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의 양육, 가족 만들기 -<아이 엠 샘>
장애아를 돌보고 양육하는 일은 힘들지만, 부모와 주위 사람들의 보살핌으로써 어느 정도 극복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애인인 부모가 비장애인인 자식을 키우는 것은 어떨까? 제시 넬슨(Jessie Nelson) 감독의 영화 <아이 엠 샘(I am Sam)>은 정신지체를 가진 장애인 아버지가 비장애인인 딸을 키우는 특별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숀 펜(Sean Penn, 샘 역)과 다코타 패닝(Dakota Fanning, 루시 역), 미셸 파이퍼(Michelle Pfeiffer, 리타 역), 다이앤 위스트(Dianne Wiest, 애니 역) 등의 탄탄한 연기, 그리고 장면 장면마다 적절히 흐르는 비틀즈(The Beatles)의 음악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이 영화는 너무나 매혹적이다. 모든 것을 ‘비틀즈’의 음악에 맞춰 사고하는 주인공 ‘샘’은 갓 태어난 딸의 이름조차 그들의 노래 제목(‘Lucy in the Sky with Diamonds’)에서 따와 ‘루시(Lucy)’라고 하였다. ‘비틀즈’의 음악을 위한 영화라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이 영화에서는 배우들의 연기와 음악이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다. 게다가 가족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 구성원들 사이의 믿음과 사랑이라는 진리를 새삼 깨닫게 해준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들 사이의 사랑과 소통의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정신지체를 지닌 ‘샘’은 어느 날 갑자기 아빠가 된다. 잠자리가 필요했던 여인은 샘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는데, 그녀는 아이를 낳고 병원을 나서자마자 그에게서 떠나간다. 아무런 준비도 갖추지 못했던 샘은 딸 루시가 태어나면서 급작스럽게 아버지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비록 정신지체를 가지고 있지만 딸이 태어나기 전까지 샘은 사회 속에서 아무런 불편 없이 살고 있었다. 단순한 일이지만 커피숍에서 일을 할 수 있었고, 비슷한 환경의 장애인들과 더불어 공유할 수 있는 일상이 그의 앞에 놓여 있었다. 또한 장애인인 그를 배려하고 지켜주는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인해서,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 살아가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비장애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부족한 면이 많을지라도, 샘은 비록 좁고 단순하지만 자신만의 세계를 지키며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활은 어느 날 갑자기 딸이 태어남으로써 전혀 다른 조건에 놓이게 된다. 이제 사회는 그를 ‘샘’으로서가 아니라, ‘아버지인 샘’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샘이 변한 것이 아니라, 그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변한 것이다. 이제 샘은 혼자일 때와는 다른 사회적 책임이 뒤따르는데, 그것은 바로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자신만이 있을 땐 사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그에게 딸이 생김으로써 비로소 사회의 관습과 부딪히게 된다. 그리하여 이 영화는 세상의 통념에 맞서, 자신의 가족을 지키려는 샘과 그의 딸 루시의 ‘가족 만들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일정 기간 동안 태어날 아이를 위해 부모가 되기 위한 준비 과정을 거치고, 그 과정을 겪으며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노력을 한다. 그럼에도 태어난 아이를 위한 좋은 부모가 되는 것은 쉽지 않은 노릇이다. 영화에서 관객들은 갓 태어난 아이를 안고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몰라 당황하는 행동을 통해서, ‘준비되지 않은’ 아버지로서의 샘의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옆집에 사는 애니는 아이를 양육하는 과정에 대해서 일일이 조언을 하면서, 샘이 아버지로서 역할을 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끝내는 자신이 칩거할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아픔을 드러내면서까지, 법정에 서서 샘과 루시가 ‘온전한’ 가족이라는 것에 대해서 증언을 한다. 부모와 자식은 자의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그들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일 수 있는 이유는, 단지 샘이 아버지이고 루시는 그의 딸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엮어가는 가족의 모습은 그들의 삶에 의해 채워져야만 하는 것이다.
사회의 통상적인 기준으로 본다면 샘은 무능하면서 나약한 아버지이고, 자식의 양육을 위해서 여느 부모들처럼 해줄 수 없는 존재일 따름이다. 장애인 아버지를 정상적인 부모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사회적 통념이고, 사람들은 그 기준에 따라 샘에게서 딸 루시를 떼어내어 다른 가정으로 입양하도록 강요한다. 그러나 과연 부모의 조건을 따지는 사회적 통념은 항상 옳다고 할 수 있는가.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은 그저 상식일 뿐 어느 경우에나 통용되는 불변의 진리는 아니다. 부모가 아이를 보호하고 양육하기 위해서는 경제력이 있어야 하고, 일정한 지식수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사회에서 통용되는 상식일 것이다. 사회는 이런 통념들을 ‘아버지인 샘’에게 들이대고, 아버지로서의 자격을 문제 삼으며 딸 루시를 그에게서 떼어놓으려 한다. 엄격한 형식적 논리로 그들에 맞서는 검사는 바로 사랑과 소통이 거세된 사회의 상식을 대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판단 기준에는 아버지인 샘과 딸 루시의 생각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아이 엠 샘>은 바로 이 지점에서 관객들에게 ‘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보기를 권하고 있다.
영화 속에서 샘은 일곱 살에 불과한 지능을 가진 아빠이다. 하지만 딸 루시에게는 샘이 그 어느 누구보다도 좋은 아빠이다. 다른 아이들의 아빠는 바쁜 직장 생활 때문에 자식들과 함께 놀아주지 못한다. 이에 반해 샘은 딸 루시와 함께 공원에서 놀아주고, 잠자리에서 베개 장난을 같이 하며, 책을 읽어주는 자상하고 좋은 아빠이다. 그들의 행복한 삶은 딸이 여덟 살이 되면서부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친구인 ‘코너’를 통해서 자신의 아버지가 여느 아버지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고, 루시는 그로 인해서 마음에 상처를 받게 된다. 샘과 루시만이 있을 때에는 그들 부녀 관계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제3자의 눈을 통해서 아빠를 들여다보면서 루시는 정신적 혼란을 겪게 된다. 커다란 여자 아이와 왜소한 아빠를 그린 그림은, 바로 루시가 느낀 혼란스러움을 잘 드러내주는 표지이다.
친구들의 아빠와는 다르지만, 루시는 그것이 문제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정신지체를 지닌 아빠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샘을 보호하려는 딸 루시의 마음은 그들만이 원하는 가족의 상이 어떤 것인지를 말해주고 있다. 아빠의 지적 능력에 한계가 있음을 직감한 루시는 더 이상의 지식을 거부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에 대해 겁을 먹게 된다. 이 역시 루시의 아빠에 대한 사랑의 표현에 다름 아니며, 점점 커가는 자신으로 인해서 아빠가 곤란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행동으로 이해된다. 그리하여 입양을 권하는 아동복지 관계자들에게 루시는 “아빠 말고 다른 아빠는 필요 없어요!”라고 간명하지만 단호하게 말한다. 이는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아빠로서 갖춰야할 조건이나 덕목이 정작 당사자인 딸 루시에게는 그다지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사회는 결국 샘을 자격을 갖추지 못한 아빠로 낙인찍고, 그에게서 딸을 떼어놓기로 결정한다. 그 과정에서 ‘정신지체’와 ‘어리다’는 이유로, 샘과 루시의 의견은 전혀 반영되지 못한다. 이후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벌이는 법정 다툼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샘과 루시가 완전한 가족으로 인정받기 위한 투쟁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전화번호부를 보고 무작정 찾아간 변호사 ‘리타’는 주변의 시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샘의 사건을 무료로 맡게 되지만, 재판을 진행하면서 차츰 의뢰인인 샘의 마음을 이해하고 최선을 다하게 된다. 오히려 그녀는 사회에서는 성공한 변호사로서 대우를 받고 있지만, 남편과 아들과의 ‘미숙한’ 관계 속에서 불행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법정 증언이 진행되면서 애니와 주변 사람들이 고통을 겪는 모습을 지켜본 샘은 끝내 재판을 포기하고, 루시는 위탁모에게 맡겨진다. 사실 샘이 사건을 법정으로 끌고 간 것은 소송에서 이기고 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족을 세상 사람들이 진심으로 인정해달라는 것뿐이었다.
루시의 위탁모는 아이를 위해 방을 꾸미고, 불편이 없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애를 쓴다. 그러나 끊임없이 샘을 찾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가족의 사랑은 일방적으로 베푸는 것이 아니라 서로 소통하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마침내 그녀도 인정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정신지체를 겪고 있는 아버지와 딸이 엮어내는 서로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주를 이루지만, 한편으로 그들이 온전한 가족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사회 속에서 얼마나 많은 관계들이 필요한가를 말해주고 있다. 비록 정신 연령은 낮지만 아버지인 샘은 딸을 헌신적으로 사랑하고, 루시 역시 그러한 아버지를 진심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여느 가족들보다도 더 ‘완전한’ 하나의 가족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자식의 행복은 부모의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와 비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또한 가족들 사이의 사랑은 반드시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결국 샘과 루시의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바탕이 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온전한 가족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영화는 이처럼 상식의 외피를 뒤집어 쓴 사회적 통념에 맞서 ‘가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져주고 있다. (차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