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배영진의 집에 머물고 사례로 시를 지어주다
1913년 8월 19일, 가랑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이준악과 함께 길을 떠난 김대락은 어제 권동직의 집에 투숙하였다. 연이틀이나 신세를 져서 오늘은 기어이 떠나야 했다. 없는 살림에 손님 하나의 입이 얼마나 큰 것인지 잘 알기에 김대락은 주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비를 무릅쓰고 길을 나섰다.
그런데 처음에 가랑비이던 비는 멈출 기색이 없었고, 오히려 점점 빗줄기가 굵어지는 느낌이었다. 길을 가다 집의 문을 보고는 누구 집인지도 모르고 우선 들어갔다. 잠시 비를 피하려는 생각이었다. 주인과 통성명을 하니, 바로 등현 아래의 배영진(裵永進)의 집이었다. 배영진은 갑자기 불쑥 찾아든 손님인데도 반가이 맞이하여 주었다.
잠시 비를 피하려는 생각이었으나, 비가 오는 모양이 쉬이 그치지 않을 듯하였다. 집은 말 그대로 단칸방이어서 머물 수도 없었다. 그런데도 배영진은 성의를 다하여 하루 묵고 가기를 청하였다. 할 수 없이 염치불구하고 하루 묵고 가기로 하니, 잡곡밥에 밀가루 수제비로 정성 가득한 밥상을 내주었다.
다음날 다행히 하늘은 맑았다. 길을 떠나기 전 배영진의 성의가 고마워 뭐라도 성의 표시를 해야 할 듯한데,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어제 담소를 나누어 보니, 배영진이 글을 아는 선비인지라 시로 사례하기로 하였다. 시를 한 편 적어 배영진에게 건네니, 찬찬히 보던 배영진도 즉석에서 차운하여 시를 한 편 답례하였다. 불청객을 따듯하게 맞이하는 태도나 시에 즉석으로 차운하는 것을 보니, 과연 제대로 배운 선비라 할 만하였다.
◆ 영춘학교를 설립하였던 독립운동가 배영진
이 이야기는 김대락이 길에서 비를 만나 뜻하지 않게 배영진의 집에서 하루 묵고는 답례로 시를 써주었다는 내용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배영진(1864~1919)은 본관이 흥해이고, 자는 희안, 호는 백봉이다. 경상북도 안동군 예안면에서 태어났으며, 유필영의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1891년 과거 응시를 위하여 서울로 갔다가, 나라가 혼탁한 모습을 보고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귀향하였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자,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4년 영춘원 북구로 이주하였고, 그곳에서 황의영과 더불어 영춘학교를 설립하였다. 이듬해 학교를 전창구로 이전하였다. 한인 동포들에게 화수회를 조직하도록 독려하여 민족정신의 고취에 힘썼으며, 노인회를 조직하여 전통적인 풍습과 예절을 보존하고 되살리는 데도 힘썼다.
1919년 국내에서 발생한 3.1운동의 영향으로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들도 단합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졌다. 이에 따라 한족회가 출범하였는데, 배영진도 한족회에 참여하여 연락책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이상룡, 김대락, 김동삼 등과 함께 만주로 이주해 오는 동포들이 정착하여 생활할 수 있도록 터전을 만들어 주는 일에 힘썼다.
그러나 타국 생활의 고생으로 병을 얻었고, 1919년 9월에 56세로 사망하였다. 1983년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 원문 정보
十九日 朝細雨 主人苦挽 而難於貽弊 故期於冒發 望門投入 以爲避雨之計 則乃燈峴未裵永進家也 雨勢漸長 不可登道 如斗弊屋 不堪留住 而主人誠意 又不可孤 因爲留宿之計 黍飯麪飥 殫盡誠意 夕餐 自金炳龍<禮安人同住裵寓>家來
裵因卽席次進 果是文士也 有少年吳在杰者 自英陽來 今住六道衢 頗識事長之禮 歷訪陳根會于大花沙寓所 力挽不得 因煮餠饋之 且示聯笻遊遨之意 歸点于英姪家 夕始還所 則唐孫以輪眼爲苦 葦塘彌甥 以甚症 幾經罔措 驚慮 霜剝之餘 茗椒僅免 而木麥脫手 可歎可歎
◆ 원문 번역
8월 19일. 아침에 가랑비가 내리다.
주인이 굳이 붙잡았으나 폐를 끼치기 싫어 비를 무릅쓰고 출발하였다. 가다가 문을 보고는 들어갔다. 비를 피하려는 생각이었는데, 바로 등현燈峴 아래 배영진裵永進의 집이었다. 비가 오는 모양이 점점 오랠 듯하여 길을 나설 수 없었다. 말[斗] 만한 낡은 집에 머물 수도 없는 일이나, 주인의 성의를 또한 저버릴 수 없어 그대로 유숙할 작정을 하니 서속밥에 밀가루 수제비로 정성을 다하였다. 김병룡金炳龍<예안에 살던 사람으로, 배씨의 집에 같이 살고 있다>의 집에서 저녁밥을 보내왔다.
배영진裵永進(1864~1919) : 경북 안동사람이다. 1912년 만주 통화현通化縣으로 건너갔다. 1919년 한족회가 조직되자 지방연락원으로 일하는 한 편, 이상룡・김대락・김동삼 등과 이주동포의 정착을 협의하고 황무지 개척과 청년교육에도 전력을 기울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테마스토리 > 공동체 > 사람들과의 교유와 어울림에서 인용
출전 : 백하일기(白下日記)
저자 : 김대락(金大洛)
◆ 족보 기록
첫댓글 등현(燈峴)이란 '등재'의 다른 표현입니다. 살던 고향 이름이 나오니 반갑습니다.
제게는 증조부 항렬이 되시는 백봉공(휘 영진)이 독립운동가 백하 김대락과의 첫만남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백하 김대락이 비를 등재를 지나 가시다가 비를 피해 우연히 백봉공의 집에 들어가게 되었고, 주인과 객으로서 이야기를 나눠보니 뜻이 통했던 모양입니다. 이후 두 분은 독립운동을 같이 하게 되었습니다.
이 당시 의사공(휘 재형)도 백하 김대락, 석주 이상룡과 같이 서간도 삼원보의 신한촌 건설에 앞장서면서 독립운동을 하셨으니, 제가 자라난 좁은 골짜기 동네인 등재의 우리 집안에서도 독립투사를 두 분이나 배출하였습니다. 의사공(휘 재형)이 돌아가시자 만주에 같이 가셨던 의사공의 부인께서는 단식으로 뒤를 따랐다고 하지요. 그래서 안동 유림은 이분을 기리기 위해 통문을 돌려 동의를 구하였고, 그 결과물이 바로 등재에 남아있는 '표열각(表烈閣)'입니다.
서파 류필영 선생의 수제자로 꼽히는 백저 할배(휘 동환)도 독립운동을 하셨지요. 백저할배는 당대의 문장가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글을 청했습니다. 얼마 전 백저집이 국역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등재에서 태어나고 자란 분 중에, 제가 알고 있는 독립운동가만 세 분이나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