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03, 박시백, 휴머니스트, 2005.
조선시대의 역사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 얼마 전부터 만화로 그려진 ‘조선왕조실록’을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읽고 있다. 시리즈의 3권은 ‘태종실록’이며, ‘왕권을 세우다’라는 부제목이 덧붙여져 있다. 왕이 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스스로 권력을 쟁취해 왕위에 오른 인물이 바로 조선의 3대 임금인 태종이다. 태조 이성계를 도와 건국 과정에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계모 소생인 어린 동생에게 세자의 자리가 정해지자 이방원은 그 상황을 그냥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건국공신인 정도전마저 자신과 반대편에 서서 맞서고 있으니, 끝내 두 차례에 걸쳐 발생한 이른바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과 세자 이방석 그리고 권력욕이 넘쳤던 형까지 제거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장남이 아니었던 관계로 세자의 자리는 그대로 형에게 돌아가, 이방원은 맏형인 정종이 즉위하는 것을 지켜보게 된다.
실권을 쥐고 있는 이방원의 눈치를 봐야만 했던 정종은 아우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끝내 태종은 불가능할 것 같았던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왕위에 오른 후에도 부친인 이성계와의 갈등 관계가 지속되고, 정사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야사에는 심부름 갔던 사자가 돌아오지 못한다는 의미의 ‘함흥차사’라는 관용어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아울러 태종이 왕위에 오르는데 무시할 수 없는 공을 세웠던 부인 ‘원경왕후’와 처가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처가의 가족들을 하나씩 제거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과정을 지켜보면서 ‘권력은 부자 사이에도 나눠가질 수 없다’라는 격언을 새삼스레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왕권에 위협이 될 만한 이들을 거침없이 제거하고, 세자였던 양녕대군마저방탕한 생황과 그 자질을 문제 삼아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으로 바꾸었던 것은 그 자신이 권력의 냉혹한 생리를 절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해된다.
결과적으로 태종의 이러한 행동은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세종의 뛰어난 업적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는 평가를 불러오기도 한다. 젊은 시절 고려왕조를 몰락시키고 새로운 조선을 개국하는데 많은 시간을 쏟았기에, 태종의 치세는 18년에 그치고 있어 상대적으로 그리 길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왕위에 올라서도 왕권의 강화를 위해 정책을 펼쳤던 태종에 대한 평가는 보는 관점에 따라 극단적으로 갈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정책이 아니었더라면, 세종 때의 개혁과 문화정책의 결과물들이 나올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권력의 냉혹한 생리를 절감하고 있었기에, 세종의 치세에 방해가 될 수 있는 여건들을 제거하고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으로 그의 역할을 다했던 것으로 이해된다.(차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