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하늘나라를 여는 열쇠
그런데 니코데모의 영적 호기심과 내적 불안감을 향해 예수님께서 아주 간단하면서도 의미 깊은 한마디를 던지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3,3)
이것은 언뜻 듣기에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엄청난 말씀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진실로 진실로’라고 거듭 말씀하시는 경우는 굉장히 중요한 것을 강조하실 때 사용하시는 표현법입니다.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근본적이고 특별하신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사람이 다시 태어나다’라는 말씀을 깨달으면 하느님 나라를 보게 되고, 깨닫지 못하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있는 열쇠는 ‘다시 태어남’이라고 강조하십니다. 인생에서 믿음의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너는 다시 태어났느냐?’고 물으십니다. 세상살이에 익숙한 니코데모에게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보편적으로 두 가지 세상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과 ‘저 세상’입니다. ‘땅의 세상’과 ‘하늘의 세상’을 말합니다. ‘땅의 나라’가 있고, ‘하느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해 익숙하게 삽니다. 그래서 저 세상에 대해서는 공연히 불안해합니다. 그것은 저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이 세상 말고 저 세상에 대해 알고 있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니코데모는 저 세상에 대해 알 수 없기 때문에 불안한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불안은 삶에 있지 않고 죽음에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저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면 막연히 공포감을 갖습니다. 따라서 몸이 좀 많이 아프다 싶으면 죽음에 대한 신호로 알고 어쩔 줄 몰라 합니다. 죽음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저 세상에 대한 공포가 날로 심화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죽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도 믿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지금 동식물과 다를 바 없는 존재입니다. 천국도 영원도 없고 현재 삶만 있다면 굳이 도덕적, 윤리적으로 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저 세상을 부인하고 나면 왜 갑자기 불안해지는 걸까요? 또한 왜 사람의 마음에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을까요? ‘영생’이 없다면 ‘영생’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사람이 ‘영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영생’이 있다는 방증입니다. ‘지옥’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도 ‘지옥’이 있다는 방증입니다. 누구를 사랑하든 사랑하지 않든 ‘사랑’은 실재하는 것입니다. 누구를 미워하든 미워하지 않든 ‘미움’은 실재입니다. 사람은 죽음을 겪지 않으면서도 죽음에 대해 괴로워하며 몸부림칩니다. 만약 우리가 동식물이라면 죽음에 대해 괴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인간이고 하느님을 의식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죽음 후에 존재하는 세계에 대해 알지 못해 괴로워합니다. 영원으로 들어가는 문을 알지 못해 방황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현실의 삶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죽어서 바로 천국이든, 연옥을 거쳐 천국에 들어가든, 지옥이든 둘 중에 한 곳에 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첫댓글 아멘.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