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씰
최유나
학창 시절, 12월이 되면 나는 늘 크리스마스 씰을 구입했다. 크리스마스 씰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2학년 즈음이었던 것 같다. 담임 선생님은 크리스마스 씰을 안내한 후, 구입하고 싶은 사람은 자신에게 말을 해 달라고 했다.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 크리스마스 씰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자, 엄마는 말했다.
“유나야. 크리스마스 씰은 무조건 사야 해. 사겠다고 선생님께 꼭 말씀드려.”
나는 엄마의 단호한 말투에 조금 놀랐다.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말투가 기억날 정도이니 말이다. ‘왜 무조건 사야하는지’ 엄마에게 묻지 않았다. 어린 마음에도 당연한 이유가 있겠거니 생각할 뿐이었다. 그리고 다음 해부터는 크리스마스 씰을 사겠다고 누구보다 가장 먼저 선생님께 말했다.
‘무조건’이란 말에 숨어있는 뜻을 알게 된 건 20대가 되고 나서였다. 엄마는 가까운 사람들이 결핵 앓는 모습을 유년기부터 봐 왔던 것이다. 어린 엄마는 외할머니와 엄마가 결핵약 먹는 것을 보며 자랐고, 젊은 시절에는 자신과 남편 또한 결핵약을 먹었던 것 때문에 그 질병을 자신에게 스며있는 슬픈 운명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옛 예술가들의 사인(死因)으로 흔하게 등장하는 것이 결핵이지만, 섬세했던 엄마는 당시 사회적 배경을 자신의 삶에 대입시키지 못했던 것 같다. 엄마의 개인적 역사를 알게 되자, 엄마가 왜 ‘무조건’ 이라는 말을 붙이며 크리스마스 씰을 사라고 했는지 비로소 이해되었다.
나와는 상관없을 것 같았던 결핵은 어느 날 내 삶에도 불현듯 들어왔다. 일본 유학 시절 몸살 기운이 있는 듯하여, 학교 내 보건소에 갔을 때였다. 의사는 몇 주 전 유학생 대상 건강검진 때 찍은 내 폐의 엑스레이 사진을 갑자기 들여다보며 말했다. 폐에 아주 미세한 흔적이 있는데, 결핵이 의심되니 큰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보는 것이 좋겠다고 말이다. 나는 증상이 없었고, 학교에 제출하기 위해 출국하기 직전 한국에서 받은 투베르쿨린 검사결과도 정상이었다. 그런데 유학 생활을 시작하자마자 이런 소리를 듣다니, 앞으로 어떻게 외국 생활을 해야할 지 막막했다. 불안해하는 나에게 일본 의사는 친절히 말했다. 아닐 수도 있으니 너무 걱정은 말고, 설사 결핵이라 하더라도 약을 먹으면 금방 나으니 괜찮다며 말이다. 의사는 신주쿠에 있다는 종합병원의 약도까지 꼼꼼히 그려주며 나를 달랬다.
종합병원에서의 검사 결과, 결핵이 맞다고 했다. 다행히 증상이 없는 잠복결핵이었지만 치료는 받아야 하는 것 같았다. 이런 상황을 한국의 엄마에게 전하자 엄마는 한국에 들어와서 다시 검사를 받자고 말했다. 그리고는 내게 미안해했다. 내가 일본으로 떠나기 몇 년 전, 아버지는 기흉까지 동반된 심한 결핵을 앓았고, 아버지에게 옮았는지 엄마 역시 치료를 받았기 때문이다. 젊은 나는 그것을 피해갈 줄 알았는데, 같은 집에서 생활하는 가족 사이에서는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부모님을 진료해왔던 한국의 의사는 내 엑스레이 사진을 보더니, 너무나 미세한 흔적이라 폐가 원래 이렇게 생긴 건지 결핵으로 인한 건지 지금으로서 확정을 짓기에 조심스럽다고 말했다. 다만 6개월마다 추적검사를 하면서 상황을 지켜보자고 했다. 그 후 나는 방학 때마다 한국에서 검사를 받았고 폐의 그 흔적은 더 진행되지도, 없어지지도 않았다.
몇 달 뒤, 그날도 정기검사 결과를 듣기 위해 의사를 만났다. 그는 전과 다르게 빙그레 웃으면서 내 폐에 있었던 흔적이 사라졌고, 그것을 보니 결핵이 맞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치료없이도 몸이 결핵을 이겨냈으나, 병균이 몸 안에 남았을 수도 있으니 약은 먹는 게 좋겠다고 했다. 폐 상태가 좋아진 것과 상관없이 6개월이나 약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은 나를 다시 혼란스럽게 했다. 의사는 그런 나를 위로하며 다행히 결핵약은 나라에서 지원을 해주니 한 달에 약값으로 몇천 원 채 들지 않을 것이고,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지 않냐며 말을 덧붙였다.
맞는 말이었다. 당시의 나는 투병에 필요한 돈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그 몇 달 사이에 엄마는 암환자가 되었고, 엄마 간병을 위해 나는 일본 유학을 접고 귀국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수술과 항암치료를 위한 병원비는 기본이 몇백만 원이었다. 그것에 비하면 결핵약의 저렴한 금액은, 분명 고마운 것이었다.
약을 먹는 것은 쉽지 않았다. 시간을 놓치지 않고 먹는 것도 신경 쓰이는 일이었지만 약을 먹고 나면 노곤하게 온몸의 근육이 풀리면서 피로감이 몰아쳤다. 다행히 6개월 간의 투약기간을 잘 마쳤고, 의사는 기뻐하며 더 이상 정기검진을 받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렇게 결핵이란 단어를 잊고 지낸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러 작년 겨울,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인 ‘펭수’가 크리스마스 씰의 모델로 등장한다는 뉴스를 들었다. 역시 교육방송인 EBS의 캐릭터는 남다르다는 생각을 하며, 펭수가 그려진 크리스마스 씰과 기념품들을 여러 개 주문했다. 내가 몇 년 전 마음 편히 결핵 치료를 받았다는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펭수 크리스마스 씰이 도착하자, 그 동안의 크리스마스 씰을 모아둔 스크랩북을 펼쳐보았다. 그리고 한쪽에 펭수 크리스마스 씰도 잘 꽂아두었다. 내가 갖고 있는 가장 오래된 크리스마스 씰은 1988년에 발행된 것이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 산 2020년의 크리스마스 씰. 엄마는 결핵을 자신의 괴로운 운명으로 생각했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그 경험 덕분에 질병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것이며, 사회적인 보호와 지원이 환자에게 얼마나 고맙고 소중한지를 직접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배려를 누린 자이다.
올해도 12월이면 크리스마스 씰이 판매될 것이고, 나는 크리스마스 씰을 기꺼이 구입할 것이다. 그래서 내가 받았던 사랑을 다른 누군가에게 전하는 소소한 기쁨을 이번에도 누리고 싶다. 그것은 같은 세상을 함께 살고 있는 이들에 대한 당연한 관심이자 사랑이다.
<2021년 에세이문학작가회 제23집 '새끼님들께 고함' 수록>
첫댓글 부끄럽습니다만, 이복희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제 졸작 '크리스마스 씰' 올립니다. 풍요로운 성탄과 연말 보내시면 좋겠습니다. ^^
이제 겨우 4부, 송은자님의 <아직 꿈을 꿔도 될까>를 완독 했는데 380쪽 작품이 이렇게 일찍 등장했네요.
대부분 성인은 매해 이때 즈음에는 크리스마스 씰을 떠올리게 될 터입니다.
최유나님 명작 잘 읽어 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