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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2편
생, 누리끼리해질 무렵
정일근
누군가가 나에게 누리끼리하다고 말했어. 누리끼리하다는 색깔이 기분 좋은 색은 아니지. 그렇다고 기분 나쁜 일일 필요는 없어. 요즘 내 꼴의 색이 누리끼리하다는 것, 나 또한 늙기 시작했다는 말인데 뭘. 다만 건강하게 익어가지 않고, 고색창연하게 물들지 못하고 말라가는 중인 누리끼리해질 무렵에 닿았지만 부정하지 않아. 누리끼리한 색은 자기를 인정할 줄 아는 색이어야 해. 황달 걸린 눈알 속의 물간 생선 색깔 같은, 절정에서 제법 벗어나 시들시들해지는 색깔이지만 피할 수는 없잖아. 그때 내가 고개를 갸웃한 것은 얼마 전 고래처럼 힘차게 항진하며 푸른 바다를 지나온 것 같은데, 아직은 푸른색인 줄 알았던 내 색이 이렇게 빨리 물 빠져 버렸는가에 궁금했었을 뿐이야. 생이란 흰색 러닝셔츠와 팬티를 오래 입다 보면 누리끼리해지는 것은 당연지사, 친구들의 울긋불긋 근사한 셔츠와 칼주름 잡힌 바지를 걷어보면 모두 누리끼리해지고 있어. 쭈글쭈글해지고 있어. 사는 일에 괜히 과시할 이유는 없어. 조금 빠르고 조금 늦은 차이일 뿐이야. 이것이 색(色)이라면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 다음엔 앞서거니 뒤서거니 어떤 공(空)이 찾아올지 알고 있잖아. 우리끼리는 다 아는, 끼리끼리 다 아는 누리끼리. 누리끼리하다는 것은 꽃이 피었다가 지는 일처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편하지. 천천히 걸어 떠나온 저쪽으로 돌아가는 이 시간, 이 길 위에서.
창동 비둘기
창동에서 비둘기는 평화의 새가 아닌지 오래, 우아한 빛깔의 고급외투를 입고 외투 속에 진균을 우글우글 키우며 여기저기서 주워 먹기 바쁜 공개수배 중인 유해조수 신세다.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는, 야성을 찾게 해 자연으로 되돌려 보내자는, 구청의 탁상행정 같은 경고 현수막쯤이야 아랑곳없이 비둘기는 길거리에 버려진 먹이를 주워 먹기 위해 바삐 찾아다닌다.
퇴화하는 날개를 접고 두 발로 걸으며 사람이 흘린 음식 쓰레기를 남김없이 쪼아 먹으며, 창동이 밥상이며 창동이 감옥인 비둘기는 종종걸음으로 한 끼를, 하루를 구걸하며 살다가 점점 굵어진 목으로 창동 청소부인 양 구석구석 깨끗이 쓸고 다닌다.
택배차가 씽씽 지나가고 사람이 우르르 지나가지만 늘 주린 배 채우기만 바빠 도로 위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경계하지 않는 새, 창동 비둘기.
시인은 홀로 탄식하노니, 오호통재라 철학이 없이 문학을 모른 채 먹는 일에 바빠 차에 치여 비명횡사하는 창동 비둘기여 너는 죽어서는 돌아갈 곳이 있는 것이냐, 묻힐 작은 무덤과 하얀 묘비명은 준비되어 있느냐.
새벽부터 저녁까지 삼삼오오 무리를 이뤄 날아와 하루하루 비자를 연장하듯 살아가는, 누구 하나 반기지 않는 창동의 난민 비둘기를 보면 왕년은 가고 고령화 저출산 시대 노인만 남아 왕창왕창 늙어가는 오늘과 내일의 창동 주소가 보인다.
숱한 외면과 비난 속에 닭둘기 쥐둘기라고까지 조롱받지만, 오늘을 살기 위해 비둘기는 창동 거리를 배회하며 신이 허락하지 않아 죄인 듯 사람이 버린 일용할 먹이만을 찾는다.
창동 또한 오직 왕년만을 되새김질하며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다가 더 이상 다시 나는 법을 잊어버린 비둘기다, 창동이 비둘기고 비둘기가 창동이다.
나 땐 사람이 창동 골목골목 넘쳐났다고 서울 명동 부럽지 않았다고 되새김질하는 창동처럼 비둘기에게 한때 무리 지어 날던 자유의 푸른 하늘이 있었다고 말하지만, 날아 잡아먹는 본능 다 잃어버리고 걸어서 주워 먹는 일에 저 비둘기가 창동이다.
천적인 황조롱이가 없어 편안하게 살아간다지만 알고 보면 비둘기에게 창동이 길들어진 거대한 천적이다.
점점 고개 숙여 얻어먹을 것조차 없어지고 살기 힘들어지는 창동의 새 비둘기여, 날갯짓하며 조금만 날아가면 무학산이 어머니처럼 품어줄 것인데, 가까운 곳에 푸른 숲과 울창한 나무를 두고 낡아버린 콘크리트 난간에 세 들어 아슬아슬 살아가는 저 비둘기가 창동이다.
그렇다고 비둘기만 탓하지 마라
알고 보면 당신 또한 비둘기다.
*창동:옛 마산의 원도심.
<대표시 3편>
날아오르는 산
영축산*은 영락없는 독수리 형상이다.
날개 크게 펼쳐 하늘 허공을 돌며
먹이 꽉 낚아채기 직전, 저 거침없는 몰입의 긴장을
나는 느낀다. 무진장 무진장 눈이 퍼붓는 날이면
희고 긴 날개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이고
산의 들숨과 날숨 따라가다 나 또한 함께 숨을 멈추고 만다.
명창의 한 호흡과 고수의 북 치는 소리 사이
그 사이의 짧은 침묵 같은, 잠시 잠깐 방심한다면
세상 꽉 붙들고 있는 모든 쇠줄
한순간에 끊어져 세차게 퉁겨 나가버릴 것 같은,
팽팽한 율에 그만 숨이 자지러지는 것이다.
겨울 산을 면벽 삼아 수좌들 동안거에 들고
생각 놓으면 섬광처럼 날아와 눈알 뽑아버릴
독수리 한 마리 제 앞에 날려놓고
그는 물잔 속의 물처럼 수평으로 앉았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잔 속의 물 다 쏟고 마는
그 자리에 내 시를 들이밀고, 이놈 독수리야!
용맹스럽게 두 눈 부릅뜨고 싶을 때가 있다.
나도 그들처럼 죽기를 살기처럼 생각한다면
마주하는 산이 언젠가는 문짝처럼 가까워지고
영축산은 또 문짝의 문풍지처럼 얇아지려니
그날이 오면 타는 손가락으로 산을 뻥 찔러보고 싶다.
날아라 독수리야 날아라 독수리야
산에 구멍 하나 내고 입바람 훅 불어넣고 싶다.
산 뒤에 앉아 계신 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냉큼 고수의 북채 뺏어 들고
딱! 소리 나게 산의 정수리 때려
맹금이 날개로 제 몸을 때려서 하늘로 날아가는 소리
마침내 우주로 날아오르는 산을 보고 싶은 것이다.
*靈鷲山 양산 통도사를 품고 있는 산.
정일근, <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 문학사상사(2003. 10.), 22-23쪽.
울란바토르행 버스를 기다리며
더 이상 기다리지 않기 위해서
울란바토르행 버스를 기다린다
무사히 국경을 넘을 수 있다면
나는 혁명할 것이다, 조국에서
내 사랑의 시작은 신기루였고
내 사랑의 끝은 폐허였다
세계는 오래전부터 하나인데
사랑하는 조국은 여전히 나뉘어 있다
21세기의 하나뿐인 분단민족이여
나는 이 이분법이 이제는 지겹다
초원으로 가서 사랑을 하고 싶으니
쇠를 녹이는 불 끓는 사랑을 하고
칸*이 될 수 있는 사내를 낳을 것이다
그 아이에게 내 성씨를 물려주고
네 제국을 만들라 유언할 것이다
고백하자면 반도는 사랑하기에 너무 좁다
북쪽을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리고
남쪽에서의 꿈은 꿈마다 숨이 막힌다
칸이 아니면 또 어떠랴, 딸이 태어난다면
살리흐**라는 뜨거운 이름을 주고
초원의 시인으로 살게 할 것이다
아시아의 처음에서 유럽의 끝까지
그녀의 시가 하나의 언어가 되는
유라시아의 시인으로 살게 할 것이다
나는 울란바토르행 버스를 기다린다
나는 몸에 꿈 하나 숨기고
남쪽과 북쪽의 국경을 넘을 것이다
국경을 넘는 것이 죄가 된다면
나를 구금하라, 대륙의 피에
반도의 피를 섞으려는 것이 유죄라면
나도 혁명가처럼 서서 죽을 것이다
*칸khan: 중세기 몽고 원수의 칭호
**살리흐vglhn: 바람
정일근, <오른손잡이의 슬픔>, 고요아침(초판 2005. 9./2판1쇄 2006. 7.), 38-39쪽.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먼 바다로 나가 하루 종일
고래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사람의 사랑이 한 마리 고래라는 것을
망망대해에서 검은 일 획 그으며
반짝 나타났다 빠르게 사라지는 고래는
첫사랑처럼 환호하며 찾아왔다
이뤄지지 못할 사랑처럼 아프게 사라진다
생의 엔진을 모두 끄고
흔들리는 파도 따라 함께 흔들리며
뜨거운 햇살 뜨거운 바다 위에서
떠나간 고래를 다시 기다리는 일은
그 긴 골목길 마지막 외등
한 발자국 물러난 캄캄한 어둠 속에 서서
너를 기다렸던 일
그때 나는 얼마나 너를 열망했던가
온몸이 귀가 되어 너의 구둣발 소리 기다렸듯
팽팽한 수평선 걸어 내게로 돌아올
그 소리 다시 기다리는 일인지 모른다
오늘도 고래는 돌아오지 않았다
바다에서부터 푸른 어둠이 내리고
떠나온 점등인의 별로 돌아가며
이제 떠나간 것은 기다리지 않기로 한다
지금 고래가 배의 꼬리를 따라올지라도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겠다
사람의 서러운 사랑 바다로 가
한 마리 고래가 되었기에
고래는 기다리는 사람의 사랑 아니라
놓아주어야 하는 바다의 사랑이기에
정일근,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문학과지성사(초판1쇄 2009. 3./초판3쇄 2010. 7.), 16-17쪽.
정일근 시인 약력
경남 진해 출생. 1984년 『실천문학』(통권5호),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으로 등단. 시집 『바다가 보이는 교실』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소금 성자』 『혀꽃의 사랑법』 등. 현재 경남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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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근 시인 작품론>
생과 야생 사이를 건너가는 빈 손바닥의 시
휘민 시인
1984년 등단한 이후 정일근 시인은 『바다가 보이는 교실』(창작과비평사, 1987)부터 『혀꽃의 사랑법』(몰개, 2023)까지 모두 열네 권의 시집을 상재했다. 올해로 등단 40주년이 되었으니 2~3년 간격으로 부지런히 시집을 묶어온 셈이다. 1980년대 정일근의 시는 ‘유배지’로 표상된 엄혹한 현실을 비추는 뜨거운 거울이었다. 시대의 절망을 응시하면서도 한 손엔 서정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던 그의 시는 1990년대 이후 미명의 어둠을 떨치고 자연과 생명이라는 더 큰 세계를 마주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그는 바다와 고래를 노래하며 시의 지평을 넓혔고, 노장 사상과 화엄 사상으로 시 세계에 깊이를 더해왔다. 그리고 지난해 여름, 고통이자 환희인 ‘꽃’을 통해 생의 “깊이에 비례하는 아픈 수압”(「봄 도다리의 고백」)을 통찰해낸 열네 번째 시집 『혀꽃의 사랑법』을 세상에 내놓았다.
중학교 국어교사와 신문기자를 거쳐 “시가 유일한 직업”(「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이었던 시절을 지나 모교의 교수가 되기까지, 시인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삶의 곡절을 경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망 속에서 끝내 그를 일으켜 세운 건 “살아 있음의 가슴 뛰는 기쁨”에서 비롯한 생에 대한 간절한 의지였다. 삶이 고통으로 가득 차오를지라도 살아 있는 한 “빈 손바닥 가득 기다림의 시를”(「기다림에 대하여」, 『바다가 보이는 교실』) 쓰겠다는 의지. 정일근의 시는 여기서 출발한다.
자연스럽게 늙어간다는 것 혹은 야생에 대하여
색깔을 나타내는 어휘 가운데 시간을 품고 있는 단어들이 있다. ‘누리끼리하다’라는 형용사도 마찬가지. 본래부터 누리끼리한 색깔은 없다. 흰 바탕에 시나브로 시간이 쌓이고 쌓여 마침내 마주하게 되는 색이 누리끼리이기 때문이다. 그 시간 동안 누리끼리한 색깔이 생을 물들였다고 해도 좋겠다. 생은 순백의 배냇저고리가 누리끼리한 수의가 되는 과정 속에 있으니.
누군가가 나에게 누리끼리하다고 말했어. 누리끼리하다는 색깔이 기분 좋은 색은 아니지. 그렇다고 기분 나쁜 일일 필요는 없어. 요즘 내 꼴의 색이 누리끼리하다는 것, 나 또한 늙기 시작했다는 말인데 뭘. 다만 건강하게 익어가지 않고, 고색창연하게 물들지 못하고 말라가는 중인 누리끼리해질 무렵에 닿았지만 부정하지 않아. 누리끼리한 색은 자기를 인정할 줄 아는 색이어야 해. 황달 걸린 눈알 속의 물간 생선 색깔 같은, 절정에서 제법 벗어나 시들시들해지는 색깔이지만 피할 수는 없잖아. 그때 내가 고개를 갸웃한 것은 얼마 전 고래처럼 힘차게 항진하며 푸른 바다를 지나온 것 같은데, 아직은 푸른색인 줄 알았던 내 색이 이렇게 빨리 물 빠져 버렸는가에 궁금했었을 뿐이야. 생이란 흰색 러닝셔츠와 팬티를 오래 입다 보면 누리끼리해지는 것은 당연지사, 친구들의 울긋불긋 근사한 셔츠와 칼주름 잡힌 바지를 걷어보면 모두 누리끼리해지고 있어. 쭈글쭈글해지고 있어. 사는 일에 괜히 과시할 이유는 없어. 조금 빠르고 조금 늦은 차이일 뿐이야. 이것이 색(色)이라면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 다음엔 앞서거니 뒤서거니 어떤 공(空)이 찾아올지 알고 있잖아. 우리끼리는 다 아는, 끼리끼리 다 아는 누리끼리. 누리끼리하다는 것은 꽃이 피었다가 지는 일처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편하지. 천천히 걸어 떠나온 저쪽으로 돌아가는 이 시간, 이 길 위에서.
「생, 누리끼리해질 무렵」 전문
누리끼리한 색깔은 젊어서는 용납할 수 없는 색이다. 젊음이 표백(漂白)을 해서라도 흰빛을 되돌리려 할 때, 늙음은 담담하게 바래진 빛깔을 받아들인다. 나이듦의 과정을 보여 주는 색이니 늙음이 아니라 성숙의 색이다. 그래서 시인은 누리끼리를 “절정에서 제법 벗어나 시들시들해지는 색깔이지만” “자기를 인정할 줄 아는 색”이라 말한다. 생이 누리끼리해진다고 서글퍼할 일은 아니다. 나만 그런 것도 아니다. “친구들의 울긋불긋 근사한 셔츠와 칼주름 잡힌 바지를 걷어보면 모두 누리끼리”를 입고 있다. 화려한 색깔과 칼주름으로 감추고 있지만 우리는 모두 늙음을 향해 가고 있는 존재들. 늙는다는 것이 한때의 상태일 수도 없다. 젊음은 형용사지만 늙음은 언제나 동사였으니. 그렇게 우리 모두 노년에 닿는다. 비록 절정은 지났지만 쉼 없이 나아가고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런 사실은 “우리끼리는 다 아는, 끼리끼리는 다 아는 누리끼리”, 그러니까 공공연한 비밀이라는 점. ‘우리끼리-끼리끼리-누리끼리’ 시인의 재치가 빛나는 언어들의 조합을 보라. ‘끼리’라는 접미사는 그 부류만이 서로 함께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누리와 끼리가 하나가 되니 온 세상이 다 누리끼리 한패가 된다. 저기 “우리끼리”와 “누리끼리”가 서로 어깨를 겯고 “끼리끼리” 즐거워하는 모습이 보이는가. 시인은 지금 “천천히 걸어 떠나온 저쪽으로 돌아가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보며 분명 웃고 있을 것이다.
퇴화하는 날개를 접고 두 발로 걸으며 사람이 흘린 음식 쓰레기를 남김없이 쪼아 먹으며, 창동이 밥상이며 창동이 감옥인 비둘기는 종종걸음으로 한 끼를, 하루를 구걸하며 살다가 점점 굵어진 목으로 창동 청소부인 양 구석구석 깨끗이 쓸고 다닌다.
택배차가 씽씽 지나가고 사람이 우르르 지나가지만 늘 주린 배 채우기만 바빠 도로 위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경계하지 않는 새, 창동 비둘기.
시인은 홀로 탄식하노니, 오호통재라 철학이 없이 문학을 모른 채 먹는 일에 바빠 차에 치여 비명횡사하는 창동 비둘기여 너는 죽어서는 돌아갈 곳이 있는 것이냐, 묻힐 직은 무덤과 하얀 묘비명은 준비되어 있느냐.
새벽부터 저녁까지 삼삼오오 무리를 이뤄 날아와 하루하루 비자를 연장하듯 살아가는, 누구 하나 반기지 않는 창동의 난민 비둘기를 보면 왕년은 가고 고령화 저출산 시대 노인만 남아 왕창왕창 늙어가는 오늘과 내일의 창동 주소가 보인다.
숱한 외면과 비난 속에 닭둘기 쥐둘기라고까지 조롱받지만, 오늘을 살기 위해 비둘기는 창동 거리를 배회하며 신이 허락하지 않아 죄인 듯 사람이 버린 일용할 먹이만을 찾는다.
창동 또한 오직 왕년만을 되새김질하며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다가 더 이상 다시 나는 법을 잊어버린 비둘기다, 창동이 비둘기고 비둘기가 창동이다.
「창동 비둘기」 부분
도시의 비둘기들은 야생을 등진 대가로 먹이를 얻는다. 어쩌면 날개를 퍼덕이며 하늘을 활공하는 시간보다 인간의 발밑에서 음식을 구걸하며 걸어다니는 시간이 더 길지도 모른다. 천적을 피해, 먹이 사냥의 고단함을 피해, 당장의 편리와 타협하다 보니 자신의 본질조차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창동이 밥상이며 창동이 감옥인 비둘기”들을 보며 시인은 어느새 익숙해진 습관의 내부를 조준한다. 그리고 “퇴화하는 날개를 접고 두 발로 걸으며 사람이 흘린 음식 쓰레기를 남김없이 쪼아 먹”는 비둘기의 모습을 마산의 원도심인 창동과 겹쳐 놓는다. 비둘기가 “사람이 버린 일용할 먹이만을 찾”다가 야생을 잃어버렸듯이, 창동은 “서울 명동 부럽지 않았다”는 무용담에 사로잡혀 변화할 줄 모른다는 공통점이 있다. 진해에서 태어났지만 마산에서 자랐기에 창동을 바라보는 시인의 안타까운 마음은 더 크게 다가온다. 진해와 마산은 아이러니하게도 2010년 7월 1일 창원으로 통합되어 과거형으로만 남아 있는 도시. 콘크리트 벽은 천적을 막아 주는 방어벽이 되었지만 도시의 뒷골목을 배회하는 비둘기는 알지 못 한다. 안락함을 누렸던 그곳이 자신을 가두고 있는 감옥임을. 가장 엄혹한 감옥은 언제나 밖이 아니라 인식의 내부에 자리한다는 사실을 살찐 비둘기들이 알 리 없다.
날개 크게 펼쳐 하늘 허공을 돌며
먹이 꽉 낚아채기 직전, 저 거침없는 몰입의 긴장을
나는 느낀다. 무진장 무진장 눈이 퍼붓는 날이면
희고 긴 날개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이고
산의 들숨과 날숨 따라가다 나 또한 함께 숨을 멈추고 만다.
명창의 한 호흡과 고수의 북 치는 소리 사이
그 사이의 짧은 침묵 같은, 잠시 잠깐 방심한다면
세상 꽉 붙들고 있는 모든 쇠줄
한순간에 끊어져 세차게 퉁겨 나가버릴 것 같은,
팽팽한 율에 그만 숨이 자지러지는 것이다.
「날아오르는 산」 부분
시인에게 야생은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일, “먹이 꽉 낚아채기 직전, 저 거침없는 몰입의 긴장”을 되살리는 일이다. “한순간에 끊어져 세차게 퉁겨 나가버릴 것 같은,/ 팽팽한 율에 그만 숨이 자지러”질 듯한 호흡을 맡기는 일이다. 두려움과 불안이 공존하는 길이지만 자유는 결국 두 개의 날개로 두려움과 불안을 떨쳐버릴 수 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푸른 숲과 울창한 나무를 두고 낡아버린 콘크리트 난간에 세 들어 아슬아슬 살아가는” 우리의 삶 또한 마찬가지. 문명은 콘크리트 난간을 늘리며 ‘진화’를 거듭하고 있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야생으로부터 멀어져 간다. 자연(自然)이라는 스스로 그러한 세계의 질서를 거스르면서.
고래와 시인, 그리고 기다림의 시
자연과 인간, 나아가 모든 생명 있는 것들과의 소통과 공존을 노래해 온 시인은 “자연을 받아쓰며 사는 은둔자”(박형준)이자, 자연을 통해 시인과 사물의 영혼을 비춰온 목시(目視) 탐사원이다. 고래와 관련된 일이라면 그는 두 팔 두 발 다 벗고 나섰다. 울산으로 생의 터전을 옮긴 뒤에는 반구대암각화 국보 지정 운동을 벌였고, 시노래 모임을 만들어 울산·바다·고래 소재 시를 노래로 지어 보급했다. ‘고래를 사랑하는 시인들의 모임’ 대표를 지냈고, 울산시 어업지도선을 타고 고래를 관측했으며, 시인들을 울산으로 불러 탐사선에 태우고 고래를 보여 주었다. 그에게 울산과 고래는 사랑의 동의어다. 그리고 바다는 생태와 우주, 자연과 인간이 하나로 연결되는 삶의 무대이자, 무한히 열린 시의 지평이다.
먼 바다로 나가 하루 종일
고래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사람의 사랑이 한 마리 고래라는 것을
망망대해에서 검은 일 획 그으며
반짝 나타났다 빠르게 사라지는 고래는
첫사랑처럼 환호하며 찾아왔다
이뤄지지 못할 사랑처럼 아프게 사라진다
생의 엔진을 모두 끄고
흔들리는 파도 따라 함께 흔들리며
뜨거운 햇살 뜨거운 바다 위에서
떠나간 고래를 다시 기다리는 일은
그 긴 골목길 마지막 외등
한 발자국 물러난 캄캄한 어둠 속에 서서
너를 기다렸던 일
그때 나는 얼마나 너를 열망했던가
온몸이 귀가 되어 너의 구둣발 소리 기다렸듯
팽팽한 수평선 걸어 내게로 돌아올
그 소리 다시 기다리는 일인지 모른다
오늘도 고래는 돌아오지 않았다
바다에서부터 푸른 어둠이 내리고
떠나온 점등인의 별로 돌아가며
이제 떠나간 것은 기다리지 않기로 한다
지금 고래가 배의 꼬리를 따라올지라도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겠다
사람의 서러운 사랑 바다로 가
한 마리 고래가 되었기에
고래는 기다리는 사람의 사랑 아니라
놓아주어야 하는 바다의 사랑이기에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전문
그러나 “생의 엔진을 모두 끄고/ 흔들리는 파도 따라 함께 흔들리며/ 뜨거운 햇살 뜨거운 바다 위”에 서 보아도 떠나간 고래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시인은 “떠나간 것은 기다리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이제 시인에게 남은 건 움켜쥔 두 주먹뿐이다. 그러나 가슴속에 사랑이 밀물처럼 차오를 땐 사랑이 보이지 않는 법. 사랑이 빠져나간 뒤라야 우리는 알게 된다. 파도가 밀어낸 빈자리만큼이 사랑이었음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놓아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임을. 이제 시인의 주먹은 썰물이 되어 드러난 갯벌처럼 허허롭다. 힘을 빼고 나니 빈 손바닥만 남았다.
시인의 기다림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다. 20대의 청년 정일근이 그러했듯 60대의 장년 정일근 또한 “빈 손바닥 가득” 차오를 고래를, 야생의 숨결로 우리 앞에 다가올 뜨거운 시를 기다리고 있다. 고래가 사랑이라면 고래를 그리워하는 당신도 고래다! 오랜 기다림 끝에 선 시인이 고래다!
휘민 시인 약력
200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생일 꽃바구니』 『온전히 나일 수도 당신일 수도』 『중력을 달래는 사람』, 동시집 『기린을 만났어』 등이 있다. ‘시힘’ 동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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