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향기
바람결 따라 눕던 벼이삭을 일러 황금빛 너울이라 했다지. 허나 내 눈앞에 펼쳐진 농촌의 들녘은 황금빛 큰 너울이라기 뭣하다. 옛적에는 분명 큰 바다처럼 너른 가슴을 가졌을 들녘이 이젠 비닐하우스가 총총이 박혀 있는 터라 은색 돔의 울창한 공장 단지라할까. 비닐하우스 틈새로 이따금 벼들이 이리 누웠다가 저리 누웠다가 하는 품새가 안방을 빚쟁이한테 빼앗긴 안방마님의 쇄락한 영화를 보는 듯하다. 그래서 씁쓸하다.
뭐니뭐니해도, 우리나라의 농촌은 벼농사가 대종이었다. 이게 각종 특용작물에 안방을 빼앗긴 것은 시속의 추세가 아닌가?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돈이 되는 곳으로 농사꾼이 모이는 게 당연한 걸 어쩌겠나. 요즈음 밥상에서 밥이 차지하는 자리가 좁아지고 있지 않은가. 우리 집만 해도 그렇다. 자식 놈 두 녀석은 아침은 당체 건너뛰고 점심은 어떻게 해결하는지 모르지만 저녁도 집에서 먹는 것은 보기 힘들다. 내 나이가 그래도 밥을 꼬박꼬박 죽여주는 나이지만, 옛날하고는 양은 택도 없이 줄어들었다. 밥을 적게 먹어야 몸매도 날렵해지고 오래 산다나. 웰빙이란 밥을 적게 먹는데 초점이 모아지는 세상이 아니던가. 고봉으로 꾹꾹 눌려 담던 한 그릇이 살푸시 얹어서 반 그릇이니 하루 소비량이 예전의 6분의 1에 불과하다. 농민들에게 죄송스러울 따름인데 어쩌겠나. 다시 고봉으로 밥을 먹을 수야 없잖은가?
이야기가 잠시 곁가지로 흘렀네.
찬찬히 논을 들여다봐도 허점이 많다. 정성 드려 가꾼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갈색의 피가 수북이 자란 터라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황금색 들녘이라 하기는 무리다. 재빠른 농사꾼들은 수박농사에다가 고추로 발길을 돌렸겠지만 수입이 특용작물에 비해서 10분의 1에 불과한 벼농사를 하는 사람은 누구던가? 허리가 구부러진 늙은 농사꾼의 우직한 모습에서 마음도 짠해진다. 이렇게 벼 농사꾼을 푸대접해도 되는 건지 죄송스럽네.
며칠 사이 날씨가 추워지는가 하더니 가을답지 않게 덥다. 추수를 끝낸 들녘이 휭하니 빈 바람이 불어갈 뿐 속살을 들어낸 들녘은 말이 없다. 예전에는 추수를 끝낸 논에 들어가서 이삭을 줍기도 했지만 추수하느라 지나다닌 콤바인 타이어 자국만 어지럽다.
산책을 나온 둑방에는 국화가 한창이다. 해가 고개를 내밀지 않은 이른 아침이라 서리가 내려앉은 들국화는 온통 흰색뿐이다. 소국, 감국뿐이랴 시든 풀섶도 그러하고 타작을 하고 가지런히 단으로 묶어 놓은 깨 대궁의 시커먼 무더기도 지금은 하얗다. 서리가 유난이 일찍 온 걸까? 세상은 온통 은빛 일색이다. 손톱만한 국화과의 꽃은 분명 하얀색에서 부터 짙은 보라까지 색색의 자태로 눈을 홀렸을 텐데 서리가 내린 가을 아침에는 은색으로 분칠을 했나보다.
둑방길따라 졸졸 흘러가는 개울은 맑은 담갈색이다. 멀리 줄지어 앉은 흰뺨검둥오리와 까칠한 감나무 가지 끝에 대롱대롱 올라 앉아 있는 이름 모를 새는 묵빛일 뿐 내가 걷고 있는 세상은 두 가지 색갈로 그려진 동양화다.
가을이 점차 깊어가면서 걱정거리가 하나 생겼다. 해가 늦게 뜨니 아침 산책을 그만둬야할 게 걱정이다. 여름이면 6시, 산책을 나서면 이내 해가 따갑게 떠서 채양이 큰 밀짚모자를 챙겨야 했는데 추분을 지나면서 하루가 다르게 해가 게을러진다. 아직은 어둑어둑해도 길을 나설 수가 있지만 가을이 청명한 기운을 거두고 떠날 때 즈음이면 캄캄한 밤에 길을 나선다는 게 쉽지 않다. 여기는 인적이 드문 시골이니까. 또 매서운 날씨에 몸은 알맞게 덥혀진 이불 밑에서 나오기 쉽지 않을 테고.
그래도 가을은 세속에 더렵혀진 내가 감당하기 벅차게 너무 맑았다. 눈을 들어 볼 수 있는 세상의 끝은 필요 이상으로 멀었고 너무 깨끗하고 맑아서 내 속내를 들킬까 하는 염려가 나를 당황케 한다. 나는 일급수에 산다는 산천어가 아니고 탁한 물을 노니는 붕어에 불과했다. 때늦은 늦더위에 걸음조차 처진다.
이상기온이라는 아나운서 말은 매냥 듣는 말이니 에프엠으로 다이얼을 돌린다. 어라 눈물이 핑 돌만큼 쉰 듯한 콧소리의 샹송이 나오네 이 아침에. 카수는 누굴까? 안개에 젖은 이 아침에 샹송을 듣다니. 뉴스를 전하는 체널과는 달리 음악프로그램의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물기에 젖은 듯 했다. 촉촉이 젖은 에프엠 아나운서는 오늘의 주제는 도토리란다.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제를 가지고 청취자의 사연을 듣겠다는 프로그램이라 대개 시계, 알람, 벤취 등 일상의 소소한 걸 그날의 주제로 주어진다.
도토리라.... 작년이었던가? 막걸리를 나누어 마신 농부의 말이 떠오르네. 옛날부터 쌀농사가 흉년이면 도토리는 흔했다네. 흉년에 끼니 끊어질까봐 도토리라도 먹으라고 조물주께서 배려하셨다지. 그런대 올해는 쌀농사에다 과실농사까지 흉년인데 거기다 도토리까지 흉년이래. 가을바람처럼 허허 하고 쓴 웃음을 짓는 늙은 농부, 주름도 깊게 골이 패였더군. 세상이 좋아져서 그런가. 흉년이래도 쌀값은 그대로고... 배추농사 지어서 횡재했겠네요. 했다가 맞아 죽을 뻔했지. 배추농사 지어도 고공행진을 하는 배추 값은 남의 일이래. 이미 중간 장사꾼한테 밭뙈기로 넘긴 거라 오르든 말든 아무 소용없다나. 그래도 수박농사는 짭짤했다고. 그래서 수박농사꾼이 돈을 좀 만져보았다지. 요즈음 산은 참나무과 나무들 천지라 풀섶에는 떨어진 도토리 두어알 정도는 흔했는데 아닌게 아니라 도토리 보기가 쉽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꿀밤이라고 불렀는데. 왜 그랬을까? 입에 넣어보면 텁텁한 쓴맛이 나는 도토리를 하필 꿀밤이라고 불렀을까? 하기사 흉년에 배가 고픈 사람들에게 도토리는 씹으면 꿀처럼 달디달았을 게다. 허기만큼 식욕을 당기는 게 어디 있을꼬.
돌아오는 길에 내 키를 넘기는 억새가 훠이훠이 아는 척을 했고 강아지풀이 바람에 나붓기고 있었다. 길섶에는 누가 불을 놓았던가. 일년생 잡초들이 타버린 듯 새카맣고 즐겨 따먹던 딸기 무리는 커피색처럼 고상하게 단풍이 들었다. 그런대 이상타. 멀리서 샛노란 개나리가 무리 지어 핀 게 아닌가? 무슨 개나리람? 가까이 가보니 나뭇잎을 떨구다만 몇 남지 않은 아카씨 샛노란 잎들이 흡사 노란 개나리를 보는듯한 게다.
마을 지나면서 한집 건너 한 그루씩 서 있는 감나무에 총총 달린 붉그스레한 감이 정겹다. 잎들을 다 거두어들인 감나무 아래는 단풍 든 감나무 잎이 지천이다. 잎사귀 끄트머리는 거무틱틱했지만 잎사귀 안으로 들어올수록 감알처럼 짙은 주황색이 여간 곱지 않다. 아무래도 가을 단풍은 감나무잎이 제일 빼어나지 않은가? 글쎄 제 말에 반대하시는 분이 계시겠지만..... 감나무에는 저마다 간직한 소중한 추억이 있을테니 더 물큰하고 가슴이 미어진다. 감꽃이 봄에 필 때면 하얀 감꽃을 따먹으면 무언가 다가오는 사랑을, 두근두근 거리는 청춘을 꿈꾸지 않았던가? 하얀 감꽃으로 화환을 만들어서 누구엔가 걸어주었던 추억이 새롭게 살아난다.
설레었을 사랑의 전조를 감꽃이 전해 주었다면 거무스레하고 이쁘지도 않은 대다가 검은 점이 점점이 박혀 있는 단풍 든 감나무잎에서는 아내의 기미가 생각나지 않은가? 함께 산전수전 겪으며 신산한 삶의 고비를 겪어냈을 내 아내. 주변머리 없이 칠랑팔랑하는 남편을 믿고 따라 살아 주기만 해도 고마운 내 아내가 세상에 제일 가는 이쁜이가 아닌가? 감을 딸 때 꼭 지켜야 할 건 몇 개나마 감알을 따지 말고 가지에 남겨둬야 한다. 사람이 제 배부르라고 다 따먹고나면 엄동설한 까치는 뭘 먹고 기나긴 겨울을 나는가 말이다. 사람과 새가 더불어 사는 지혜가 놀랍지 않은가? 그래서 굳이 감나무를 제일 아름다운 단풍으로 추천하는 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귀하는? 감나무 추억... 하면서 시작하니 내 연애 걸 때 에피소드라도 들을까 했다면 실망이시겠네요. 저는 학교 다닐때 연애는커녕 공부밖에 몰랐답니다. 공신이라고 아시는가?
마을을 지나 밤나무 숲에 들어서자 고적한 길에 샹송이 넘나든다. " ..꼬망 브-띠끄 쥬 뚜블리그 /앙 쓰떵-라 리 비에떼 쁠뤼벨르/...메쥬네끄 훼르 데 허그레/에 라 샹송 끄 뛰 샹떼/Toujours, toujours je l'entendrai! (그때는 삶이 더욱 아름다웠고/그리고 태양은 오늘보다 더 작열했었지요/..그리고 그대가 불렀던 노래를 /언제나언제나 듣고 있을 거예요....")
어디선가 파리지엔느가 읊조리는 이브 몽땅의 "고옆(古葉,Les Feuilles Mortes)” '창가에 낙엽은 흐르고, 나는 당신의 입술과 여름의 키스를 보고 있네. 당신이 떠난 후 날은 길어져만 가고, 나는 곧 오래된 겨울의 노래를 들으리라 …' 덧없는 생의 순간에 떠올린 성하(盛夏)의 추억과, 가을의 이별 뒤에 찾아올 겨울을 담담히 맞을 준비를 하는 자의 쓸쓸함은 얼마나 아름다우면서도 눈물겨운가.
잠자리에 누워서 창문을 스쳐가는 바람소리를 듣는다. 고적한 시간에 아무리 소소한 소리도 그냥 흘려들을 수가 없다.
아~ 보름인가. 베게머리로 쏟아져 들어오는 달빛이 푸른빛으로 일렁이며 방에 가득 차다. 자정을 넘기며 뒤척이던 터라 무척 기뻤다. 서울에서야 이런 달밤의 정취를 맛볼 수 있을까?
"...아~ 산들바람이 사안들 부운~다. 달 밝은 가을밤에 달 밝은 가을밤에 산들 바람 부운다...." 풍금소리가 어느새 박자를 짚어가고 오래오래 잊어버렸던 고향과 시골학교 교정으로 달려가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서 가만히 노래를 따라갑니다.
"...아~ 너도 가아고 나도오 가 야~지.."
어디엔가 사과나무에 꽃이 피었다드만. 농부의 시름이 깊어갑니다. 추울 때 추워야하고 물러날 때 훌훌 털고 일어나는 세월의 순리를 거역하면 인생이 추해지겠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