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혁명과 나
최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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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에는
4·19 혁명(四一九革命)은 1960년 4월 대한민국에서 제1공화국 자유당 정권이 이승만을 대통령에 당선시키고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한 개표조작을 하자, 이에 반발하여 부정선거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는 학생들의 시위에서 비롯된 혁명이다.
3·15 부정 선거의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던 마산 3·15 의거에 참여한 마산상업고등학교 입학생 김주열이 실종된 지 27일 후인 4월 11일 아침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왼쪽 눈에 경찰이 쏜 최루탄이 박힌 채 시신으로 떠오른 것이 부산일보를 통해 보도되면서 시위는 전국적으로 격화되었다.[2]
4월 19일 경찰이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로 몰려드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였고, 발포 이후 시위대는 무장하여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며 맞섰다. 전국민적 저항과 군지휘부의 무력동원 거부에 봉착한 대통령 이승만이 4월 26일 하야를 발표함으로써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몰락하였고, 이 혁명의 결과로 과도 정부를 거쳐 6월 15일(6·15 개헌)에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라고
설명하였습니다.
당시 대학생 교복은 군 작업복을 검게 염색하여 입었습니다.
나도 검은 작업복을 입고 학교 복도에서 시위를 하는 도중에
몇 친구들과 학교를 벗어나 각자 흩어지고 나는 미아리고개를 넘어 시내로 들어갔습니다.
시위대와 구경꾼들에 밀려 동대문경찰서 앞에서 4.19의 현장을 목격하였습니다.
실은 참여 의식이 강하지 못하여 방관자가 되었습니다.
정오가 지나서인가 서울신문사옥에서 연기가 솟아 올랐고 총성이 들리기도 하였습니다.
한 30분 후 광화문쪽에서 동대문 방향으로 쓰리쿼터 자동차 위에
피가 묻은 손을 든 사람이 태극기에 덮혀 큰 망치를 든 남학생들의 부축을 받으며
쏜살 같이 달려 갔습니다. 통의동 쪽에서 연기가 오르고 요란스런 총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때에 화염병을 던지고 사격이 개시되어 많은 젊은 학생들의 목숨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뒤이어 트럭에 까만 교복을 입은 대학생, 고등학생, 중학생, 심지어 초등학생까지
태극기를 휘날리며 [정치 깡패 물러가라][대통령은 하야하라]등의 구호를 부르짖으며
또 동대문쪽으로 달려갔습니다. 잠시 후 학생들이 탈취한 소방차가
동대문경찰서 정문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총성이 울렸습니다.
내가 서 있던 2층 건물 타일에 총알이 부딪치는 소리는
천지가 찢어지는 듯 귓청을 울려 나도 모르게 바닥에 엎드렸습니다.
순간 소방차 위에 있던 학생들이 납작 엎드리고
그 중에는 총에 맞았는지 쓰러지는 학생도 보였습니다.
소방차는 경찰에 접수되어 경찰서 안으로 끌려 들어갔습니다.
그곳에 더 있을 수가 없어서 문화동 내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그 다음날 부터 군복 염색하여 입은 대학생을 검거하기 시작하여
숨어 다녔습니다.
이것이 내가 56년전 4월19일 당한 일의 전부입니다.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방관자가 되었습니다.
유신시대도 방관자였습니다.
적극적 참여자였다면 국회의원이라도 해 먹었겠지요.
방관자는 유죄인가 무죄인가 유권자만 판단하겠지요.
오늘이 4.19혁명의 날이어서 과거를 돌이켜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