을 난해한 이미지로 표현하는 데 주력하는 모더니즘적 시적 상상력과 표현 양식의 과잉을 지적한다. 그는 “삶에 대한 서정보다 언어에 대한 자의식이 중요해진 시단의 흐름 속에서 현대시는 어느 때보다 사회적 연대성을 상실하고 몸의 흥취를 즐기는 속성을 상실해 가고 있다. 현대시는 거의 읽기도 어렵고 읽어도 지루한 기호품이 되어버렸다.”라고 지적하며 “한국 현대시의 발언은 이제 거의 강박증 환자의 신음으로 받아들여질 지경이다”라고 했다. 참으로 공감하는 말이다. ‘시란 눈으로만 읽고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란 문학적 규범을 따른 시 쓰기는 ‘시의 리듬감이나 음악성보다 지적 분석에 치우치는 방법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이런 풍토에서는 이경호의 말처럼 근대시까지 이어져 온 낭송의 리듬감을 배려한 시 쓰기는 낡은 것으로 간주하고 배제하기 쉽다.
나는 제1회 ‘정음시조문학상’ 시상식에서 축사를 하며 “현대 자유시는 주기적으로 시조로 눈길을 돌려야 한다.”라고 했다. 지금도 같은 생각이다. 시조와 자유시는 ‘내용과 형식’처럼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의 문제보다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시조집을 내는 자유시 시인이 늘고 있다.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다. 자유시를 쓰는 시조 시인도 늘어나야 한다. 시조는 자유시가 추구하는 자유분방한 실험 정신을, 자유시는 시조에게서 리듬과 운율, 몸의 흥취와 음악성을 배울 필요가 있다.
윤일현 대구 출생. 《사람의 문학》과 시집 《낙동강》으로 등단. 제14, 15대 대구시인협 회 회장 역임. 《시와반시》 편집기획위원. 시집 『낙동강이고 세월이고 나입니다』 외. 교육·인문학 저서 『밥상과 책상 사이』 『그래도 책 속에 길이 있다』 『그래도 살아남아 사랑해야 한다』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