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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브뤼기에르 신부의 청원
포교성성 장관 카펠라리 추기경의 제안에 대해서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의 랑글로와 신부가 보낸 여러 차례의 답신은 조선 선교지를 맡는 문제와 관련하여 먼저 해결해야 할 조건들을 담고 있지만, 사실상 완곡한 거절의 의사였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시 아시아 지역에서 파리 외방전교회가 담당하고 있던 대목구들의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은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일례로 시암 대목구에는 플로랑 주교 외에 3명의 선교사들이 있었으나, 방콕에서 주교를 보좌하던 페코(M. Pécot, 1786~1823) 신부는 1823년에 사망하였고, 페낭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을 가르치던 퓌피에(J. Pupier, 1797~1826) 신부마저 1826년에 사망하였다. 그래서 1827년에 부쇼(J.-B. Boucho, 1797 ~1871)·바르브(J. Barbe, 1801~1861)·브뤼기에르 신부가 파견될 때까지 시암 대목구의 프랑스 선교사로는 방콕에 있던 플로랑 주교, 그리고 페낭 신학교에 있던 롤리비에(M. Lolivier, 1764~1833) 교장 신부뿐이었다. 뿐만 아니라 사천 대목구 역시 청나라 황실과 지방 관헌들의 박해로 위태로운 지경이었고, 통킹과 코친차이나 지역에서도 1825년에 천주교 금지령이 내려져 1830년대에 벌어질 대규모 박해의 암울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이처럼 각 대목구마다 활동하는 선교사 수는 제한되어 있고, 또 해당 국가의 천주교 박해 때문에 애써 건설한 교회마저 파괴될 위험에 처해 있던 처지여서, 파리 외방전교회로서는 선뜻 새로운 선교지를 감당하겠다고 나설 만한 여력이 없었다. 그러니 각 대목구장들과 장상들의 의견을 취합한다고 하더라도 조선 선교지를 받아들이자는 의견이 대세를 점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파리 신학교의 장상과 지도자들의 의향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러므로 이런 식으로 계속 시일을 끌다가는 결국에 가서 포교성성과 파리 외방전교회의 교섭은 무산될 가능성이 높았다. 조선교회로서는 한 가닥 실낱같은 마지막 희망마저 끊어질 위기였다. 이때 파리 신학교 본부에 편지 한 통이 날아들었다. 시암 대목구의 주교좌가 있던 방콕에서 브뤼기에르 신부가 보낸 것이었다. 날짜는 1829년 5월 19일로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포교성성과 파리 외방전교회의 교섭이 중단된 지 1년이 지난 뒤의 시점이었다. 하지만 브뤼기에르 신부의 이 편지 덕분에 조선교회의 운명은 기사회생의 길을 걷게 되었다.
프랑스 남부에 위치한 카르카손(Carcassone) 교구 출신인 브뤼기에르 신부는 원래 교구 대신학교를 졸업하고 1815년 12월 23일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대신학교 교수로 생활하던 중 선교사로서의 소명을 느낀 그는 1825년 9월 17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6개월 동안 선교사 교육을 받은 뒤 1826년 3월 보르도(Bordeaux) 항구를 떠나서 1827년 6월 4일 시암 왕국의 수도였던 방콕(Bangkok)에 도착하였다. 브뤼기에르 신부는 플로랑 주교를 보좌해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방콕 시내에 사는 교우들에게 성사를 주는 등 사목 활동도 병행하였다. 또한 시암 대목구에서 선교활동을 활발하게 벌이는 한편, 파리와 고향 마을로 자주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이는 《전교회 연보》에 게재하여 선교 후원금을 요청하거나, 고향인 카르카손 교구 신학교의 학생들에게 선교사 자원을 촉구하려는 것이었다.
앞서 말한대로 파리 신학교에서는 1828년 1월 6일 공동 서한을 회원들에게 보내 조선 선교지 문제를 놓고 포교성성과 외방전교회가 벌인 교섭의 내용을 알렸다. 이 서한이 방콕에 도착한 것은 1829년 초의 일이었다. 이 편지를 받기 전부터 브뤼기에르 신부는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조선이라는 왕국에 교회가 생겨났으며, 조선인 신자들이 북경으로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어 성직자를 요청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마 방콕으로 오기 전에 들렀던 마카오의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에서 조선교회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브뤼기에르 신부는 마카오를 떠나 방콕으로 가는 도중에 잠시 머물렀던 페낭에서 파리 신학교의 랑글로와 신부에게 보낸 1827년 2월 4일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조선으로 보냈던 사제(주문모 신부를 말함)가 순교한 이래로, 조선 왕국의 교우들은 그리스도교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열성적인 신입 교우들의 사절이 해마다 북경의 주교를 찾아와서 선교사를 보내 달라고 간청합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까지도 북경의 주교는 조선인 교우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하였습니다. 이들은 최근에도 같은 내용으로 로마 교황청에 서한을 보냈습니다.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이번이 두 번째라고 합니다.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조선 사람들은 중국인들보다는 일본인들을 더 많이 닮았다고 합니다. 일본인들처럼 활발하고 영적이며 호기심도 강합니다. 그리고 일단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면 확고한 신앙심을 가지게 됩니다. 중국에서 오는 사람들은 모두 이 점에 동의합니다. 그런데도 어째서 유럽 전체에 이 불운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사제가 아직 한 명도 없다는 말입니까?(《전교회 연보》(1828년 10월), pp. 239~240)
당시는 아직 브뤼기에르 신부가 자신의 배속지인 방콕에 도착하기 전이었다. 그러니까 조선 선교를 자원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였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 한구석에는 조선이라는 나라와 그곳에 사는 열성적인 신자들에 대한 상념이 막연하게나마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누군가는 조선교회를 도우러 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을 것이다. 이런 생각들을 뒤로하고 방콕에 도착한 브뤼기에르 신부는 연로한 플로랑 주교를 도와서 시암 대목구의 선교사로서 열심히 활동하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2년이 흐른 뒤에 앞서 말한 파리 신학교 지도부가 보낸 공동 서한이 시암 대목구에도 전달되었다. 이 서한은 브뤼기에르 신부의 마음에 불을 지르고 말았다.
진취적인 기상으로 가득 차 있었던 36세의 브뤼기에르 신부는 공동 서한을 읽으면서 애초부터 조선 선교를 맡는 것을 회피하려는 패배주의와 비관주의가 그 속에 깃들어 있음을 느꼈다. 그러자 가엾은 조선인 신자의 절박한 간청을 외면하는 것은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사명과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생각이 그를 사로잡았다. 브뤼기에르 신부는 즉시 이 문제를 놓고 플로랑 주교와 상의하였다. 조선교회를 그대로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는 점에 대해서는 플로랑 주교도 동의하였다. 포교성성의 요청도 있었거니와 파리 외방전교회의 본래 정신에 비추어 보더라도 조선교회를 위해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플로랑 주교는 자신의 뒤를 이어 시암 대목구장이 될 재목으로 의무감이 강하고 활동적인 브뤼기에르 신부를 점찍어 두고 있었다. 그래서 브뤼기에르 신부를 대목구장 계승권을 지닌 부주교로 임명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교황청에 청원도 드렸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브뤼기에르 신부가 조선교회에 대해서 남다른 의욕을 보이자 내심 불안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플로랑 주교는 교구 이기주의에 눈이 먼 인물이 아니었다. 만약 정말로 필요하다면 조선교회를 위하여 브뤼기에르 신부를 양보할 의향도 있었다. 그래서 플로랑 주교는 일단 그를 부주교로 임명해도 좋다는 교황청의 결정 사항을 알려주고 자신이 직접 브뤼기에르 신부의 주교 성성식을 거행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브뤼기에르 신부는 설혹 자신이 시암 대목구의 부주교로 임명된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계획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오히려 주교가 된다면 조선 선교사를 자원하여 가더라도 현지인 성직자를 양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되었지 나쁠 일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렇게 결심이 서자 브뤼기에르 주교는 매우 열정적인 어투로 자신의 생각과 결심을 담아서 파리 신학교 장상들과 각지의 회원들에게 보내는 1829년 5월 19일 서한 2)을 작성하였다. 브뤼기에르 신부가 1829년 5월 19일에 파리로 보낸 서한은 상당히 긴 분량으로 되어 있고, 조선 선교 문제에 대한 주장은 그중 일부를 구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앞서 소개한 프랑스의 선교 후원단체 전교회의 기관지 《전교회 연보》 제25호(1831년 7월)에는 작성 일자가 동일한 브뤼기에르 신부의 서한 일부가 실려 있는데, 이 서한에는 시암 대목구의 전반적인 상황을 소개하는 내용들과 인근의 선교 지방으로 선교사들을 파견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들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5월 19일 서한에서 브뤼기에르 신부는 파리 신학교 본부가 포교성성 장관 카펠라리 추기경에게 보냈던 변명들을 조목조목 반박하였으며,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이라도 조선 선교사를 자원하겠다고 의사를 표시하였다. 이 서간을 통해 드러나는 브뤼기에르 신부의 열정과 미처 경험하지 못한 조선과 조선의 신자들에 대한 애정은 오늘날에도 깊은 감명을 준다.
친애하는 동료 신부님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모든 선교지에 보낸 공동서한을 읽고서, 포교성성에서 조선을 여러분에게 제안하였다는 것과 적어도 현재로서는 여러분이 이 제안을 받아들이기 주저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금이 부족하다는 점, 선교사의 수가 적다는 점, 현재 우리가 맡고 있는 다른 선교지에도 부족한 것들이 많다는 점, 조선으로 들어가는 데 거의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움이 크다는 점, 이 불쌍한 조선의 새 신자들이 선교사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알려준 입국 방법이 불충분하다는 점 때문에 여러분들은 이 일을 더 좋은 시기로 미루려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
시암 대목구장이신 소조폴리스(Sozopolis) 명의의 플로랑 주교님은 우리 파리 외방전교회가 되도록 빨리 이 새로운 선교지를 맡게 되기를 진심으로 원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께 직접 편지를 보내어 이 문제에 대해서 말씀하실 계획입니다. 물론 이 일이 성공하기를 원하시는 주교님의 열의도 무척 크지만, 저 역시 그분 못지않은 열의를 갖고 있습니다. 이 불행한 신자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저는 그들을 위하여 여러분께 편지를 올립니다.
2) 1829년 5월 19일 서한: 현재 한국교회는 브뤼기에르 신부가 조선 선교를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열정적으로 표명한 이 역사적인 서한의 원본을 가지고 있지 않다. 아마도 파리 외방전교회 고문서고 시암 대목구 관련 문서철 속에 들어 있을 것으로 짐작하지만 확인된 것은 아니다. 달레 신부는 저서 《한국천주교회사》에서 브뤼기에르 신부의 서한에 담긴 내용을 거의 전부 인용하였다. 그리고 브뤼기에르 신부의 서한이 작성된 지 꼭 100년이 되던 1929년에 대구 대목구장 드망즈 주교는 이 서한이 조선 대목구 설정에 미친 영향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당시 홍콩에서 발행되던 《파리 외방전교회 회보》(Bulletin de la Société des Missions Etrangères de Paris) 제89호(1929년 5월)에 달레 신부의 저서에 실렸던 그 부분을 그대로 전재한 적도 있었다.
먼저 저는 여러분이 조선의 신자들에 대해서 최선의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단지 일을 더 잘 처리하는 것이 불가능하여 어쩔 수 없이 몇 년 정도 더 기다리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동기들은 칭찬할 만하며 대단히 현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포교성성에서도 거기에 찬성한 듯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그렇게 종결되었기 때문에, 그 문제를 논쟁에 부쳐서 새로 검토하는 것은 불가능할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감히 실례를 무릅쓰고 위에서 거론된 여러 가지 이유들을 자세하게 상기해 보고, 또 여기에 제 생각들을 몇 가지 첨부하고자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이것을 정밀하게 검토하시고 진지하게 숙고해 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제가 가소로운 자만심 때문에 이런 말씀을 올리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이 일에 대해서 저보다 더 잘 알고 계시는 분들에게 충고를 하자고 이러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 오직 제 양심에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1. 우리는 기금이 없다. 그러나 사실상 전교회에서 보내 주는 후원금으로 경비를 충당할 것 아닙니까? 게다가 몇 해 동안은 포교성성에서 보조금을 제공하겠다고 합니다. 물론 여러분은 이런 도움들만으로는 부족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게다가 회원 각자가 원할 때 얼마든지 탈퇴할 수 있는 전교회와 같은 협회에서는 모든 것이 불확실합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전교회는 아주 최근에 출발한 단체입니다. 프랑스 교구들 가운데 겨우 절반 정도만이 전교회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니 선교지들을 후원하려는 열의는 지금 막 생겨났습니다. 때문에 몇 해 동안은 이 열의가 유지될 것입니다. 조금 지나면 아마 이 열의도 식겠지요. 왜냐하면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제도들이 필연적으로 걷게 되는 운명이 바로 그런 것이니까요. 다른 곳보다 프랑스에서는 훨씬 더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지혜롭게 절약한다면 뜻밖의 사태를 대비하는 시간이 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일 닥칠 일을 너무 걱정하여 섭리를 모욕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주님께서 새로운 재원(財源)을 마련하여 주실 것입니다.
일찍이 우리 신학교가 불가능한 일이라고 해서 무엇을 거부한 적이 있었습니까? 모든 것이 절망적으로 보였던 시기에 우리가 맡고 있던 선교지들 가운데 하나라도 포기한 적이 있었습니까? 의심할 바 없이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향해 도움을 간청하였습니다. 우리는 착한 사람들을 악에서 구해내시는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습니다. 우리의 기대는 어긋난 적이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선교지들을 도와주려고 기적을 베푸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우리 하느님의 힘이 약해지셨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우리의 신앙과 확신이 줄어들었다는 말입니까?
2. 우리는 선교사가 없다. 제가 보기에 이것은 우리가 내세울 수 있는 이유 중에서도 가장 설득력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보다 더 많은 수의 젊은 신부들이 선교지로 가기 위해 지원하는 것을 언제 본 적이 있었습니까? 한꺼번에 15명 내지 18명까지 지원자가 생겼다는 구절이 공동서한에 실려 있더군요. 그리고 여러분은 매일 또 다른 지원자들이 많이 몰려올 것을 기대한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신학교에 있다가 병 때문에 돌아간 사람들도 몇몇 있었다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언젠가는 다시 돌아오겠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여러분은 말씀하셨습니다.
게다가 지금 당장 사람이 부족하다고 잠시 가정해 봅시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원하는 만큼의 지원자들을 확보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있습니다. 《교훈이 되는 새 서한집》의 ‘조선’ 항목에 들어있는 기사들을 모두 인쇄하고, 거기에다가 이 열심한 조선의 신자들이 여러 번에 걸쳐서 우리 교황 성하께 올린 편지들을 첨부하십시오. 그 편지들의 필사본은 쉽게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이것을 여러 벌 만들어서 프랑스로 소신학교와 대신학교에 보내십시오. 그리하여 신학교에 있는 모든 젊은 신학생들의 애덕과 열성에 간절히 호소하십시오. 그러면 이내 여러분은 선교사들을 갖게 될 것입니다. 나는 프랑스 사람들을 잘 압니다. 이 험난한 선교지가 보여주는 온갖 종류의 위험들을 예상하는 일은 그들의 열의를 자극하고 그들에게 새로운 용기를 불어넣어 줄 뿐입니다. 한 명을 구하면 열 명이 달려올 것입니다.
3. 다른 선교지에도 부족한 것들이 많다. 분명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일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 불쌍한 조선 사람들의 경우만큼 절박하지는 않습니다. 애덕의 정신이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엄격한 의무는 이렇습니다. 도움이 없이는 그 불쌍한 삶을 조금도 이어갈 수 없는 불행한 사람을 돕기 위해서는 자기에게 꼭 필요한 것마저도 내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의무는 교회로부터 도움을 받기에 마땅한 자격을 갖춘 수많은 열심한 새 신자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경우에 훨씬 더 엄격하게 적용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그들 수천 명의 새 신자들은 아직 신앙이 허약하고, 또 온갖 종류의 유혹에 둘러싸여 있으니 말입니다. 지구의 반대편 끝에 있는 저 불행한 신자들은 여러 해 전부터 신자들의 공통된 아버지이신 교황 성하께 도움을 간청하기 위해 손을 들어 애원하고 있습니다. 모든 교회를 돌보시는 교황 성하께서는 영광스럽게도 우리 파리 외방전교회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두 차례나 우리의 애덕에 호소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아직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하시는군요!
조선은 우리의 선교지에 속하지 않으므로 조선에 대해서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말하실 테지요. 저도 그것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자비로운 아버지는 발치에서 죽어가는 불쌍한 이방인을 도와주기 위해 자신의 자녀들에게 먹일 얼마 되지 않는 음식에서 조금 떼어 주는 것을 의무로 여긴다는 데에는 여러분도 역시 동의하실 것입니다.
우리 선교지 전체를 놓고 본다면 신부 한두 명쯤 줄어든다고 결코 현저한 공백상태가 발생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버림받았던 선교지로서는 이 두 명의 신부도 헤아릴 수 없는 은혜가 될 것입니다. 제가 아무리 시암 선교지에 우호적이라고 할지라도 여기에서 선교사 한 명을 빼내어 저 비탄에 잠긴 신자들에게 보내는 것은 조금도 아까와하지 않겠습니다.
4. 그 나라를 뚫고 들어가기가 힘들다. 이 점이야말로 반대하는 이유들 가운데에서 가장 그럴듯하다는 것을 저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결국 어떤 계획이 어렵다고 하여 그것 때문에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또 세속의 자식들은 이해관계가 걸려 있을 때 어렵다고 절대로 물러서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영광과 이웃의 구원이 문제가 되는데도 주저하고 소극적인 것은 빛의 자식들뿐이란 말입니까?
3) 1827년 9월 1일과 11월 7일에 포교성성 장관 카펠라리 추기경이 파리 외방전교회에 조선 선교지 관할 의사를 타진하는 서한을 보낸 것을 말한다.
북경에서 출발한 중국인(주문모) 신부 한 분이 조선에 들어가 박해가 극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여러 해 동안 성직을 수행하다가 영광스러운 순교로 그의 과업을 완수하였는데, 사천이나 산서에 파견된 유럽인 신부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말입니까! 조선 사람들은 몇 해 되지 않는 동안에 편지 여러 장을 로마에까지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신부 한 사람을 그들 나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겠습니까!
저는 여러분이 하실 대답을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 편지들이 북경을 통하여 전달되었으니, 북경이야말로 유일한 연락점이라고 하시겠지요. 좋습니다! 그렇다면 북경에 편지를 보내서 조선인 신자들에게 알리도록 합시다. 산서나 사천의 이러저러한 마을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선교사가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조선 신자들에게 연락한 다음에는, 조선을 향해서 길을 계속 갈 방법을 알아봅니다. 중국인 연락원들의 인도를 받으면서 만리장성까지 갈 것인지를 검토해 봅니다. 그리고 만날 장소와 암호를 정합니다. 현명함과 통찰력을 겸비하였을 경우에 떠올릴 수 있는 모든 방법들을 사용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성공합니다.
그러나 넘을 수 없는 난관이 있어서 그 나라에 뚫고 들어가기가 불가능하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렇다면! 불가능한 것을 시도해 보아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것도 하느님께는 불가능하지 않으니까요. 바다를 통해 조선으로 가는 방법이 제시되었지만, 이 방법은 실행에 옮길 수 없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유럽인과 조선이 전혀 무역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든가, 또는 이따금 조선의 연안으로 암거래를 하러 가는 사람들로는 중국인이 유일한데 그들의 선의에 몸을 맡기기에는 너무 위험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대지요.
그러나 저는 묻습니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이런 생각들 때문에 중국 해적선에 올라타는 것을 포기하였던가요? 그리고 우리의 최초 대목구장들께서도 수많은 여러 왕국들에 흩어져 있으면서 당신들의 보살핌에 맡겨진 신자들을 찾아가야 했을 때 중국인들의 선의를 믿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그다지 믿을만한 방법이 아님은 저도 인정합니다. 중국인들은 종종 그들의 승객이 돈을 가지고 있다고 짐작되면 목을 베어 죽이기도 하니까요. 그러나 더 나은 방도를 발견할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게다가 현명함이 가져다주는 모든 대비책들을 완비한 다음에, 오로지 하느님의 명령을 실행하겠다는 단 하나의 소망만을 가지고서, 혹시라도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위험을 용감하게 무릅쓴다면, 하느님의 좀 더 특별한 섭리를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어느 정도 가질 테지요! 저는 하느님의 명령을 실행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말은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말을 지워야겠다는 생각도, 아주 조금이라도 고쳐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든 사도들과 그들의 계승자들에게,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라고 특별히 명령하셨을 때에 조선을 빼놓으셨습니까? 하지만 이 명령은 지금과 같은 상황 속에 놓인 저 훌륭한 신자 공동체를 고려할 때 더 엄중한 것이 됩니다.
뭐라고요! 어떤 불쌍한 조선 사람(이승훈)이 복음의 빛이 자기 눈에 비치자마자 신자가 되고 또 즉시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로 탈바꿈하여 얼마 안 되는 동안에 수천 명의 동포들을 개종시켰는데, 이 일을 허락하신 하느님께서 결국 이 훌륭한 사업이 더 이상 계속될 수 없도록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신앙의 빛이 한순간 그들의 눈에서 빛났던 것은 즉시 사라져 버림으로써 그들을 그전보다도 더 짙은 암흑 속에 다시 빠뜨리기 위함이었을 뿐일까요? 이를테면 자기 힘으로 생겨난 이 새로운 교회, 사도들의 시대에 가장 위대하고 가장 훌륭한 것들을 바쳤던 것에 비길 만큼 수많은 용감한 순교자들과 수많은 순결한 동정녀들을 예수 그리스도께 바친 교회, 귀양살이와 종살이를 겪고 재산마저 잃고 난 뒤에도 망나니들의 도끼 아래서 계속 복음을 전하고 새 신자들의 수를 끝없이 늘려 나가는, 용감한 증거자들을 아직도 수많이 가지고 있는 이 교회가 그러니까 버림받을 것이라는 말입니까?
뭐라고요! 지극히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당신을 알자마자 경배하며 사랑하고 섬겼던 조선 사람들에게 갑자기 엄하고 매정한 하느님이 되셨다는 것입니까? 하느님께서 어려움을 증가시키고, 뚫을 수 없는 장벽으로 그들의 나라를 둘러싸서 당신의 사제들이 어느 누구도 저들에게 다다를 수 없게 만들고는 즐거워하시겠습니까? 내 머리에 이와 비슷한 생각이 잠시라도 떠오른다면, 저는 섭리를 모독하는 일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5. 마지막 이유가 남아 있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많은 것을 움켜쥐려고 하면 제대로 잡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오래된 속담이라고 해서 언제나 논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게다가 이 속담이 지금 상황에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 파리 외방전교회가 아직도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또 잘할 수 있다는 것을 위에서 증명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저 자신도 이런 말을 여러 번 들었습니다만, 주교님들이 나서서 선교사 성소를 장려하기 위하여 기꺼이 최선을 다하는 교구에는 사제직을 지망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훨씬 더 많다고들 합니다. 그러니 이와 유사한 은혜가 우리 파리 외방전교회에, 버림받은 교우 공동체를 지원하기 위하여 용감하게 희생을 하는 단체에 내려질 것이라고 바랄 수는 없을까요?
여하튼 간에 만약 여러분이 충분히 검토한 뒤에도 여전히 이 문제를 뒤로 미루는 것이 현명하고 또 교회에 이익이 된다고 판단하신다면, 아주 간단한 계획을 하나 제안하겠습니다. 이 계획을 실천에 옮기면 조선의 새 신자들에게 매우 유익할 따름이며, 우리가 현재 맡고 있는 선교자들의 현세적인 이익이건 영적인 이익이건 그 무엇도 위태롭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포교성성에는 장래에 관해서 아무런 약속도 하지 말고, 지금 당장으로는 신부 1, 2명 정도를 보내겠다고 제안하십시오.
그들은 이 나라를 뚫고 들어가기 위해 열성적인 태도와 현명한 판단으로 생각해 낸 모든 것들을 시도해 보겠지요. 언젠가 그들이 조선에 들어가는 일에 성공하기만 한다면, 그들은 자기들 스스로의 힘으로든, 새 신자들의 도움을 통해서든, 그들의 뒤를 따를 선교사들을 들어오게 할 방법들을 발견할 것입니다. 유럽에는 이런 방법들을 잘 알지도 못하며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곳에 도착한 신부는 목자(牧者)가 없어서 매 순간마다 영원히 소멸해 버릴지도 모르는 이 선교지를 지탱해 나갈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하느님의 섭리는 새로운 도움을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만일 이 지역에 파견된 첫 번째 신부가 거기에 들어갈 수 없다거나 또는 사형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당사자에게는 승리가 될 것이며, 그렇다고 다른 선교지에 뼈아픈 손실이 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시도해 보았다는 만족감을 가지게 될 것이고, 자책할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위험한 사업을 기꺼이 맡고자 하는 신부가 누구이겠습니까? 제가 하겠습니다. 소조폴리스의 주교님은 아무리 당신의 대목구에 선교사들이 많이 있기를 원하신다 하더라도, 불행한 조선 사람들을 위해서 당신 사제들 가운데 한 명을 기꺼이 내놓으실 것입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 이미 주교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주교님께서도 제가 여러분에게 편지를 쓰는 것을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주교님은 제 편지를 읽으셨고, 교황 성하께서 저의 청원을 들어주신다면 무슨 일이든지 다 각오하고 계십니다. 사실 제가 이 문제에 대해 교황청에 편지를 보냈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숨겨서는 안 되겠지요. 그 편지에서 저는 여러분이 이미 결정을 내렸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으며, 오직 저와 관련된 것만을 썼습니다.
지금 저에게 맡겨진 임무 때문에 저의 제안이 거부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주교님께서는 교황 성하로부터 갑사(Capsa) 명의로 부주교를 선택하는 것을 허가한다는 소칙서를 받으시고는, 비록 저는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저를 점찍어 두고 있다는 뜻을 제게 넌지시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제가 무슨 이유를 내세우더라도 주교님께서는 저의 동의를 요구하실 것이라고 짐작합니다만, 부주교로 임명되는 것이 저의 계획에 어떤 방해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주교라고 해서 몸이 덜 튼튼한 것도 아니며 성직을 수행하는 데 덜 적합한 것도 아니겠지요. 오히려 그 반대로 더 많은 은총을 받고, 좋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더 폭넓은 권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멀리 떨어진 지역에 파견되는 선교사는 오랫동안 유럽과 연락을 취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그가 단지 보통 신부에 지나지 않는다면 대단히 곤란한 일을 당하는 경우가 자주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교라면 비록 혼자라 할지라도 어려운 일들을 잘 처리할 수 있고, 또 열심한 새 신자들의 재능과 신심을 확인한 후에 그들에게 사제품을 줄 수 있습니다. 젊은 성직자들을 양성하기 위한 항구적인 시설을 세우는 데 필요한 능력들을 하느님의 섭리가 내려주시길 기다리는 동안에 말이지요. 어떤 주교가 이 선교지에서 다른 선교지로 전임되는 사례도 드물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교황청에서 저의 제안을 들어주도록 여러분이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주교님께서도 제 의향들을 아시자 찬성하셨습니다. 만일 시간이 허락한다면 주교님께서 직접 포교성성에 편지를 쓸 작정이십니다.
저는 빈첸시오 아 바오로 성인의 말씀을 여러분께 상기시켜 드리면서 이 글을 끝맺으려 합니다. “자, 부인들이여, 여러분은 동정심과 박애의 정신으로 이 어린아이들을 여러분의 자녀로 맞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이 어린이들을 낳은 어머니들은 자식들을 버렸지만, 여러분은 은총에 의해 이들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여러분마저 그 어린이들을 버릴 것인지 생각하여 보십시오. 그 어린이들의 어머니이기를 잠시 멈추고 그들의 재판관이 되어 보십시오. 이들의 운명은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계속해서 자애롭게 보살펴 주면 이들은 살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여러분이 그들을 저버린다면 틀림없이 그들은 죽고 말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저 열심하고 불쌍한 새 신자들의 어머니인 북경교회가 그들을 버리지는 않았지만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하게 된 이상, 신자들의 공통된 아버지이신 교황 성하께서는 우리 파리 외방전교회에 그들의 어머니이자 의지처가 되어 달라고 요청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저들의 운명은 말하자면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다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포교성성의 제안을 받아들이시면 이 훌륭한 신자 공동체가 살 것이고, 어쩌면 거기서부터 남단의 드넓은 지방으로 신앙이 퍼져 나갈지도 모릅니다. 조선이 일본과 인접해 있다는 점, 두 민족이 함께 교역을 한다는 점, 풍속과 성격이 유사하다는 점 등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고려할 때, 조선의 신자들이 불운한 일본 사람들과 북해도 등지의 주민들에게 의지처가 되고 새로운 사도가 될 것임을 예견해 주는 듯합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여러분이 이 선교지를 포기하시면, 저 불쌍한 새 신자들은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위안도 얻지 못한 채 좌절하게 되어, 용기를 잃고 그들의 낡은 미신들 속으로 다시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 확장하려는 희망은 영원히 사라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지극히 친애하는 동료 신부님 여러분, 저는 여러분의 지극히 보잘 것 없고, 지극히 공손한 종입니다.
교황 파견 선교사 브뤼기에르 올림
1829년 5월 19일, 방콕 4)
4)원문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Charles Dallet, Histoire de l’ Église de Corée, Tome Second, Paris: Victor Palmé, 1874, pp. 11~17;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중,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223~23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