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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아닌 가족 단위로 사다리에 오르는 사회. 한국에서 가족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10쪽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는 결혼제도 안에서 부모와 자녀로 이뤄진 핵가족을 이상적 가족의 형태로 간주하는 사회 및 문화적 구조와 사고방식을 말한다. 바깥으로는 이를 벗어난 갖고 형태를 '비정상'이라고 간주하며 차별하고, 안으로는 가부장적 위계가 가족을 지배한다. 정상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로 가족이 억압과 차별의 공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어떤 가족인가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109쪽 과거 친권은 사람의 물건에 대한 지배권처럼 부모가 자녀에 대해 갖는 일종의 지배권이었다. 아이들은 스스로 권리의 주체가 아니라 부모 권리의 객체였을 뿐이다. 그렇게 친권을 '권리'라고만 표현하다가 '자녀를 보호, 교양할 권리. 의무'라고 정의한 <민법>조항처럼 '권리이자 의무'로 부르게 된 것도 과거에 비하면 큰 진전이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는 친권이 아이들을 보호하기는커녕 권리를 침해하는 경우가 숱하게 많다. 가족이 그 안에 속한 개개인, 특히 아이들의 차별 없는 권리와 평등을 보호해줄 수 있으려면 친권이 권리보다는 의무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보다 많은 공공의 역할이 필요하다.
부모가 자식을 자신의 소유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가 아닐까.
166쪽 위기의 나락으로 굴러떨어지는 개인을 받쳐줄 사회적 보호 제도가 전무한 상황에서 개인이 부여잡을 지푸라기는 뭐였을까. '사회적 안전망'이 없는 사회에서 개인이 기댈 유일한 언덕은 '사적 안전망'인 가족이었다. 가족은 부계 혈연 중심의 유교적 가족 규범이 지배적이었던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근대화, 도시화, 산업화를 거치며 줄곧 사회적 위기 상황에서 개인을 지켜주는 거의 유일한 울타리였다.
한국에서 가족이 왜 중요할까에 대한 해답. 스웨덴처럼 가족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국가 전체의 문제로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28쪽 상황에 따라 부모는 자녀에게 폭력을 가해도 된다는 사고방식이 여전히 강한 것이다. 자녀를 소유물처럼 바라보기 때문에 부모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폭력을 행사해도 되는 대상으로 간주한다. 체벌은 엄연히 별개인 인격체에 대한 구타이고 폭행인데도 아이의 관점이 아닌 성인, 부모의 관점에서 지속된다. 어느 누구도 사랑을 이유로 또는 타인의 행동 교정을 위해 다른 사람을 때릴 수 없는데 오직 아이들만이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때리는 것이 용인되는 유일한 집단이다.
미숙한 아이들을 때려서라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 체벌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주장이다. 열등한 상대에 대한 교정 목적의 폭력은 정당화 될 수 있다는 오래된 논리다. 그러나 수많은 경험적 연구는 체벌의 교육적 효과는 없고 되레 폭력의 내면화를 통해 뒤틀린 인성을 만들어낼 뿐이라고 지적한다. 아이들에게도 반성보다 공포만 불러일으킬 뿐이다.
"상처받음, 무서움, 속상함, 겁이 남, 외로움, 슬픔, 성남, 버려진 것 같음, 무시당함, 화남, 혐오스러움, 끔찍함, 창피함, 비참함, 충격받음."
'체벌'에 대한 아이들의 기억이다. 영국 세이브더 칠드런이 2001년에 아이들이 맞았던 경험을 어떻게 느끼는지를 정리한 기록이다. 아이들은 체벌에 대한 끔찍한 느낌을 40개가 넘는 형용사로 표현했지만 그중 미안하다거나 반성한다는 느낌을 말한 아이는 없었다. 체벌이 교육적으로 별 효과가 없을 뿐 아니라 아이들에게 정서적으로 큰 피해만 입힌다는 것을 보여준다.
학생, 아이를 존중해야... 행동교정을 위한 체벌은 의미가 없다. 사랑의 매와 체벌이 가정에서 여전히 행해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122쪽 일자리를 얻지 못한 저소득 미혼모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어떨까. 정부는 아이(만 13세 미만)를 홀로 키우는 저소득 미혼모에게 월 12만 원(엄마가 청소년일 경우 17만 원)의 양육비를 준다.
만약 미혼모가 직접 키우기를 포기하고 아이를 다른 양육시스템으로 보낸다고 해보자. 입양을 보낼 경우 입양가정은 입양 수수료 270만 원을 지원받고 매달 15만 원(만 14세 전)의 양육수당과 20만 원의 심리치료비, 100%의 의료지원을 받는다. 또는 위탁가정이나 시설에 보낸다고 해보자. 2015년 보건복지부의 <대안 양육제도 양육비 실태조사연구>에 따르면 위탁 가정은 월 66만 원 7,000원, 공동생활 가정은 128만여 원, 양육시설은 166만여 원의 지원금을 정부에게서 받는다.
시설의 경우 종사자 인건비 일부가 포함되므로 단순 동등 비교를 할 수는 없겠으나 어떤 경우든 미혼모가 아이를 버리는 것보다 직접 키울 때에 정부의 지원이 가장 적은 것은 사실이다. 만약 미혼모가 기초생활수급자가 되면 이 혜택도 사라진다. 생계급여와 아동 양육비는 중복해서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지원금을 미혼모에게 주면 되지 않을까? 현재의 제도는 미혼모가 아이를 포기하는 것을 장려하는 제도처럼 보인다. 차이가 이 정도로 심할 줄은 몰랐다.
125쪽 이렇게 구조적으로 아이 버리기를 부추기는 사회에서 아이를 버리는 '주범'이 여전히 미혼모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이른바 '정상가족'이 아닌 다른 삶은 잘못되었다고 차별하고 배제하면서 교육받을 권리와 일자리까지 위협하는 한국의 가족주의에 그 혐의를 두고 싶다.
209쪽 이 시기에 부모의 체벌을 둘러싼 사회적 논쟁이 가열되면서 많은 명사들이 논쟁에 참여했는데 그중 한 명이 [삐삐 롱스타킹]으로 유명한 아동문학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Astrid Lindgren이다. 린드그렌은 스웨덴에서 부모의 체벌을 금지하는 법이 통과되기 1년 전인 1978년, 독일 도서협회가 주는 평화상을 타면서 '폭력에 반대합니다. Never Violence'라는 제목의 연설을 했다.
이 연설에서 린드그렌은 젊은 시절에 자신이 한 여성에게 들었던 일화를 들려준다. 매를 아끼면 아이를 망친다는 믿음이 팽배했던 시절 젊은 엄마였던 그 여성은 어느 날 어린 아들이 말을 듣지 않자 매로 가르치려고 아들에게 회초리를 가져오라고 시킨다. 한국의 엄마들도 많이 쓰는 방법이다. 아이들이 직접 회초리를 가져오게 하고 몇 대 맞을지도 결정하라고 함으로써 "네 죄를 네가 알렸다"와 같은 경고와 함께 스스로 반성할 기회도 갖도록 한다는 방식 같은 것 말이다.
그런데 이 소년은 회초리를 찾으로 나갔다가 한참 만에 울면서 돌아와 작은 돌을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회초리로 쓸 만한 나뭇가지를 찾을 수 없었어요. 대신에 이 돌을 저한테 던지세요."
아이는 '엄마가 나를 아프게 하길 원하니까 회초리 대신 돌을 써도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천진한 아이의 이 말이 엄마로 하여금 아이의 눈을 통해 상황을 보도록 만든 각성의 계기가 되었다. 자신이 아들에게 한 짓이 무엇인지 깨달은 엄마는 아이를 끌어안고 한참을 같이 울었다. 그 순간 자신이 했던 결심, 앞으로 절대로 아이를 때리지 않겠다는 서약을 잊지 않기 위해 그녀는 아이들이 주워 온 돌을 버리는 대신 부엌 선반 위에 올려두었다고 한다.
야누슈 코르착의 아이들이 생각이 났다. 아이들의 심장이 쿵쾅거리는 모습. 폭력적인 훈육은 아이들에게 상처만 남길 뿐.
212쪽 법 개정의 목적 자체가 체벌이 자연스럽고 양육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과 문화적 규범을 바꾸자는 거였으므로 스웨덴 정부는 법 통과 이후 이를 알리기 위해 대대적 캠페인을 펼쳤다. <체벌금지법>과 함께 체벌 대신 사용 가능한 훈육 방법을 설명하는 16쪽짜리 설명서를 자국어뿐 아니라 독일어, 영어, 불어, 아랍어 등 여러 언어로 만들어 아이가 있는 전국의 모든 가정에 배포했다. 또 두 달간 <체벌금지법>에 대한 설명을 우유병에 붙이도록 했다. 아동병원과 산전 클리닉들도 캠페인에 참여했다.
그 결과 법안 통과 2년 후인 1981년엔 스웨덴 전체 가구의 99%가 이 법에 대해 알게 되었다. 스웨덴이 상대적으로 작은 나라라서 가능하기도 했겠지만 한 국가에서 이만큼 많은 사람이 법률을 아는 경우는 거의 전무 후무하다. 이는 모든 산업화된 근대국가에서 실시한 법률 지식에 대한 조사 중 가장 높은 비율이라고 한다. 스웨덴 정부가 법으로 문화적 규범을 바꾸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보여준다.
투명한 가족을 만드는 스웨덴의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35-36쪽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런던통신에서 "학창 시절 회초리나 채찍으로 매를 맞았던 이들은 거의 한결같이 그 덕에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믿고 있다. 내가 볼 때는 이렇게 믿는 것 자체가 체벌이 끼치는 악영향 중 하나다."
어릴 때 회초리를 맞지 않았더라면 내가 어떤 사람이 되었을지는 겪어보지 않아서 알 수 없다. 아마 지금과 비슷하거나 폭력에 민감한 감수성을 장착한 더 나은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261쪽 "마을공동체를 찬양하는 학자들은 그 이면에서 죽어가는 약자들은 보지 않는다." "왜 굳이 끈적한 관계를 베이스로 한 공동체 이야기만 하는가." "집집마다 수저가 몇 벌씩 있는지 알려고 아무 때나 문을 휙휙 열어젖히는 공동체 말고, 각자가 개인의 영역을 지키고 존중하는 한편 일개인에게 좌지우지되지 않는 특특한 시스템을 갖춘 문명사회를 원합니다." "나는 마을공동체 말고 각박한 개인주의 법치국가에서 살고 싶다."
범죄 예방의 해법으로 공동체 회복을 제 시하는 게 낡은 사고방식인 건 맞다. 폭력을 막는 건 공공성의 강화여야지 공동 체적 관계의 회복이 그 방안은 아니다.
그러나 젊은 세대의 강한 거부감의 이유가 단지 공동체와 공공성을 헷갈리는 기성세대의 사고방식에 대한 반감 때문만은 아니었을 거다. 아마 각자 겪어본 공동체의 경험이 대체로 부정적이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사사건건 통제하고 간섭하며 구성원을 존중해주지도 않는, 수긍할 만한 원칙도 ㅇ벗고 권위를 가진 사람 마음대로인 폐쇄적 공동체들, 가족에서 학교, 회사에 이르기까지 겪은 부정적 경험이 공동체 일반에 대한 반감으로 드러나게 된 것은 아닐까.
공동체의 억압적 측면을 주로 경험하며 성장한 사람들에게 개인과 공동체가 대립된 개념이 아니라는 말은 그저 공염불에 불과하다. 현실에서 개인과 공동체가 대립하고 양자택일의 대상처럼 경험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내 생각엔 공동체가 작동하는 원리로 공공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254쪽 공감은 이집단의 경계를 좀처럼 잘 뛰어넘지 못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공감하는 게 아니라 혈연, 우정, 유사성, 공통의 유대를 가진 사람들에게 더 잘 공감한다.
또 권력을 가진 사람은 대체로 공감력이 낮다. 다른 사람 처지에 서보려고 애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중략)
이러한 공감의 한계 때문에 심리학자 폴 블룸 Paul Bloom은 세상을 더 낫게 만들려면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어보는 방식의 공감력 향상보다는 되레 한발 물러나 객관적이고 공정한 도덕에 근거해 판단하는 이성적 역량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략)
공감의 능력이 확대되는 건 아름답지만 저절로 이뤄지는 것도 아니고 어렵게 익혀야 하는 일이다. 흔히 상상하는 것과 달리 공감의 확대는 어쩌면 감성이 아니라 이성을 발휘해야 도달 가능한 목표일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마치 자신이 겪는 양 느낀다 해도 고통의 원인을 잘못 인식하면 행동이 엉뚱해지듯, 그릇된 인식이 공감을 왜곡하는 일도 잦다. 나와 다른 사람과 공존하는 기술, 갈등의 해결, 세상의 고통을 줄이는 방법을 이야기할 때 역지사지의 확대, 공감의 향상을 핵심에 놓는 것은 지나치게 이상적이다.
자율적 개인과 열린 공동체라는 제목이 인상적이었다. 아이들이 존중받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공공선 역시 강조되어야 한다.
5쪽 "한 사회가 아이들을 다루는 방식보다 더 그 사회의 영혼을 정확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것은 없다."
- 넬슨 만델라 Nelson Mandela-
스웨덴처럼 국가적 차원으로 체벌금지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에도 세이브 더 칠드런 같은 매뉴얼이나 지원체계가 있었으면 좋겠다./ 제목의 뜻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기본소득을 나라의 한 국민인 아이들에게까지 준다면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권리를 누리며 자라는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허술한 사회 보장제도와 자유롭게 살지 못하는 아이들의 삶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12쪽 사람이 개별성을 최초로 인정받는 부모, 양육자의 관계에서 인권의 두 기둥인 자율과 공감이 뿌리내려 가족 내에서 아이를 소유물처럼 대하는 행동, 가족 바깥에서 '정상'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사람들을 차별하는 태도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이, 그리하여 모든 아이들이 자율적인 개인, 공감하는 시민으로 자라나기를 희망하는 것이 너무 이상주의적일까.
새로운 기운과 과거의 기억이 뒤섞여 넘실대는 때, 광장의 열기가 민주주의로 정착하려면 큰 권력과 제도의 개선뿐 아니라 일상 속에서 위계적 질서를 걷어내고 사람의 개별성을 존중하며 타인과 공감하는 태도의 변화, 일상의 민주화가 필요하다. (중략)
1958년 세계인권선언 채택 10주년을 기념한 엘레노어 루스벨트 Eleanor Roosvelt의 연설은 여전히 유요하다. "보편적인 인권은 어디에서 시작될까요? 작은 곳, 그리고 아주 가까운 곳에서부터입니다. 아주 가깝고, 아주 작아서, 그곳은 어떤 세계지도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곳은 각각의 사람들의 세계입니다. ... (중략)... 작은 곳에서부터 인권을 지키려는 모두의 노력이 없다면 보다 큰 세계에서의 발전도 헛될 것입니다."
27쪽 평소 체벌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이 극도의 양육 스트레스를 겪을 때 이 스트레스가 촉매제가 되어 학대로 치닫게 된다는 것이다. 반면 체벌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은 양육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 상황에서도 학대로 치닫는 경우가 없었다. 도구를 갖고 엉덩이를 자주 때리는 부모들이 그렇지 않은 부모에 비해 학대를 할 가능성이 9배나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여전히 아무리 그래도 체벌과 학대는 엄연히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끔찍한 학대와 훈육 목적의 체벌이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현실의 답은 '상관있다'이다. 국가가 체벌을 금지하면 학대도 줄어든다. OECD 회원국 가운데 법으로 체벌을 금지한 나라에서 아이가 학대로 사망할 확률은 10만 명당 평균 0.5명 미만으로 다른 나라에 비해 훨씬 낮았다. 반면 체벌금지 법률이 없는 한국은 학대로 사망할 확률이 10만 명당 1.16명이었고, 29개국 중 세 번째로 높았다.
개인이 아닌 국가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
62쪽 2016년 대책에서 이전보다 강화된 것은 아동학대 예방을 위한 부모교육이 강조였다. 생애 주기별 맞춤형 교육을 강화하고 취약가정을 중점 지원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취약가정으로 거론된 예를 보니 황당했다. 한부모, 조손, 이혼, 재혼, 다문화, 새터민, 장애인 가정을 취약가정의 예로 들고 있었다. 소위 '정상가족'이 아닌 다른 형태의 가족들을 학대가 일어나기 쉬운 취약가정으로 분류한 셈이다.
그 당시 나와 동료들은 언론 보도를 모니터링하면서 아동학대 사건들의 유형을 정리하던 중이었는데, 우리가 모니터링한 사건 열 건 중 정부가 중점 지원 대상이라고 분류한 장애인, 새터민, 다문화, 조손 가정은 단 하나도 없었다.
적어도 그 당시 우리가 정리한 바로는 아이를 심각하게 학대한 가족들의 경우 부모가 사회적 고립 상태이거나 가족 구성원 간 갈등이 심한 경우가 다섯 건, 이혼 별거 동거 등으로 제도적 결혼을 벗어난 경우가 네 건, 양육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경우가 네 건, 게임 중독에 빠진 경우가 세 건(이상 중복에 해당되는 경우를 포함한 것) 이었다. 문제는 가족의 형태가 아니었다.
144쪽 노혜련 교수는 "입양부모는 선하고 대단한 존재라는 사회적 인식은 입양아동을 양육하는 가정에서 어려움이 있어도 외부에 도움을 청할 수 없도록 만든다"라면서 "입양은 선한 일이라기보다 전문적 도움이 필요한 전 생애의 과정이라는 인식을 확대하고 현금 지원보다 전문적 사후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적 전달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33쪽 반면 부모가 직계비속, 즉 자녀를 폭행했을 때에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 처벌의 대상이 되지도 않거니와 심각한 학대일 때에도 타인이 같은 대상을 폭행했을 때보다 가벼운 처벌을 받는다. 심지어 법원은 열네 살 딸을 목검으로 때려 숨지게 한 아버지에게 "최근 문제가 된 아동학대와 다르다"라며 살인이 아닌 상해치사죄를 적용해 징역 6년을 선고한 일도 있다. 형량보다 눈에 띄는 건 판사가 "사건 당일의 폭행도 설득과 훈육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었다"라고 판단한 대목이었다. 한 시간 반 동안 주먹으로 폭행하고 목검으로 온몸을 30여 차례 때린 행위를 부모의 설득과 훈육을 볼 수도 있다니 그저 아연해진다.
39쪽 인류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사회적 계층화, 정치적 의사결정의 비민주성, 폭력적 문화가 심한 사회일수록 체벌이 심한 경향성이 있다.
40쪽 영화 <스포트라이트>에서 가톨릭 사제들에 의한 아동 성폭력을 밝혀내려 분투하던 인권 변호사는 "한 아이를 키우는 데 한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한 아이를 학대하는 데에도 한마을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68쪽 2016년 8월 우리가 개최한 <한국 아동 삶의 질 3년 차 연구발표회>에 토론자로 참석한 중학교 2학년 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중학생부터는 생활기록부에 잘 기록되기 위한 생기부 인생을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생기부 인생을 사는 우리들은 절대적으로 자유시간이 부족합니다. 항상 무엇인가 해야 할 일이 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체벌과 폭력을 구분해서 생각하는 사회. 법제화가 중요. 폭력 금지법을 제정할 필요가 있다. 법적, 제도적 장치가 얼마나 시행자 위주인지! 아이들이 하루에 한순간이라도 홀가분한 마음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아이들에게는 온전히 노는 시간만으로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196쪽 연구 결과 남성은 기혼자의 사회 참여가 높고 비혼자는 그렇지 않은 반면, 여성은 거꾸로 비혼자의 사회 참여가 높고 기혼자의 참여는 낮았다. 여성은 배우자 역할을 수행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일 때 사회 참여가 높지만 남성은 정반대다. 즉, 한국 사회에서 가족을 꾸리지 못한 남성은 주관적 삶의 질뿐 아니라 공동체와 결속하는 정도도 낮아진다. 그만큼 자신을 희생하고 뒷받침해주는 여성의 존재가 남성에게 중요하고, 가족이라는 일차적 사회관계가 '관계 자원'으로서 갖는 중요성이 남성에게 훨씬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반면 여성은 아내 역할이라는 부담이 공동체 참여를 가로막는 장애로 작용한다. 결국 남성이 가장이고 여성이 집안일을 책임지는 식의 전통적 가족주의가 여성이 공적 영역에 참여하는 것을 위축시키고 시민 문화 촉진의 저해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177쪽 개인 아닌 가족 단위로 사다리에 오르는 사회
166쪽 위기의 나락으로 굴러떨어지는 개인을 받쳐줄 사회적 보호 제도가 전무한 상황에서 개인이 부여잡을 지푸라기는 뭐였을까. '사회적 안전망'이 없는 사회에서 개인이 기댈 유일한 언덕은 '사적 안전망'인 가족이었다. 가족은 부계 혈연 중심의 유교적 가족 규범이 지배적이었던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근대화, 도시화, 산업화를 거치며 줄곧 사회적 위기 상황에서 개인을 지켜주는 거의 유일한 울타리였다.
218쪽 스웨덴이 법으로 부모의 체벌을 금지한 정책에는 취약한 개인인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국가가 강자인 부모의 권력을 제한할 수 있다는 가치관이 배어 있다. 그럼 이는 국가가 가족의 사생활에 지나치게 개입하는 전체주의적 방식일까?
스웨덴인들은 정반대로 이를 지극히 개인주의적 삶의 방식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설명한다. 2011년 스위스 다보스 포럼에서 스웨덴 역사학자 라르스 트래가르드가 발표한 '스웨덴식 사랑 이론 Swdish theory of love'이 그런 논리다.
이 이론은 진정한 인간관계는 서로에게 의존하지 않고 불평등한 권력관계에 놓이지 않는 개인들 사이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자율적이고 평등한 개개인 사이에서만 사랑과 우정 같은 인간적 교류가 이루어진다. 심지어 부모와 자녀 관계에서도 서로 의존적이고 굴욕을 강요하는 권력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한 진정한 사랑이 불가능하다고 바라본다. 국가는 이런 굴욕감에서 개인을 해방시킬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233쪽 특히 여성의 경우 엄마가 될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고도 일을 통해 자기 삶을 꾸려가는 게 가능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에게는 전통적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더 개인화된 가족정책, 개인이 더 자율적으로 살도록 지원하고 거의 모두가 겪는 공통의 문제는 집단적으로 해결하는 가족정책이 필요하다.
국가가 그러한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하려면 시민사회가 더 활성화되고 정부의 정책결정 가정에 시민사회가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건강한 사회는 서로 신뢰할 수 있는 사회이다.
230쪽 혼외출산이 늘어나며 가족가치가 훼손된다고들 걱정하지만 스웨덴 커플의 3분의 2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결혼한다. 92%의 남자들이 즉시 아버지 됨을 승인하고 스웨덴에서 대부분의 아이들은 결혼제도와 무관하게 생물학적 부모와 같이 살고 있다. 설령 부모가 이혼하더라도 공동양육의 돌봄을 받는다.
보편적 공공교육의 비판자들은 과도한 공공보육이 가족생활을 갉아먹거나 어린이의 정상적 양육을 저해하고 가족해체로 나아가게 될 거라고 비판했지만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다시피 스웨덴은 보편적 공공보육에도 불구하고 부모가 자녀와 보내는 시간이 줄기는커녕 되레 늘었다. 스웨덴의 아빠가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하루 평균 300분이고, OECD 국가 평균은 47분이다. 한국은? 6분이다.
244쪽 '점잖은 아이'가 칭찬으로 많이 쓰이는데 '점잖다'의 어원은 '젊지 않다'다. 젊지 않고 어리지 않은 몸가짐을 칭찬하는 이면에는 젊고 어린 행동거지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깔려 있다. 어려서 칭찬받는 경우란 '동안'말고는 없지 않은가?
247쪽 <유엔 아동권리협약>이 다른 모든 인권협약들과 다른 점은 '아동 최선의 이익의 원칙'이다. 다른 모든 조항을 지배하고 협약 전체를 관정하는 '슈퍼 조항 Super right'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원칙은 공공이나 민간 기관이 아이들과 관련된 결정을 할 때 늘 '최선의 이익', 지금 이 아이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고려하라고 요구한다. 또한 부모, 후견인처럼 아이에 대해 법적 책임을 지닌 사람이 아이에게 필요한 보호와 배려의 의무를 지킬 수 있도록 국가는 모든 입법적, 행정적 조치를 취하라고 주문한다.
252쪽 리베카 솔닛Rebecca Solnit은 공감 Empathy에 대한 아름다운 에세이 [멀고도 가까운]에서 사람은 타인에게 공감함으로써 자아는 확대되지만 그다음엔 자아도 위험과 고통을 분담하게 된다고 썼다. 공감이란 "자신의 테두리 밖으로 살짝 나와서 여행하는 일, 자신의 범위를 확장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진정으로 타인의 현실적 존재를 알아보는 일이며, 바로 이것이 감정이입을 탄생시키는 상상적 도약을 구성한다.
다른 말로 하면 공감은 매우 어렵고 노력해야 하는 일이라는 뜻이다. 사회의 온갖 분야에서 자주 거론되는데 정작 찾아보기 어려운 희귀한 덕목으로 나는 공감, 즉 '역지사지'를 꼽겠다.
263쪽 그가 설명한 절대적 환대, 즉 공공성의 창출은 "타자의 영토에 유폐되어 자신의 존재를 부인당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치는 일, 그들을 인지하고 인정하는 일, 그들에게 '절대적'으로 자리를 주는 일, 무차별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사회 안에 빼앗길 수 없는 자리/장소를 마련해주는 일"이다. 그는 뒤르켐의 말을 인용하여 "공공성이 강화될수록 사생활의 자유는 오히려 커진다"라고 설명했다.
역지사지하는 마음을 기르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도 있다. 우선 토론을 통해 객관적 사고력을 길러야 한다. 길거리의 걸인을 보고 개인이 마음이 불편해서 도와주는 식의 구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법적, 제도적 장치가 구비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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