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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發山 山訟蒙 伸雪誌
하늘이 열리고 땅이 생긴 후로 만물이 생기었으며 그 가운데 사람이 으뜸 됨은 삼강오륜(父子有親, 君臣有義, 夫婦有別, 長幼有序, 朋友有信)이 있어 사람이 살아가는 예절을 갖추었음인데 이를 이행치 못하면 새와 짐승에 다름이 없도다.
금수가 아니라면 오륜(五倫)을 이행하여야 가히 사람이라 할 것이니라. 이에 임금(나라)에게 욕됨이 있으면 절개를 지켜 목숨을 바치고 선조에 욕됨이 돌아오면 자손은 효(孝)로써 정성을 다하고 남편이 불명하면 여자는 열녀가 되고 어른과 어린이와 붕우사이에는 존경과 신의를 지키려는 뜻으로 죽는 도리도 있는 것이 만물의 영장이라 일컫는 사람의 행실인 것이다.
슬프다 우리나라 조선 오백년에 산변이라, 산송(山訟)이라 하는 것은 최대로 큰 법률이라, 이는 의리가 있으면 좋고 고운 풍습이 되고 잘못하면 폐습이라 아니할까, 1882년 계미사월 초순경에 가은 왕능(王陵)에 사는 김병옥(본관은 안동김씨)이라 하는 분은 원래 선산 사람으로 왕능에 옮겨와 칠백석 대부자로써 누구하나 두려워 할 자가 없는 사람으로 그 당돌한 태도로 우리 조부(性義)께 찾아와서 인사를 마친 후 하는 말이
“미안합니다만 노형 댁 선령 하에 묘지 한 좌를 빌려주시오”
하므로 조부께서 자리를 피해 앉아 사절하는 말씀으로
“피차간 명문후예로 의관을 중히 여기는 처지로 어찌 무뢰한과 같은 망담을 하시오”
하고 거절하니 그 분이 부끄럽게 여기고 돌아간 지 몇 날 만에 상두꾼 삼백 명과 호상꾼, 차마객 수백 명으로 만산평야 당지에 도착하여 그 당당한 기세는 무인지경을 가는 듯하였다.
어떻게 우리 집안을 이같이 멸시하는가? 슬프다. 그때에 마침 선고(濚在)께서는 막내 삼촌과 문회소(門會所: 시문 따위를 지어 서로 비평하는 모임이 열리는 곳) 백일장에 접유사(接有詞)로 가시어 돌아오시지 못하신 때라 조부와 중부께서 집에 계시다가 장사한다는 소문을 들으시고 부자분이 산상에 올라가시니 저쪽에서는 육 부자가 교활한 말로 위협도 하고 애걸하는 말로
“지난번 댁에 가서 가깝지 아니 한 묘지 한 좌를 빌려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또 호상꾼들은
“가깝지 아니한 곳으로 한좌 빌려 주라”
고 권고가 분주하다. 당장 형세로 볼 지경이면 외로운 부자분이 어찌 그 세력을 당할 수 있으며 항거 할 수 있었겠는가?
창황 중에 관이 묻히고 그 자의 어떤 계책인지는 모르나 성분(成墳)은 안하고 농암장 여관으로 내려가서 유숙할 계획이었다. 그때에 조부께서 집으로 돌아오셔서 일방으로 부주께 알리고 일변으로 여러 친척에게 알리고 동리 친구와 부리는 하인들을 모아 밤에라도 저자들이 성분차 산에 오면 위협으로 물리 칠 계획을 세웠으나 밤이 깊어도 한사람도 나타나지 않고 아무 기척이 없어 하인 몇 사람을 데리고 시장 여관에 가서 잠긴 문을 열고 들어가니 한 상주 놈이 마침 튀어 나오므로 그놈을 결박하여 산에 올라오니 그 자는 거짓으로 죽은 체 하는지라 이렇게 완력으로 할 것이 아니라 법정에 송사 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하여 모든 사람을 해산시켰다.
며칠 후에 조부께서 부주께 명하여 문경 본관 성주(현 문경 군수)에 소송을 제출하였다. 그 내용인 즉, 제교에 이르기를 금하는 남의 땅에 장사하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고 장사를 못하게 하는 산주를 공갈하는 것도 해결해 주시옵소서. 하지만 해결해 주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신원(伸 冤:원한을 펴다)할 도리가 없었다. 그때 집에서 부리는 하인 “김수군”이가 “서울이나 영문(營門)이나 고을이나 왕복하는 통신은 소인이 담당할것이며 소인의 지팡이가 다 닳기 전에 묘를 파게 할 것이니 서방님께서는 수단으로 주선해 보십시오”
이것은 선조를 위하는 일, 백번 죽어도 신원을 못하고서는 머리를 하늘에 두고 발을 땅에 디딜 수 없을 것이다. 그 해 계미 8월 13일에 고종황제께서 동칠능에 거동하시는 길이라 아버지께서는 삼십세 성년이라 할아버지의 령을 받아 문맥이 정연한 긴 편지(상소문)을 안고 한손에는 명종(鳴鐘)을 둘러메고 한손에는 망치를 들고 도복을 사서 입고 임금이 가시는 길을 막고 서서 징을 치니 당장은 신하 될 자의 도리로는 황송무지였다. 그 때 임금의 가마(어가)를 호위하는 군졸들은 창칼로 옷을 비켜 찔러 길 가로 들어내고 임금이 가는 길을 열어 놓았다. 그리고 군졸들은 명령에 복종하여 형조에 압송하였다. 압송을 당한 아버지께서는 정신을 잃어버리시고 취조하는 마당에 누웠다가 얼마 후에 눈을 떠보니 “어전에 걱정을 끼친 나로서 벌써 청천에 버려 졌구나” 라고 생각하시었다.
그 이튿날 동부승지인 홍모가 나라에 품달하니 왕께서 김 모의 산송권은 한성부 판윤으로 하여금 처리하라는 비답을 내리셨다.
그달 십칠일에 판서 홍모와 좌랑 이모가 한성부에 분부를 내리시어 경상도 관찰사(경상남북도 통합지사 격)로 하여금 피해자 측의 내용을 알아 장문하라 하였다. 8월 20일에 판윤 민종묵, 주부 정선조, 동부승지(지금의 대통령 비서실장 격) 홍성현이 나라의 명령으로 판단한 것을 시행하는 것이 당연하므로 한성판윤은 관찰사에 명령하여 한성부관문(공문)을 서울로부터 9월 8일에 발송하여 9월 17일에 영문에 도착하니 관찰사는 즉시 감령을 발하여 문경현감 앞으로 보낸 후 한 달이 지나도 소식을 들을 수 없는지라 10월 13일에 영문에 내려가서 그 늦음을 탐지하고 즉시 순상(승상)께 품하여 다시 감결령(잘 조사하여 결정함) 을 발송하여 4월 24일에 본 읍에 도착하니 그 이튿날 관으로부터 장교입회하에 26일전에 무덤을 파고 그 전에 가까운 타인 분묘 두 좌도 파내었다. 이즈음에 집에 하인 김수군의 막대가 한자밖에 남지 않았다. 참으로 충성스러운 하인이라고 칭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이듬해 갑신 4월 초순에 (1884년 4월) 저 김병옥의 맏아들 김우용이가 교묘한 수단과 방법으로 사장을 속여 할아버지로 하여금 금장하지 못할 곳에 금장하여 임금을 기만한 죄명을 씌워서 평안도 양득현 이천리 먼 지방으로 귀양을 가게 하였다. 당장에 신하된 도리로 감히 그렇게 시행치 않을 수 없어서 곧바로 길을 떠나 동대문 밖 고마청(雇馬廳 (고마청)조선(朝鮮) 시대(時代) 중기(中期)의 관청(官廳). 민간(民間)에서 징발(徵發)한 말을 관리(管理)하던 곳)에 주인을 정해두고 즉시 분가에 통신하니 아버지께서 들으시고 낮에 백리 밤에 백리 이틀 만에 사백리 길을 걸어 서울에 도착하여 사관을 찾아 가까이 한 후 다시 추조에 호소하니 피 측에서 협잡하야 무고한 사실이 백일하에 탄로되어 곧 삼일 후에 할아버지께서는 귀양령에서 풀리셔서 아버지께서 수일 후 모시고 집에 돌아오신지 두 달 만에 영문으로 오라는 연락이 있어 그 까닭을 물으니 저 김우용이가 할아버지를 평안도 양득현에 귀양을 보낼 뜻으로 한성부 관문을 거짓 상고 하였으니 그 죄가 크니 할아버지께서 어찌 하실 건지 의향을 묻는지라, 할아버지께서 하신말씀이 사람의 도리로는 죄 없는 자에게 죄주고자 했던 사람이 죄받음이 당연한 일이나 이제 결말이 났으니 저 사람에게 보복하는 것은 아름답지 못한 것이니 금지케 하여 산송은 끝이 났다.
그 후 한해를 지내고 병술년(1886년)이다. 이 해는 돌림병(전염병)이 창궐하여 더욱이 우리 집은 심하여 7월 초순에 조모와 중부께서 삼사일간에 작고하시고 8월초에 아버지께서 하세(下世:세상을 버린다는 뜻으로, 웃어른이 돌아가심을 이르는 말) 하시고 그 이듬해 정해(1887년) 유월에 조부께서 별세 하시니 한 집안에 네 곳의 빈소는 망극하고 비통한 마음을 말로 다 형용키 어렵도다.
인간의 변해가는 모습이 상전벽해(桑田碧海)라 그때 막내 삼촌께서 겨우 22세라 졸지에 창망한 상고를 당하시어 장사지내는 범절은 친가에 도움으로 마쳤으나 다만 슬하에 있는 어린 조카들은 13세,10세,6세로 강보에서 갓 면한 어린것들이라 고독하고 외로운 혈혈단신으로 후원하는 사람은 전혀 없고 사람이 불행한 것을 기회로 여겨 그 전에 송사에서 패했던
김우용가 경인년(1890년)6월에 다시송사를 기도하여 이 산은 민성용에게 매수 하였다고 산 값과 장비(이장하는 비용)를 합하여 삼천냥을 준 것으로 한성부에 무고하여 송사하니 본읍 성주가 장교 2명을 시켜 숙부님을 착내하라는 명령으로 도착하였다. 때는 마침 큰 비가 내려 통섭이 극히 어려웠다.
이날 숙부께서는 13살 되는 조카(商璉)을 불러 말씀하되 “네가 비록 어리나 조상의 일에는 부득불 몸을 조아릴 수 없으니 깊이 생각하여라. 내가 이 길로 가서 체포되고 보면 뒤에서 주선할 사람이 한사람도 없으니 말이다” 이때 형님께서 숙부께 말씀하시기를 “제가 비록 어리고 어리석으나 위선하여 어찌 차마 몸을 아껴 명을 구하리오. 숙부를 대신하여 잡혀가서 일을 따라 형벌을 받을 것이니 간절히 주선하시고 주장하시기 천만 읍축( 泣祝 (읍축) 울면서 빎.) 하옵니다”
숙부께서 이 말씀을 들으시고 간장의 저려오는 슬픔과 분통의 눈물을 머금고 교자를 명하여 형님으로 하여금 숙부를 대신하여 잡혀 보내신다. 큰물은 내에 가득하여 건너기가 어려운데 유삼(유삼 [油衫] 비나 눈을 막기 위하여 옷 위에 껴입는 기름에 결은 옷)을 돌려쓰고 교자에 앉아 농암천을 간신히 건너셨다. 그때 광경을 들어 말할진대 홀로 계신 어머님은 자애로우신 마음을 진정할 도리 전혀 없고 조상의 일이고 삼촌을 대신하는 일이라 속으로는 단장의 슬픔이 있으나 밖으로는 숙연히 참으시고, 숙부께서는 미거한 조카를 잡혀 보내시니 그날 가정의 경관은 목불인견(목불인견 [目不忍見] 눈으로 차마 보지 못한다는 뜻으로 슬프고 처참한 광경을 가리키는 말)이란 문자로도 표현이 부족하다.
형님은 이날 가마위에 유삼으로 비를 피하고 9일 저녁 문경현에 도착하여 감방에 갇혀 지리한 세월의 삼삭(세번의 초하루, 즉 3개월정도)을 지냈다. 향내에 모모(某某 아무아무라고 손꼽을 만한. 또는 그만큼 저명한)한 조부,부주의 친구 노인이 현에 오셨다가 상시로 옥에 위문하시며 말씀하시기를 “너의 집 액운이 이같이 심하뇨? 너의 조부 형이 계셨던들 너의 몸에 이 같은 액운이 닥쳤겠나?”하시고 참외와 복숭아 등 신선한 음식을 넣어 주시면서 “이것을 먹고 잘 있으면 너의 삼촌이 서울에 갔으니 주선하여 너를 석방할 도리가 있을 것이다” 하셨다.
갇혀있는 죄수 몸이라 머리를 빗을 도리도 없으니 그 형용은 탈벙거지를 방불케 하였고 이것이 일생일대의 환란풍상(患亂風霜)이란 말인가? 옥 밖에서 옥안을 들여다보는 이의 가슴을 무엇으로 형용한단 말인가?
상경한 숙부께서 한성부 관문을 얻어 본관 성주에게 돌아오니 성주가 관문을 무릎 밑에 말아 넣고 버렸는지라 슬프다 그 때 성주는 사랑하는 손주도 없었던가? 내 자손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으면 13세의 어린아이를 감옥에 가두어 두고 지루한 세월을 소비하는 모양이 무엇이 그리도 좋든가 참으로 무지막지한 소치로다.
숙부께서 다시 밤을 낮 삼아 상경하시던 길에 음식이 받지 않아 몸을 상하여 죽산등지에서 구토를 하고 설사를 만나 위태한 지경에 다달아 넘어지고 앞으로 나아갈 힘이 없으시자 세마를 빌려 타고 도성에 다달아 재차 관문을 얻어오니 그 관문에 왈 “업무 수행에 어찌 그리 태만하냐? 저쪽에서 무고한 관문은 없애버리고 저쪽을 응징해서 그 버릇을 징계하는 것이 당연 하도다” 관문이 당도 하는 날 형님이 석방되었다.
다음해 신묘(1891년) 11월에 다시 김우용이 선산 본관(군수) 겸 수어사께 무고하여 숙부로 하여금 본 읍 옥중에 갇히게 되니 주선할 도리 전혀 없었다. 이때 형님은 초례(결혼) 후 한 달이라 제행 후 집에 돌아오니 숙부는 갇히고 어린 동생뿐이라 15세의 형님께서는 혼자로서 또한 주장할 계책이 전혀 없고 위에서 원조할 사람조차 없는지라 생각다 못하여 타고온 말을 돌려 타고 헌국 조(趙)사장댁을 향하여 말을 달렸다. 사장어른께서는 원래 글이 능하고 견문이 있는 집안이라 소장(고소장)을 지으시는데 동지섣달 긴긴밤에 해를 보고 불을 껐다. 그 솟장은 누가 보든지 우리집 경관은 비참하고 망극타 아니할 자 없었다.
그 솟장을 안고 선산관가에 도착하여 수위 순상께 재소하니 그 재교에 문경에서 사실한 보초가 도착되면 바르게 할 것이라고 본 읍 보초가 선산관가에 도부(到付 장사치가 물건을 가지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팖)할 새 어사께서 보초를 보시고 송사를 가리셨다. 그에 이르되 산송으로서 여러 번 되풀이 됨은 백성의 좋지 않은 습관이요 아홉 해가 되도록 흉계를 잊지 않고 서로 분해하기 그칠 줄 모르고 송사가 이다지 심하야 김우용 김모를 일체 엄하게 징벌하야 송사를 다시 써 올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 합당하다 이로 인하여 숙부께서 석방되셨다.
이듬해 봄에 본관은 갈려고 하고 새로 부임한 현관과 김우용이 짜고 다시 송사를 기도하여 본관 성주의 딸의 편지를 얻어서 그 성주에게 부쳤다. 그 내용인 즉, 아버지(성주)께서 이 돈 삼천냥을 받아 주시면 식량을 얻어 겨울을 지낼 계책이 되어 있다고 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그 딸의 정지(情紙)를 돌아보지 아니하랴. 그러나 이 성주는 장동 김정견씨라 조선에 훈족(공을 세운 씨족)으로 사리에 밝아 그의 딸의 편지를 불고하고 양방에서 계속해서 낸 송사를 읽어보고 잘 살핀 후 양방을 초대하여 말하기를 이치가 바른 자는 신원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 자는 패송하니 이것이 하늘의 이치요 국법이라, 김우용의 송사는 결단코 용서할 수 없으나 저 쪽에 가산이 송사로 인하여 탕진되었으니 이것저것의 논할 것은 없으나, 숙부를 불러 말하기를 “돈 백냥을 직일내로 들여오라”는 분부가 내렸다. 숙부께서 다시 여쭈되 “돈 백냥은 어디에 쓰실 것입니까? 물으니 관에서 하는 말이 ”저 사람을 주려한다“ 하여 ”거기에 대해서는 한푼도 줄 수 없다“고 하니 성주 하는 말이 ”관의 명령을 어기면 형을 가할 것이니 속히 납입 하여라“ 하여 다른 도리가 없어 백 냥을 주선하여 바치니 성주가 그 돈을 저 쪽 김우용에게 주고 이 송사를 다시는 기도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써 올리라 하였으나 김우용이 못하겠다고 하니 성주가 대노하여 그 자의 각서를 받아 숙부께 주신 후에 김우용의 전후 문서를 불에 태우고 우리 집 장첩(사연이 담긴 편지)은 돌려 주셨다.
아무런 잘못 없이 몹쓸 사람에게 끌리어 송사를 진행한지 일세기가 넘은 지금 오늘 불초손(商建)도 천한 나이 칠순을 넘으니 이러한 오가(汚家)의 역사를 기재하여 뒤에 알리지 못하면 다시는 들을 곳도 없는 고로 내가 눈으로 본 바와 귀로 들은 바에 의해 간략히 이 사실을 기록하여 후손에게 전한다.
정해 출 정월에(1947년) 商建은 피눈물을 흘리며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