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복 선언의 성격
행복 선언은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필수조건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행복 선언을 지켜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하느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그 신원에 맞갖게 살아가고 예수님의 성품을 닮도록 행복 선언을 주셨습니다.
학자들은 한결같이 행복 선언에 예수님의 모습이 들어가 있다고 말합니다. 마이어John Meier는 행복 선언이 ‘주님의 완벽한 자화상’이라고 합니다. 행복 선언 “행복하여라, …한 사람들”에서 …부분은 예수님의 자신의 모습을 가리킵니다. 그분께서는 마음이 가난하고, 깨끗하고, 온유하고, 슬퍼하며, 평화를 위해 수고하고, 박해를 받는 분이십니다.
인류 역사에서 참된 복을 완벽하게 누린 사람이 실제로 있을까요?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행복 선언을 설교하신 예수님이야말로 참으로 복된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성품을 닮아서 하느님 나라에 헌신하기를 바라십니다. 이 성화의 과정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인도하심과 우리 의지의 협력으로 이루어집니다.
흔히 사람들은 인간의 기질이나 성격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품은 우리의 천성적인 기질이나 성격과는 다릅니다. 성품은 개발되는 것입니다. 성품은 그리스어로 ‘도키메’인데, 단련이나 시험을 거쳐서 형성된 자질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을 보면, 이 단어가 ‘수양’(로마,5,4), ‘시험’(2코린 2,9; 야고 1,3), ‘시련’(2코린 8,2)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경험하는 것들을 도구로 삼아 우리 안에 주님의 성품을 형성시킬 수 있습니다. 교부 암브로시오는 이렇게 권합니다.
운동선수가 경기에 자기 이름을 올려놓고 빈둥거릴 수 있겠는가. 아니다. 날마다 훈련을 한다. 음식도 가려 먹으며 훈련한다. 절제의 삶을 살면서 훈련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경기에 이름을 올려놓은 존재들이다. 우리가 참가하는 경기에서 받을 상은 월계관이다. 그러니 연습하고 훈련하라.
인간의 기질이나 성격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말에 개인적으로 동감하지만 절대적으로 동감하지는 않습니다. 내가 다른 누구의 기질이나 성격을 바꿀 수 없다는 점에서 동감하지만, 주님 말씀 앞에 정직하고 관대하고 열린 마음을 갖고 있다면 기질과 성격도 바뀔 수 있습니다. 말씀의 능력으로 안 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 55,10-11)
우리는 이 본문을, 하느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능력의 말씀이기에 헛되이 사라지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이룬다는 의미로 알아듣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말씀을 읽어야만 그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정녕 너희는 기뻐하며 떠나고 평화로이 인도되리라. 산과 언덕들은 너희 앞에서 기뻐 소리치고 들의 나무들은 모두 손뼉을 치리라. 가시덤불 대신 방백나무가 올라오고 쐐기풀 대신 도금양나무가 올라오리라. 이 일은 주님께 영예가 되고 결코 끊어지지 않는 영원한 표징이 되리라.(이사 55,12-13)
잠시 상상해 보십시오. 정원에 가시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그 위에 비와 눈이 내리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가시나무가 무성하게 자랄 것입니다. 또 마당에 있는 쐐기풀에 비와 눈이 내려도 마찬가지로 크게 자랄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비가 내리면 가시덤불 대신 방백나무가 올라오듯이, 그분 능력의 말씀이 우리에게 내리면, 우리의 기질과 성격이 주님께서 바라시는 방향으로 변화하지 않을까요?
성경 말씀은 그 말씀을 받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그의 성격과 기질과 성품을 하느님의 사람답게 바꾸어 놓습니다. 그렇기에 바오로가 티모테오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사람이 온갖 선행을 할 능력을 갖춘 유능한 사람이 되게 해 줍니다.(2티모 3,16-17)
우리가 정직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는다면, 그리고 그 말씀의 능력 앞에 자신을 내어 맡긴다면 우리의 성격과 기질, 성품은 바뀌게 됩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이 베푸는 사람이 되고, 겁이 많은 사람이 용기를 갖고, 인내심 없는 사람이 인내심을 갖습니다. 배려를 모르는 사람이 배려를 하고, 화를 잘 내는 사람이 온유해지고, 불평을 일삼는 사람이 감사하는 사람으로 바뀌게 됩니다. 또한 부정적인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성경은 단순히 종이 위에 박힌 활자가 아닙니다. 성경은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 생명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로워,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놓고, 그 마음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히브 4,12-13 참조) 그렇기에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자리는 우리가 그분을 닮아가는 자리입니다.
교부 크리소스토모를 비롯한 가톨릭 신학자들에 따르면, 행복 선언은 우리가 완덕에 도달하기 위해서 올라야 하는 영적 사다리입니다. 완덕(完德)이란 도덕적으로 완벽한 존재가 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완덕이란 주님과의 완전한 일치, 사랑의 합일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행복 선언의 영적 사다리를 올라가는 것은 궁극적으로 주님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음악이 팔음계의 응용이듯이, 주님의 성품을 알려주는 이 여덟 가지 덕도 우리 안에 형성되어야 합니다. 이 여덟 개의 사다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기에 건너뛰어 올라갈 수 없습니다. 행복 선언의 여덟 가지 덕은 우리 안에서 따로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해바라기는 언제나 태양만을 바라보고, 해의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해바라기라고 부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집중하고 그분을 사랑하며 그분과 일치하려고 할 때, 우리는 어느새 그분을 닮습니다. 그분의 성품은 우리 말과 생각과 행동에 형성되는 것입니다.
교회 전승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행복 선언을 가르치신 장소는 카파르나움 서쪽에 있는 타브가란 마을 뒤편에 있는 산등성이입니다. 오늘날 그곳에 ‘참행복 선언 기념 성당’이 여덟 개의 참된 복을 상징하는 팔각형 모양ㅇ로 세워져 있습니다. 이 성당에서 남쪽으로 갈릴래아 호수와 주변 경관을 바라볼 수 있는데, 이곳에 서면 절로 마음의 고요와 평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푸른 하늘과 호수, 하얀 구름을 배경 삼아 야트막한 산등성이에 앉아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따스하고 친절한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나도 그 자리에 앉아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그분의 가르침을 듣고 있다고 생각하며 묵상해 보십시오.
첫댓글 아멘. 아멘. 아멘.~~
"성경은 단순히 종이 위에 박힌 활자가 아닙니다.
성경은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 생명의 말씀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샘을 가려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께 우리는 샘을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히브 4,12-13)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