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단지 울 안 생활을 한 지 벌써 일 년 반을 훌쩍 넘겼다.
작년 초부터 시작한 감기가 여름까지 안 떨어졌었다. 의원과 약국 문턱에 불을 달구다시피 했는데, ‘어럽쇼’ 다음에 신장에 이상이 생겨 ‘스텐트’라는 시술을 두 번 받았다. 감기는 지독한 목감기였는데 그 후로 목청에 이상이 생겼다. 작년, 올해 네댓 군데 방송국에서 펼친 트로트 오디션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고장 난 목 때문에 유행이 된 노래들을 따라 부를 수도 없게 되었다. 신체 한 군데가 떨어져 나간 듯이 아쉽다. 하지만 그 대신 아직은 전 세계적인 괴질에 걸리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왕년에 군대에서 써먹던 무단이탈을 몇 번 했다. 그런데 처자 합동으로 성명서를 발표했다. 내 나이가 많아 저항력이 약하니 동네 울 안에서만 일상을 보내라는 강권적 성명서다. 때문에 좋아하는 당구장에도 갈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단지 내 공터에 피는 꽃들을 사진 찍는 게 취미라고나 할까….
내친김에 이름을 아는 여 동인들 이름에도 꽃 자를 붙였다. 이름 첫 자나 끝 자에도 꽃 자를 달고 보니 여자들 세계가 얼마나 아름다운 건지 알았다.
그래도 남아도는 시간은 많다. 단지 울타리 안에 놓인 긴 의자에 앉아 쉰다. 아니, 반려‘견’님에게 끌려 나와 비닐봉지를 주먹에 쥐고 따라가는 사람들 구경도 한다. 그리고 잎이 다 떨어진 대나무 숲을 훑고 지나가는 매미가 내는 바람 소리도 듣는다. 햇빛이 좋은 날은 모자와 안경까지 벗고 해바라기를 한다. 주로 오후 두세 시경, 해바라기꽃들도 서쪽에서 동쪽으로 얼굴을 소리 없이 돌릴 때다.
나는 눈을 감고 해를 마주한다. 강렬한 열기가 얼굴에서 온몸으로 번져 일광욕 효력을 얻는다. 눈을 꼬옥 감고 해를 바라본다. 하늘은 아주 두터운 진홍색이다. 참으로 정열적이다. 눈꺼풀에 힘을 빼본다. 진홍색이 주홍색으로 변한다. 눈꺼풀을 다 열면 하늘색은 비로소 본색으로 돌아온다. 하늘은 역시 눈을 뜨고 보아야 경이롭다.
그렇게 하늘색을 체험하고 나면 으레껏 느끼는 것은 내 인생이다. 어머니가 하늘 문을 열고 나를 세상 밖으로 내보냈을 때는 온통 붉은색이었을 거다. 그런 몸뚱이가 자라면서 시간의 색깔도 변했을 거고, 세상 풍파가 붉은색이라고 치면 그 붉은색을 엷은 색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은 피땀을 흘리지 않고는 그냥 견디지 못했을 터이다. 따라서 인생 물줄기는 어느덧 불혹이니, 지천명이니 하는 언덕을 넘게 되었고, 그때부터 급물살을 탄 나의 인생 배는 어느덧 고희라는 강을 건너 팔십칠이라는 도표 위에 떠 있다. 나머지 항로는 안개에 가려 잘 짐작할 수조차 없다.
이제는 내 인생 배가 마지막 닻을 내릴 시점을 나도 모른다. 다만 내일모레면 구십이라는 그래픽을 그려볼 뿐….
그러나저러나 서운해서 어쩌나. 3백 종이 넘는 꽃들과 이별을 해야 하고, 가지런히 줄선 회향나무 길을 그만 걸어야 하고 편히 앉아 일광욕을 하던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게 될 테니.
무엇보다도 아까운 건 많은 책을 버리고 가는 것이다. 그 책들 중에는 하늘로 가신 한씨 일가(一家)님이 택배로 보내준 책들을 얼마 읽지도 못한 채 남기고 가게 된 거다. 이 동네 살아온 지 십구 년 만에 우이동 솔밭공원 뒤로 이사를 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23집 동인지 수록
※ 준빠님이 동인지에 참여하기 위해 애쓰셨던 기억. 컴이 안 좋아 글을 보낼 방법이 없어 애태우시다 어찌 어찌 전달 이 되어 마침내 지면에서 느낌있는 작품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첫댓글 희꽃님,허술한 작품을 게시하셨네요. 다시 읽어 보니 모자란 데가 꽤 많은데.
하지만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난 거니 어히하리오 ㅎㅎㅎ
우리 모두 허술하지요. 그래서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