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무일지
건너 건너 아는 사람
겨울이 머물고 있는 집에서 박씨를 깠다. 시골까지 뭐 하러 왔는가, 돈 벌러 왔습니다. 허허 여기에 뭐 있다고, 찾아 봐야죠. 허허 못 찾을 낀데, 바람이 싸―지르면 자갈이 갈라지고, 바람이 싸―지르면 가지가 울었다. 바람이 고개를 반쯤 다, 다른 곳에서 늙은 악센트는 힘을 잃었다. 길손이 달을 찢더니 막막하다.
달력 안에 빙(氷)은 존재하지 않는다. 남극의 공기를 다큐멘터리로 마셨던 박씨 빙(憑) 뒤에 숨은 자갈과 경광등과 시멘트가 삼룡이처럼 팡파르를 울리고 있을까? 너무 뻔하게 산이 되었다고. 자갈은 꼴깍, 시멘트에게 애걸했다지. 모래와 자갈은 수돗물을 씹어 먹었다. 통밧줄은 의지가 강했다. 우울한 양동이, 경광등이 자갈의 배를 가를 때, 벨이 울린다. 옥수수 알갱이들이 빛을 뿜는다. 경광등에 온도가 존재한다면 당신은 지랄이야.
안전주의보가 보인다. 조심해야지 조심해야지 열 번이고 까, 까먹는데, 그래 봤자 콘크리트 계단은 칠층입니다. 고개 숙여 올라가는 길. 넘어야 할 고개가 스무 고개로 함께하자던 두 다리 삼십육계 줄행랑을 쳤습니다. 높은 곳엔 천국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믿습니까? 약도까지 인쇄된 전단지를 공사장 입구에서 나눠주는데, 입장권 받들고 올라가는 계단은 왜 막막할까요? 뛰는 심장을 가릅니다. 모래를 뿌려서 염을 합니다. 허벅지를 찢어 다루끼*를 도려내고 신경을 끊어보지만 결국엔 통증아, 나 살려라 애원합니다. 천국은 약 몇 킬로미터 남았습니다. 안내간판 간데없습니다. 행복 찾고 싶은 마음 들켜버렸구나. 벽돌의 개수가 모자랐나. 단의 무게가 모자랐나. 어깨에 가해지는 중력이 품삯에 못 미쳤나. 숨 좀 돌리겠습니다. 땀으로 온몸을 간했습니다. 침샘이 인력이라, 목구멍 떨어지지 않게 버티고 있습니다. 미적지근한 삽자루가 천장을 긁을 때.
*다듬어진 나무를 부른다. 옹이를 끌어안고 여보 여보시게 부르던 사내가 있었다. 무릎을 꿇고 흙을 기도할 때, 잡초도 자란다. 간장 콜라 커피로 별을 그리는 마음으로 살다 가겠지.
고시원 침대는 뭐다?
세탁실에서 탈수기가 싸움질이다. 몇호실 빨래와 시비가 붙었을까? 추가요금 내시고 조용한 방으로 옮겨 가세요. 충무가 공고한 밤이다. 누구는 시끄러운 거 모르고 자빠졌나? 조문 없으면 싸움이나 말릴 것이지. 누런 런닝구를 빨랫비누에게 던져버렸다. (확―무심결에) 피부 갈라진다고, 체중 줄었다고, 농담 걱정 반반 하던 빨랫비누의 하소연을 몰라봤다. 체육관 샌드백도 아니고 누런 런닝군데, 세면대에서 개거품을 물고 죽자 살자 비비고 싸우는 소리에 고시원이 떠들렸다 가라앉는다. 젠장,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도 없다. 말리던 손과 팔은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다. 잠이나 잘걸. 옆방에서 벽 한번 두드렸을 법도 한데. 벽 타고 넘어간 소리에 애청자가 되어버렸나? 런닝구는 짜도 짜도 마르지 않고, 빨랫비누 거품은 그대로 눅눅한 밤이 되어버렸다. 나를 아껴야 해서 이 한 몸 눕히려는데, 침대는 가구가 아니다, 한다.
근무일지
나는 허용될 수 있는 물건에 이름표를 달고 핑계를 붙이고 샴푸는 마셔버려서, 면도기는 손목을 그을까봐, 볼펜은 찌를 수 있다 해서 수건도, 수건은
안 되고 안 되고 안 되고 안 되고 안 되다가 둥근 나뭇결 조그만
외눈박이 영롱한 빛 아롱다롱 오채 빛깔 회전하고 회전하고 회전하다 폐쇄병동 사각형 당신을 신고한 혈육들 팔각형 의사와 병동 간호사 당신의 진단 육각형 당신과 당신의 소지품을 분류하는 병동 보호사는 삼각형 다시 육각 아니 삼각…‧각, 각, 각 덜컥 그러다 오도카니 머물고 싶었던
당신의 만화경 내 주머니 속으로 찔러 넣네 당신을 보관하던 그날
밤낮이 뒤집어지고 배 속이 뒤집어진다 소리 지를 때도 나는 당신의 만화경 속에 머물고 싶어라 최창살 사이로 살려달라 질러도 구해달라 질러대도 어쩌고저쩌고 병동 밖에서 들리는 소문은 동네 괴담이라 웃어버리고 가두려는 자와 나오려는 자의 싸움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애둘러 보내고 쇠창살 커튼 쳐진 막과 막 사이 벌어지는 일이라 좁혀질 수 없다 정답이다 장담은 못해서
가끔은 웃는 자와 가끔은 찡그린 자들이 나누는 대화가 파랑새 요지경 같더라
외출을 허락받은 당신 헤매고 달래다 이마에 맺히는 땀방울을 한방울 이슬로 위장을 쓸어내네 어이구 장허다 이그이그 참았어야지 길바닥에 드러누워 올려다보면
세상은 천천히 회전하고 회전하고 회전하다 술 없다 슬프다 돈 없다 외롭다 난장 까는 당신 깨진 이빨 철철 흐르는 선혈 귀싸대기 한방 날아와도 모든 걸 이해해보겠노라 사랑한다 모가지를 한없이 조르던 어제의 행위 오늘의 망각 속 팔각형 치료를 받겠다는 약속은 육각형에서 다시 분열하고 분리되어서 딱 한잔만
커튼 쳐진 여인숙 꽃무늬 민들레 그림자 이틀 밤낮 지새우는 당신을 무엇이라 부를까? 오각 다시 사각 아니 삼각 쪼그려 앉아 울고 울다가 구급차에 이끌려 나가는 당신 헤헤 미련이 남았었나봐요 가방 속 당신의 소지품
만화경은 뭐요? 물으면, 저는 실패한 사람이에요. 중복음 삐―소리 삐―삐―소리 중얼중얼 읊는 소리 하루 벌어 하루 사는 흐트러지는 찌그러져 찢어져 그럭저럭 변두리 막일하는 십이각형이란다 아니 십사각형이란다 아니 이십칠각이라고…사십삼각 팔각 사각 각, 각, 각 덜컥 그러다 미동조차 없어라 그 안에 머물고 싶었던
철문 사이 오도카니 서 있는 당신 앞에 쇠창살
스뎅 철문 철줄 사이사이 한줄 한줄 내리긋고 나와 당신을 조심스레 끼워 맞추다보면 그 모습은
나를 어디쯤 두어야 할까?
핼쓱한 당신 고개 돌릴 필요 없는데, 기억하지 못할 거야 사기든 추행이든 폭력이든 자살이든 돌아온 거 보면 용해라 조율감이다 내려진 진단은 가볍다 못해 아무것도 몰라서 알코올빙에 취했건 무엇에 취하든 나는 곤히 잠이 들곤 하는데 머릿속서 믹서가 돌아간다 배 속서 갈기갈기 찢어진다 보호실 믹서기 갈아대네 거침 요란도 하지 구속끈 묶어 자장자라도 불러주랴 했던 그 밤 폐쇄회로는 지켜보고 있었지 나는 목 탄다 속 탄다 지긋지긋 머리 흔들린다 물을 달라 화장실에 가고 싶다 간절히 원하는데 불러도 찾아도 모든 건 환청이다 망상이다 당신 하기 나름이다 당신은 내 만화경 속에 머물고 싶어라 내 얼굴에 침을 뱉어라 가만히 누워 있으면 안 되겠니? 나는 모자란 수건으로 목을 둘둘 말아 감고 감아서…
당신의 호주머니 속 내 만화경 여전히 돌아가는가?
해체되기 위한 쇼
우리는, 파이프를 세우고 파이프를 눕힌다 서로에게 기울지 않아도 될 만큼 다져진 바닥 끝을 끝에 조심히 내밀면 끝까지 끝을 내민다 체결하듯 서로를 놓아주지 않으려는 결속 둔중한 파이프, 그 파이프를 조이면 여전히 세워지고 여전히 일어서고 여전히 놓인다 우리는, 단면을 갖추자 단면을 갖추자 단면을, 단면을, 외치자 다면체를 둘러쌓는 시간은 배경만큼 광활해진다 무대 안으로 집중되는 재료들이 있고 결합되기 위한 시간을 갖자 골격을 갖추려는 의지 외피를 누르려는 웅집 내장재를 구겨 넣는 고집 행동지침을 따르는 배우들이 건설 현장 위에 존재한다 형태를 갖추면 해체되는 무대에서 외줄을 타자 쇠막대 하나를 쥐자 매달린, 붕붕 뜨는 몸짓들이 있다 아슬아슬 한발에 외줄타기 다음 한발을 내딛는 몸부림은 무대를 기웃거리는 단역배우의 리허설 아시바 쇠파이프는 건설되는 모든 형태보다 먼저 서야 하고 먼저 쓰러져야 하는 해체를 위한 약속, 존재하지 않았던 온전한 형태를 가져본 적 없는 우리는, 모든 다면체를 위한 우리는
제작 기법
떠도는 부유물들. 소금 바람에 지쳐 있어. 비좁은 대기실의 소음과 비린 풍경을 간직한 채, 나무들은 야적장에 누워 있다. 쉼일까 죽음일까. 누워서 하늘을 볼 수 있다는 건 축복일까 불행일까. 수많은 네가 존재했고 수많은 너는 너로 인해 잠을 이루질 못하고, 별의 궤적은 나이테만큼 쌓여만 간다. 너는 한밤에 떠밀려온 거다. 송전을 흘리면. 베개가 젖는다. 달이 물든다.
대패를 쥔 사내가 다가온다. 면을 다듬을 거야. 조심스럽게 먹줄을 친다. 이빨이 물리도록, 못대가리가 흉하지 않기를. 두드리기. 잘라내기. 모서리를 마주하기. 굴곡을 잡아내기. 이음새를 메꾸기. 뜯어내기. 반복하기. 무심한 듯 바라보기. 껍데기를 걷어낸다. 사방 흰색으로 더럽혀진 공간에 아치를 세울 거란다. 거칠고 투박한 손은 형태를 갖춘다. 블루문.
뿔을 찍어 내린 한낮은 징그러워. 목을 쳐든 사슴은 너의 냄새를 맡고 있다. 지상에서 한뼘 더 올라간 콧등으로 너를 채집할 수 있을까? 멀어졌다 사라진다. 그리 느껴진다. 불안에 떠는 눈은 파랑, 핥는 혀는 선분홍, 어디로 가라는 거니.
알려줄 거니? 사슴의 눈망울을 본 적 있다. 사라진 나무를 생각해봐. 미련을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뿔의 시간을 이겨낼 수 있을까? 네가 사라진 숲은 눈물 한방울 흘리지 못했다. 사슴은 숲속으로 뛰어간다. 대기를 핥는 혀. 하늘을 향해 초록과 파랑과 더 높은 곳을 고민한다. 흐르는 공기는 먼발치 밑으로 흘러 길 안내를 마다하지 않는다. 숲은 뿔의 시간을 극복하려 한다. 텅 빈 공간에 블로문 블루문. 텅 빈 공간에 블루문 블로문. 사슴이 들어가고 있어.
*
그는 경복궁역에 설치되어 있는 복제된 블로몬을 우연히 보았다. ‘영생‘이라든가 ’영원‘이라는 단어가 초월적인 존재 이상의 감각을 담고 있다는 걸 알아서일까? 자기 몸의 이상 증세를 느껴본 사람이라면, 생체 기능이 점점 저하된다는 걸 느껴서일까? 기회가 된다면 마지막 작업으로서 경복궁역 불로문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은 거다. 지하철역 안에 존재한다는 게 다소 엉뚱하다. 생각했는데, 또 많은 사람들은 이 블로문을 아무 의심 없이 지나가잖아,라고 지나갈수록 영생이 더해진다는데, 사실 많은 사람들은 알고 있었는지 몰라. 은근히 기대하면서 블로문을 지나가고 있었던 거지. 이번엔 어떤 재료를 사용해서 복제된 블로문을 내 나름대로 복제해볼까 고민하는데−원본을 본 적도 없고 찾아보려고 노력도 안 했어 원본이 꼭 필요한가? 합판의 겹쳐진 층을 보면서 나이테니 시간이니 하는 문제들이 고스란히 따라오잖아. 완성하는 단계에서 마지막 장난이 발동한 거야. 블로문을 블루문으로 고쳐 써야겠다,라고 영생도 좋지만 잠시 동안 다른 세계가 열린다거나, 다른 차원으로 이동 할 수도 있고, 갑자기 미지의 현상이 생겨 날지 알 수 없는 거잖아. 고전에서 말하는 달의 신비와 지하철역 안의 블로문이라는 조합이 그에게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던 거지. 블로문 불루문. 블루문 블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