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동작동 국립현충원을
다녀왔었습니다.
12.12군사반란때
반란군에 맞서던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지키다
신군부 반란군의 난사에 전사한
김오랑 중령님 묘역과 . .
이어서 12.12 당시
특전사령관이셨던
한많은 정병주 특전사령관님
묘역을 방문했었죠.
김오랑 중령님 묘역에 올라가기 전에
현충원 안에서 꽃을 사갔는데...
마침 김 중령님 묘역을 방문하려던
평화재향군인회 회원분들을
만났습니다.
같이 올라가자해서 같이 갔었죠.
아직도 정병주 장군님의 묘는 백비이더군요.
동영상자신을 배신한 부하를 차마 쏘지못하고 보내주는 특전사령관 정병주자신을 배신한 부하를 차마 쏘지못하고 보내주는 특전사령관 정병주 Subscribe & More Videos: https://goo.gl/5gUDwf Thank for watching, Please Like Share And SUBSCRIBE!!! #, #www.youtube.com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정병주 장군을
배신한 3공수여단장 최세창이.
최세창은 그후 승승장구하며
노태우 정권에서 국방장관까지
합니다.
최세창은 비록 독립운동가 후손이지만
호부견자이죠. 하나회에 가입하고 전두환
똘마니를 하였고 군사반란에 동참해 상관을
살해하려 했고 상관의 부관이자 후배장교를
살해했으니까요.
드물지만 독립운동가 후손이라고
100% 선하지는 않죠.
조상 욕되게 한 놈.
그리고 추도의 자리에서
그 자리에서
평화재향군인회 상임공동대표인
최사묵 선생을 만나뵈었습니다.
최사묵 선생은 항일의병장 최구현 선생의
손자이시더군요.
제가 그 자리에서 듣기로는
의병장 최구현 선생은
면암 최익현의 동생이라고 하시더군요.
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의병장을
한 한국사를 공부 제대로 하셨으면
다 아는 면암 최익현 선생.
최구현 선생이 면암 최익현 선생의
동생이신지 사촌이신지는 모르겠으나
(현 자 돌림이니 짐작은 되지만)
최구현 선생을 이번
기회에 검색해서 찾아봤습니다.
선생의 자는 인성이요, 호는 유곡이시다.
선생은 동치 병인년(1866년)에
면천군 매염리에서 출생하여
광서 정해년(1887년)에
무과급제하고,
이듬해 무자년(1888년)에
훈련원 봉사로 벼슬길에 들었다.
광무 8년(1904년)에 이르러
왜가 한일의정서를 핑게 삼아
국정을 압박하여 국운이
가망이 없었다.
이에 선생은 국정을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고 군부참서관
벼슬을 사임하였다.
그러나 을사늑약(1905년)을
당하자 의기를 참을 수 없어
병오년(1906년) 봄에
기지시(당진군 송산면)에
창의도소를 열고
창의문을 널리 써 붙였더니
면천, 당진, 고덕, 천의,
여미에서 의병이
370명이 달려왔다.
여기에서 선생은 창의영도장으로
추대되어 의병을 통솔하고
연달아 15일 동안 의병이
나온 고을을 돌며
위세를 드날리며
행군을 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왜를 쳐부숴야
한다는 의분을 불러
일으켰다.
선생은 4월17일 초저녁
면천성을 공격하였으나
관군과 왜의 수비대가
맹렬히 되받아 쏠 뿐만
아니라 왜의 신식 총포의
위력이 더 없이 강해서 의병의
창과 칼과 화승총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동이 트는 새벽에
총탄이 비오 듯 하는 속에서
죽고 다친 의병을 들것에 싣고
부축하고 눈물을 삼키며
의병을 해산할 때,
선생은 죽기를 한하고
왜놈과싸워야한다는
의병 36명을 거느리고
밤에만 행군하여
4월23일 난지도에 당도하니
그곳에는 이미 당진 의병과
화성 의병장 홍일초 창의장 군사
등 40여명이
와서 웅거하고있었다.
이어 윤 4월5일 관군에게
쫓기는 서산의병 참모 김태순
일진 28명이 합류하고,
윤 4월16일 홍주성에서 패한
차상길의병 등 일진 15명이 도착하니
의병이 모두 120여명이 되었다.
이에 왜를 멸망시킬 싸움을
지속시키기 위하여 간도로
향한 항해를 준비할 때,
7월5일 새벽 관군과
왜 수비대 200~300명이
나무 실은 배로 위장한 세 척의 배로
기습하여 선생은 잡혀서 면천 감옥에
갇히고, 왜 수비대의 악귀 같은
고문으로 선생이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동지달에 선생의 전답 30결을
면천 아문에 몰수 당하고
수레에 실려 출옥하였으나
선생은 소생치 못하시고
결국 섣달(12월)23일 축시
(새벽 1~3시)에 운명하시니
13세 된 아들 치영이가
숱모루 언덕에 초빈하였다가
이듬해 정미년(1907년)
10윌20일 면천 고잔리
선영 곁에 장사지냈다.
면천창의군 막하군사 삼가 적음.
항일의병대장 유곡 최구현 선생 약력
1866년 고종 3년
(동치 병인년) 출생
(병인양요, 프랑스군강화도 점령)
1895년 명성황후 시해.
1887년 고종 24년
(광서 정해년) 22살,
무과에 급제하시어
훈련원 봉사로 근무.
1904년 고종 41년
(광무 8년 갑진년)
한일의정서, 39세.
군부참서관 사직.
(갑오개혁, 김홍집 내각,
동학농민전쟁 우금치
전투 3만명 전사)
1905년 고종 42년
(을사늑약 / 을사조약), 40세.
(최익현 선생 의병일으킴)
1906년
고종 43년(병오년) 41세,
음력 3월 경
의병을 일으키시고
의병장으로 추대.
1906년 음력 4월17일,
의병 370명으로 면천성 공격.
1906년 음력 4월23일,
죽기를 각오한 의병 36명과
소난지도에 가시어 당진의병,
화성의병 홍일초의병장 등
40여 명과 합류.
1906년 음력 윤 4월5일,
서산의병참모 김태순외
28명과 합류.
1906년 음력 윤 4월16일,
홍주의병 차상길외 15명과 합류.
의병 총 인원 120여 명이
되어서 북간도로 가셔서
투쟁을 계속하려 계획.
1906년 음력 7월5일
인시(새벽 3~5시) 관군과
왜 수비대 200~300명이
땔감 실은 배로 위장하고
기습하여 체포됨.
1906년 음력 11월 왜놈들의
악귀같은 고문을 당하시고
전답 30결을 빼앗기고
수레에 실려 출옥.
1906년 음력 11월 17일
최익현 의병장 대마도에서 순국.
1906년 음력
12월 23일 축시(새벽 1~3시)에
41살로 운명하시어 숯모루에 초빈.
큰아들 치영은 13살.
1907년 순종1년
(융희1년, 정미7조약,
제3차 한일협약) 음력
10월23일, 면천 고잔리
선영에 안장.
2003년 9월17일,
최구현 의병장 순국 후
97년 만에 묘지석 발견.
2004년 8월15일,
98년 만에 대한민국
정부에서 "건국훈장
애국장" 수여(노무현 대통령)
"다음 기회에 또 보세~"해서
인사드리고 명함을 받아왔습니다.
첫댓글 뜻있는 하루 나들이길에 더욱 뜻있는 만남을 가지셨군요.
네.정말 뜻깊은 하루였습니다.
참 군인을 기억하겠습니다.
정말 훌륭한 군인들이시죠.
대한민국 군인의 표상은 김오랑 중령.
정병주 장군같은 분들이 되셔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김오랑 중령의 기념비를
육군사관학교안에 제막하려 하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지만 아직도 남아있는
전두환 잔존세력들때문에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