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들』 2021. 겨울호
문득 고개를 돌려보니 살구꽃이 환했다
봄날이 다 가도록 앞마당을 분주하게 오가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보니 뒷마당 가득 살구꽃이 환했다
방창한 봄날 그 환희의 함성들이
나도 없는 내 텅 빈 세월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무지와 오만의 세월이 뼈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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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들』 2021. 겨울호
숨
세상이 열리고
울음으로 첫 숨을 몰아쉬는 배후에는
바람이 있다.
드나드는 숨은
가늠할 수 없는 자유여서
헤아릴 수 없는 대자유여서
나의 것이 아니었다.
나를 드나드는 바람일 뿐이었다.
숨은
아무리 가두어 두려 해도
아무리 거부해도
제 멋대로 나를 드나들었다.
통제할 수 없는 이 바람 한 줄기가
내 목숨이었다.
세상을 끝내야 하는 어느 날도
내 뜻과 관계없이 이 숨에 달렸으니
이분에게 순종할 수밖에 없다.
내 안 깊숙이 들어와 휘돌며
세상의 기억 너머에 있는
존재의 상쾌함을 알게 한 것도
이분이었다.
나는 보이지 않는
이 숨 한 가닥에 놓여 있으니
보이지 않는 그 뜻에 따라야 했다.
살면서 필연처럼,
사는 동안 우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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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레시안』 기획연재 ‘시로 쓰는 민간인학살’ 원고
10.19 여순항쟁, 고운 꽃모가지 뚝뚝 떨어지던 서러운 세월
박 두 규(시인)
1
1945년 해방을 기뻐하지 말자
그것은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었을 뿐이다
일제에서 벗어나 단군의 조선, 삼일의 시절을 꿈꾸며
내 땅의 주인이 되는 세상을 원했건만
미제의 탐욕으로 한반도는 두 동강이 나고
너와 나, 서로의 가슴에 깊은 증오의 늪이 파이고 말았구나
하나의 하늘을 함께 바라보지 못하고
하나의 땅을 함께 걷지 못하니
미제의 반쪽 해방을 어찌 기쁨이라 할 수 있으랴
우리에게 아직 해방은 오지 않았다
그리고 진정한 해방을 위해 피를 흘렸던
1948년 4월과 10월을 마냥 슬퍼하지는 말자
그것은 다시 일통의 세상을 보기 위한 레퀴엠이었다
그 숱한 죽음들의 반쪽과 반쪽이 만나고
왼 날개와 오른 날개가 하나의 날갯짓으로 날아올라
이 땅의 서러운 마음들을 서로 곱게 품어 줄 수 있어야
그것이 바로 일통의 세상이니
그것이 바로 너와 내가 꿈꾸는 하나의 조국이니
그것을 향했던 1948년 10월의 여수와 순천
그 역사의 항쟁 속에 학살된 숱한 죽음들을
어찌 슬프고 헛되다고만 할 수 있으랴
2
해방이 되었으나 해방된 나라가 아니었다
일제보다 더 모진 순사 나리들의 세상이었고
미제의 권력 아래 양곡의 수탈은 여전히 심했다
더구나 하나의 조국에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서고
38선으로 나라가 나뉜다니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막기 위해 제주 4.3이 일어났고
그들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없어 여수 14연대 군인들은
동족상잔 결사반대, 미군 즉시 철퇴를 외치며 봉기하였다
1948년 10월19일 봉기 이후 9일 동안
이념도 사상도 없는 양민들은 아수라 지옥에 빠졌다
14연대 군인들의 주력 봉기군이 지리산으로 빠져나간 뒤
전국에서 내려온 이승만 정부의 토벌대가 꾸려지면서
여수와 순천, 주변의 벌교 보성 고흥 구례 광양 등지에서
무자비한 민간인 학살이 시작되었다
좌우를 구별하는 손가락은 총이 되어 집단학살이 시작되었다
만성리 구랑실 애기섬 신전마을 간문천 형제묘 백월마을 항쟁탑 백비......
소명도 없이 죽어간 죄 없는 원혼들이 떠도는 곳
독립운동을 한 사회주의자 할아버지 때문에 죽고
지까다비 신발 하나 사다주었다고 죽고
어머니와 아버지 서로 뺨치기를 시키고 그러다 죽고
나는 죄가 없응께 괜찮다며 나갔다가 죽고
14살 반란군 연락병으로 총상을 입은 어린아이
마을 사람들이 옷도 빨아주고 홍시도 주고 밥 먹여주었는데
그 아이의 손가락 총에 마을 사람 22명이 죽고
마을 전체를 불 지르는데 소는 끌어내고 사람만 죽고
엄마 등에 업힌 채 3살 난 아기도 죽고
반란군이 탄 기차를 운행했던 철도기관사도 죽고
입산자가 있는 마을은 불타고 40여명이 트럭에 실려가 죽고
아침마다 사람 하나 죽이고 해장 했다는 지서장과
11구를 들쳐 내고 아들의 시신을 수습했다는 노인네
그렇게 죽고 죽고 죽고 또 죽고 또 또 죽고 무더기로 죽고
그렇게 억울하게 죽은 자들은 아무런 이유 없이 빨갱이가 되었고
그 어린 자식 또한 아무런 이유 없이 빨갱이 새끼가 되어
연좌제의 덫에 걸린 죄인으로 한 평생을 늙어온 사람들
좌절과 절망의 세월 속에 한 평생 숨어 살다가
흰머리에 고부라진 허리가 되어서야 비로소
말할 수 있는 세월을 맞아 슬픔을 슬픔으로 통곡할 수 있었다
3
여순항쟁에 희생된 혼령들이시여
맑고 고운 하늘, 이 눈부신 날에 그대들의 넋을 불러봅니다
그때의 당신보다 많은 나이의 노인네가 되어 그대들을 불러봅니다
젊고 아름다웠던 내 아버지, 내 어머니시여
당신을 잃고 의지할 곳도 없이 하루 세끼 밥을 찾아
눈물로 세상을 떠돌던 서러운 세월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이제야 겨우 여순특별법이 만들어져
억울함과 분노의 오랜 세월을 헤매온 넋들을 불러봅니다
천길 나락 어둠을 떠돌던 내 아버지 어머니 그 서러운 넋들이여
이제는 맺힌 원한 깨끗이 씻어내소서
1948년 10월, 여수 밤바다에 울려 퍼진 총소리와 함께 시작된
반인권, 반생명, 비민주의 세월은 고스란히 우리의 몫이니
그대들의 서러운 세월은 이제 모두 잊어버리소서
역사의 진실을 바로잡는 일도, 좌우대립의 갈등을 극복하는 일도
다 이 못난 자식들의 몫이옵니다
희생된 여순의 넋이여, 항쟁의 영령들이시여
진실은 진실을 믿는 자에게 있으니 우리에게 있으며
화해는 화해를 하려는 자로부터 시작하니 그것도 우리에게 있습니다
용서받을 자보다 용서하는 자의 마음이 평화로우니
그 용서도 우리에게 있습니다
젊고 아름다웠던 내 아버지, 내 어머니시여
이제 모두 잊고 편히 쉬소서
아직껏 진상규명도 끝내지 못한 못난 자식이지만
이 땅을 사는 우리들 몸에는 아직도 저 오동도의 동백처럼
붉은 꽃잎 뜨거운 꽃들이 해마다 피어납니다
당신을 향한 우리의 마음입니다
1948년 10월 19일 이후 이 땅에 고스란히 갇혀있는
도심과 골짜기 곳곳의 총성과 비명소리
그 동백꽃 붉은 세월은 우리의 가슴 속에 그대로 있습니다
고운 꽃모가지 뚝뚝 떨어지던 서러운 세월
그 억울한 넋들과 빛나는 항쟁의 혼령들이시여
이제 우리가 그대들의 한 맺힌 오라와 차꼬를 풀어드리겠습니다
칠십여 년 닫혀있던 10.19의 빗장을 열어
맑고 푸른 하늘을 훨훨 날아오르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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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 광장신문 신년시
21C, 이 인류세人類世의 사랑은
박 두 규(시인)
검은 호랑이 등에 업혀
새로운 우주가 솟아올랐다.
21C, 위기의 절정에서 피어나는
이 인류세人類世의 사랑은
보이지 않는 내가
보이지 않는 너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려보지 않았던 참혹한 우리의 세상을
스스로의 손바닥에 올려놓고 가여워하는 것이다.
북극의 작은 곰과 남극의 십자성
그 자전축自轉軸 어디쯤의 별이 되어
깊은 고요로 빛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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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경소리』 2022. 1.
별을 바라보는 날이 많아졌다
밤이면 별을 올려다보는 날이 많아졌다.
세상의 크고 작은 슬픔들이 올라가 자리 잡은 것들
내 오랜 슬픔은 어디쯤에서 빛나고 있을까.
북두칠성은 산 아래 숨어 기척도 없는데
은빛 윤슬 반짝이는 강가로 바람이 일고
나는 홀로 그대를 탐문하며 별빛 사이를 흐른다.
어둠 너머 고요 속 그대를 좇아가노라면
분노의 세상, 탐욕의 세월도 잊고
지독한 내 어리석음의 늪을 벗어날 수 있을까.
그렇게 깊은 밤 텅 빈 시간 속
별을 바라보는 그대와의 하얀 밤이 있어
허튼 약속 하나 없이 이 강을 건널 수 있으리.
안개 피어오르는 강가를 걸으며
이승의 세월 켜켜이 쌓인 오래된 부고訃告를
모두 강물에 띄워 보냈다.
더는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다는 듯
강물은 두텁나루숲을 휘돌아 흐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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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 눈부시게 흐르는 강물을 보았지
어둠 속 눈부시게 흐르는 강물을 보았지. 강둑에 앉아 지상의 마지막 빛들이 어떻게 사라지는 지를. 먼 산의 노을마저 어둠에 묻히고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들이 사무쳐오는 시간, 이 어둠 속 깊은 궁륭의 끝으로 사라진 이들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한 떼의 새들은 달빛에 일렁이는 잔물결을 거슬러 오르고 나는 풀숲을 거닐며 오래된 길 하나를 보았지. 사라짐도 슬픔도 아름다운 길. 그토록 사는 일이 속절없는 것은 사람들은 길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 길을 가고 계절이 바뀌면 그 길가에도 꽃들이 하나 둘 피어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