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적>의 기록
공의 諱는 권(權, 初諱는 綣)으로 백죽당공(栢竹堂公)의 長子이다. 홍무(洪武) 9년(1376)에 태어나셨다. 朝鮮朝에 생원에 급제하여 영락 12년(1414)에 승의랑(承議郎) 이천감무(伊川監務)에 오르고, 1419년 6월 8일에 승의랑(承議郎)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이 되고 1420년에 횡성, 봉화현감(橫城, 奉化縣監)을 역임하셨다. 1423년에 다시 감찰(監察)이 되고 같은 해 12월에 호조좌랑(戶曹佐郎)에 올랐으며, 1425년에 봉훈랑 형조좌랑(奉訓郞 戶曹佐郎)이 되고 같은 해 12월에 전농판관(典農判官)이 되었다가 1427년에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 형조정랑(刑曹佐郎)에 올랐으나 그해 6월 25일에 돌아가셨다. 남긴 詩로는 침벽루운(枕碧樓韻)이 있을 뿐 그 외 문적(文蹟) 거관(居官)은 세종실록에 약간 있을 뿐 상세한 것은 찾을 수 없다.
영가지(永嘉誌) 인물편(人物篇)에는, 배권(裵權)은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 상지(尙志)의 아들이니, 음사(蔭仕)로 벼슬이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이며 안동부 서쪽 금계촌(金溪村)에 사셨다고 했다. 또 총묘편(塚墓篇)에 지평(持平) 배권(裵權)의 묘(墓)는 안동부 서쪽 금지촌 동쪽 무지산(蕪地山)인데, 처공인권씨묘(妻恭人權氏墓)와 합장하였다. 앞에 묘전비(墓前碑)가 세워져 있다.
금계지(金溪誌)에는 배권(裵權)은 尙志의 子니, 蔭仕로 사헌부 지평, 횡성, 봉화현감을 거쳐 사헌부 지평, 형조정랑에 이르렀다. 형제 4인이 모두 文學으로 당세(當世)에 유명했다. 그때 南氏 4형제가 모두 武科에 뽑힌 일이 있어서 嶺南 일대에서 ‘배문남무(裵文南武)’라는 칭송이 자자하여 지금까지 전설이 되고 있다.
침벽루(枕碧樓)는 안동부 동쪽 25리에 있는 백련사 앞에 있었는데, 루액(樓額)은 조맹부(趙孟頫)의 글씨로 유명했으나 후에 실전(失傳)되었다. 후에 백연사(白連寺) 터에 여강서원(廬江書院)이 세워졌는데, 배환(裵桓)과 배강(裵杠)의 詩가 있다.
배(配)는 공인안동권씨(恭人安東權氏)니 親家는 어디인지 알 수 없고 자제 3형제를 두시니 長男은 孝長이니 음사(蔭仕)로 가각고 녹사(架閣庫 錄事) 벼슬을 하셨고, 次男은 孝信이니 文科를 급제하여 전서(典書) 벼슬을 하셨고, 三男은 孝誠이니 文科를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이었는데, 이후 世祖 때에 공조정랑・은진현감(工曹正郎・恩津縣監)의 벼슬을 버리고 향리에 숨어 자취를 감추었다. 그 후손들이 함경도(咸境道) 경성・함흥(鏡城・咸興)지방에 살고 있으나 왕래가 막혀 연락이 없으니 한스러운 일이다. 女는 권개(權玠)이니 벼슬이 사정(司正)이며 그 자손이 안동부 서쪽 지방에 살고 있는데 매우 번성하다. 7대손인 한림(翰林) 용길(龍吉)이 묘표(墓表)를 지었다.
<족보>의 기록
<금역당 선조가 지은 묘표>
7대조 사헌부 지평 부군ㆍ공인 권씨의 묘표〔七代祖司憲府持平府君恭人權氏墓表〕
공의 휘는 권(權)이며, 자는 전해지지 않고, 배씨(裵氏)이며, 본관은 흥해(興海)이다. 증조의 휘는 영지(榮至)인데, 고려 때 봉익대부(奉翊大夫)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치사(致仕)했으며, 평양윤 행 전리판서 상호군(平壤尹行典理判書上護軍)이다. 조부의 휘는 전(詮)인데, 선수 장사랑(宣授將仕郞) 정동행중서성 이문소 상부관(征東行中書省理問所相副官) 성근 선력 익대 좌명 공신(誠勤宣力翼戴佐命功臣) 삼중대광 흥해군(三重大匡興海君)이다. 흥해군은 판삼사사(判三司事) 직성군(直城君) 손홍량(孫洪亮)의 따님에게 장가들었고, 이로 인해 안동(安東)에 거주하여 자손들이 드디어 안동(安東)사람이 되었다. 고(考)의 휘는 상지(尙志)인데, 통훈대부(通訓大夫)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이다. 고려 말에 중서랑(中書郞)이 고사(故事)를 들어 공을 변절시키려 하니, 공은 관모(官帽)를 벗어두고 남쪽으로 떠나갔다. 친구가 만류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안동부(安東府)에서 20리 서쪽에 있는 금계촌(金溪村)에 터를 잡아 측백나무와 대나무를 심어 두고 그 가운데 집을 지어서 한가로이 지내다가 일생을 마침으로써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절개를 온전히 하였다. 《백죽당집(栢竹堂集)》을 남겼으나 잃어버려서 전해지지 않는다. 뒤에 자손이 귀하게 되어 본조(本朝)에 들어와서 가선대부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 권씨(權氏)인데, 고려 좌우위 보승낭장 겸 감찰규정(左右衛保勝郞將兼監察糾正) 희정(希正)의 따님이다.
공은 산원(散員)을 거쳐 사헌부 감찰을 역임하고, 횡성(橫城)ㆍ봉화(奉化) 두 현의 현감과 사헌부 지평, 형조 정랑(刑曹正郞)을 역임하였다. 공의 형제는 넷인데, 공이 장남이다. 둘째 환(桓)은 가선대부 진주(晉州) 판사를 지냈고, 다음 남(楠)은 사헌부 감찰을 지냈으며, 다음 강(杠)은 이조 정랑을 지냈는데, 모두 문장으로 당대에 이름이 났다. 이 당시 영양 남씨(英陽南氏) 형제 여러 사람이 또한 무관으로 현달하였는데, 고을 사람들이 이를 가리켜, ‘문학은 배씨, 무예는 남씨〔裴文南武〕’라고 말하여 지금까지 이렇게 일컬어진다.
부인은 공인(恭人) 안동 권씨(安東權氏)인데, 금계에서 동쪽으로 1리쯤 동쪽에 있는 무지(蕪地) 자좌오향(子坐午向)의 언덕에 합장하였다. 아들 효장(孝長)은 녹사(錄事)를 지냈고, 딸은 부사 정(副司正) 권개(權玠)에게 시집갔다. 녹사는 2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임(袵)ㆍ정(禎)이다. 사위는 사인(士人) 유자의(柳自義)ㆍ안유인(安有仁)ㆍ남주(南疇)이다. 사정(司正)은 2남 4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숙형(叔衡)ㆍ숙균(叔均)이다. 사위는 사인(士人) 하원(河源)ㆍ김양몽(金養蒙)ㆍ이경손(李景孫)ㆍ안팽구(安彭耉)이다. ⓒ 한국국학진흥원 | 최원진 (역) | 2013
七代祖司憲府持平府君恭人權氏墓表
公諱權。字不傳。裵氏興海人。曾祖諱榮至。高麗奉翊大夫知密直司事致仕。平壤尹行典理判書上護軍。祖諱詮。宣授將仕郞。征東行中書省理問所相副官。誠勤宣力翼戴佐命功臣。三重大匡興海君。興海君娶判三司事直城君孫洪亮之女。仍家安東。子孫遂爲安東人。考諱尙志。通訓大夫判司僕寺事。麗季中書郞。用故事庭屈公。公脫帽而南。親舊挽而止之。不從。卜築于府治西二十里金溪村。種栢種竹而中其堂。優游卒歲。以全不二之節。有栢竹堂集。失不傳。後以子貴。入 本朝贈嘉善兵曹參判。妣永嘉郡夫人權氏。高麗左右衛保勝郞將兼監察糾正希正之女。公由散員。歷任司憲監察。橫城,奉化兩縣縣監。司憲持平。刑曹正郞。公之晜弟四人。公爲長。次曰桓。嘉善判晉州事。曰楠。司憲監察。曰杠。吏曹正郞。竝以文學名于時。時英陽之南。晜弟數人。亦以武顯。鄕人目之曰。裴文南武。至今稱之。配恭人安東權氏。合葬于金溪東一里許東蕪地子坐之原。男孝長。錄事。女適副司正權玠。錄事生二子三女。男曰袵曰禎。壻士人柳自義,安有仁,南疇。司正生二子四女。男曰叔衡,叔均。壻士人河源,金養蒙,李景孫,安彭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