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隨筆>
따로국밥
“지금 어디야?”
“서울! 조카 결혼식도 있고 해서 어젯밤에 올라왔어.”
“언제 내려올 건데?”
대구(大邱)만해도 대도시이다. 그런데도 대구에서 서울은 올라가는 곳이고 서울에서 대구는 내려가는 곳이다. 열차를 타더라도 서울로 가는 건 상행선이고 대구로 가는 건 하행선이다. 마치 주종관계나 상하관계 같은 표현임에도 오래 길들여져 있어 조금도 어색하지 않을뿐더러 억울하지도 않다. 이와 마찬가지로 대구를 제외한 모든 경상북도의 크고 작은 시(市)와 군(郡)은 시골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구로 갈 때에는 올라간다고 하고 시골로 갈 때에는 내려간다고 하는데 어느 누구도 그 표현이 잘못되었다거나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이 없다.
초등학교는 물론이고 중학교와 고등학교도 ‘시골’에서 돌다가 내가 대구로 ‘올라온’ 것은 1969년도이다. 아마도 나의기억이 틀림없다면 그해에는 눈이 참 많이 왔었다.
멀리 포항시 죽장면 가사리 산골에서 낙동강을 찾아 나선 길에 영천(永川)을 시작으로 금호(琴湖), 하양(河陽), 반야월(半夜月), 동촌(東村)에 이르기까지 가는 곳마다 사과밭을 일구어 ‘대구사과’의 명성을 세계에 떨치게 한 금호강(琴湖江)위에 함박눈이 소담스럽게도 내렸었다. 까만 점들이 잿빛하늘에서 다투어 내려와 동촌유원지 구름다리 밑에서 스케이트를 즐기는 아이들 속에 뒤섞였다. 아이들의 모습이 꼭 먹이를 찾아 분주하게 모였다 흩어지는 개미 때와 같았다. 시외버스가 아양 교를 건너는 동안 바라보았던 짧은 순간의 그 풍경은 눈이 내릴 때마다 내 추억의 창고 속에서 꺼내보는 한 장의 빛바랜 사진이 되었다. 그리고 문득 중학교 모교(永川中學校)의 교가(校歌)를 떠올리게 된 것은 아마도 교가의 첫머리가 ‘금호강 삼 백리’로 시작한 때문일 것이다.
“금호강 삼 백리 감돌아 구비 돌아
기름져 옥이 솟는 주남벌 넓은 터전
우뚝 솟은 장한광경 우리 배 곳이 아니냐
만세반석 이쁜양자 우리영중(永中) 기쁨 일세
기르자 우리영중 빛내자 우리영중
우리자랑 영중 만세 만만세!”
영천중학교를 감돌아 기름져 옥이 솟는 주남벌 을 가로질러 유유히 흐르는 강물은 그 옛날 나룻배와 나룻배만큼 늙은 뱃사공의 내력을 모른 채 노을 진 늪에서 아픈 다리를 쉬다가 갈대바람이 뜯고 있는 비파(琴)소리에 가던 길을 떠나지 못하고 밤새도록 맴돌고 있을 것 같다.
동인(東仁)로터리에는 분수대(噴水臺)가 있었다. 시골에서 올라온 촌놈의 마음속에 동인로터리 분수대는 대구의 명물(名物)1호가 되었다. 전국에서 제일 더운 곳도 대구이고 제일 추운 곳도 대구이다. 아스팔트가 녹아내리는 열기 속에서 시원스럽게 뿜어 나오는 분수는 시각적인 효과는 물론 낭만과 여유를 더하여 가히 명물1호에 손색이 없었다. 그 명물 로터리부근에 또 하나의 명물이 있었으니 바로 주점(酒店) ‘둥굴관’이다. 골목길마다 변변한 간판도 상호도 없이 유리창에 붉은 글씨로 ‘왕대포’라고 써 놓은 주막 (酒幕)같은 주점이 서민들의 주머니를 털어먹던 시절이었다. 우선 수십 개의 주막을 합쳐놓은 것 같은 규모에 촌놈은 기가 죽었고 그 넓은 홀의 구석진 자리에까지 넘쳐나는 젊은 술꾼들의 무질서속의 질서가 꼭 금호강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아이들 같기도 하였고 개미 때 같기도 하였다.
둥그런 식탁에 둥글둥글 모여앉아 한잔 한다고 해서 ‘둥굴관’이라며 ‘허풍’으로 시작하는 촌놈들의 둥굴관 경험담은 또래에게 큰 자랑거리였다. 둥굴관 에서 한잔하고 ‘국일 식당’에서 ‘따로국밥’으로 해장을 한다면 그 시절에는 나름대로 잘나가는 청춘이었다.
“따아로 셋이요!”
주문을 받은 종업원이 주방을 향하여 큰소리로 외친다. 도대체 ‘따로’가 무엇일까 참 궁금했었는데 그 정체가 밥 따로 국 따로 임을 알았을 때에는 불쑥 웃음이나왔다. 온갖 상상을 하다가 막상 알고 보니 만날 봐왔던 인심 좋은 이웃집 아저씨 같은 그런 느낌 탓도 있었고 국 따로 밥 따로 받아놓고 밥숟갈을 들자마자 국에다 밥을 말아버리는 사람들의 식습관 탓이기도 했다. 이제 와서 세삼 사람들의 식습관을 가지고 시비 걸 생각은 추호도 없다. 따로국밥이 어느 날 이름도 빼앗기고 고향에서도 쫓겨나 정처 없이 떠도는 나그네가 된 것 같아 멱살잡이를 당하더라도 시비한번 걸어보고 싶어 안달이난다.
해마다 대구 엑스코(전시컨벤션센터)에서 ‘음식 박람회’가 열리는데 따로국밥은 ‘대구 10미(味)’로 늘 소개 되었다. 오랜 세월동안 술꾼들의 속을 풀어주고 고향을 찾아오는 이들과 고향을 떠나는 이들의 속을 든든하게 채워주던 따로국밥이 대구의 대표 먹 거리로 선정된 것은 서울은 올라가는 곳이고 대구는 내려가는 곳인 것처럼 억울할 것도 없고 어색한 것도 아닌 아주 당연한 일로 생각되었다.
2016년에는 6월에 ‘대구 음식관광박람회’가 열렸다. 행사장에 들어서면서 맨 처음 만나는 곳이 ‘대구 10미(味)’를 소개하는 코너이다. 음식 박람회인 만큼 대구의 대표 먹 거리를 소개하는 것에 그만큼 비중을 크게 둔 것 같다.
그날 따로국밥이 집을 나가버렸다. 아니 집에서 쫓겨났다. 따로국밥이 쫓겨난 자리에 난데없이 ‘육개장’이 떡하니 들어앉아 있었다. 따로국밥이 시앗에게 안방을 내어준 소박맞은 본처(本妻) 같은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도대체 대구 10미는 누가 선정하는 것이며 누구 마음대로 그렇게 넣었다 뺐다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두르는지 모르겠다. 본처의 억울함을 풀어주려고 소송(訴訟)을 준비하듯이 인터넷을 뒤져보았다. 육개장은 개장국의 다른 이름이라고 한다. 개장국은 물론 ‘개고기’국이다. 개고기 대신에 소(肉육)고기를 넣어 개장국처럼 끓였다고 해서 육개장이라고 한다는 설명이다. 따라서 닭고기를 사용하면 ‘닭계장’이아니라 ‘닭개장’이 라는 것이다. 육개장이 대구 10미에 끼었던 흔적은 어느 구석에도 없다. 반면에 따로국밥을 검색해보면 첫마디가 대구 10미라며 운을 땐다. 들어가는 재료도 육개장은 ‘고사리’, ‘숙주(또는 콩나물)’, ‘토란(줄기)’인 반면 따로국밥은 ‘시래기’, ‘무’, ‘대파’, ‘토란(줄기)’이다. 식재료가 확실하게 구분이 되니 둘은 분명 종류가 다른 음식이다. 무엇보다 따로국밥의 옛날이름이 대구탕(大邱湯)이라고 설명하는 이도 있는걸 보면 칠십년 가까운 세월을 지게미와 쌀겨를 먹으며 함께 고생한 ‘조강지처(糟糠之妻)’는 따로국밥이 틀림없다.
자욱한 담배연기. 찌그러진 주전자와 대폿잔. 날 고구마와 번데기와 콩나물무침. 그리고 벽에다 어지럽게 써 갈긴 낙서들이 취객과 함께 비틀거리며 분위기를 돋운다.
‘어제도 오시더니 오늘도 오셨네요. 내일도 오신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라며 애교와 멋을 부리는가 하면 ‘오늘은 현찰, 내일은 외상’ 이라는 주인장의 일갈에 ‘오늘은 외상, 내일은 현찰’이라는 주머니가 얇은 학생들의 넉살이 인터넷에 댓글 달리듯 하던 1970년대 초 향촌동의 ‘처갓집’ ‘이모집’ ‘학사주점’ ‘황금마차’ 같은 주점의 풍경이다. 둥굴관의 골목과 향촌동 주점거리에는 젊은이들의 사랑과 우정과 낭만이 분수처럼 솟았고 강물처럼 흘렀다.
그 옛날 대구로 ‘올라온’ 한 촌놈의 낭만과 여유를 위하여 동인 로터리에 분수대를 다시 만들고 땅값 비싼 향촌동에 학사주점거리를 만들어 달라는 건 아니다. 다만 ‘따로국밥’을 ‘육개장’으로 개명하지 말고 그 전통을 지켜 달라는 소박한 바램 이 있을 뿐이다. ‘따로국밥’을 다른 지역에서 ‘상표등록’을 하여 대구에서 그 명칭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고 ‘따로국밥 되찾기 백만인 서명운동’을 하는 뒷북치는 날이 올까봐 소심한 촌놈의 걱정이 늘어진다.
가난하고 천할 때의 벗은 잊어서는 안 되고(貧賤之交不可忘빈천지교불가망), 같이 고생한 아내는 버리지 않는다(糟糠之妻不下堂조강지처불하당)고 하였다. 대구 10미(味)의 자리는 감히 육개장이 넘볼 자리가 아니다.*
2016. 7. 19.
첫댓글 연강 선생, 참으로 많이도 아십니다, 부디 정진하시어 피천득 선생 못지않은 수필가로 입신양명하십시오, 국일따로와 학사주점, 황금마차와 그 시절 대구를 주름잡던 건달들에 대해서는 소생도 할 말이 많습니다, 더위가 한 풀 꺾기면 한 꼬뿌 합시다.
琴川 선생님.
항상 과찬의 말씀으로 격려해 주셔서 많은 용기와 힘을 얻습니다.
더위가 물러 갈때쯤 선생님을 모시고 한 꼬뿌 올리면서 '그시절'이야기를 듣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然 江 拜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