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정의 절제와 치열한 삶의 행보(行步)
- 정한준 시집 「청-보리」, 그 형상화의 특이성
엄창섭(가톨릭관동대 명예교수, 「모던포엠」 주간)
1. 삶의 잠언(箴言)과 감성의 시학
안타깝게도 미래가 불투명한 절망의 시간대에서 그나마 주위의 누군가와 자잘한 일상의 안부를 물으며 따뜻한 감성의 헤아림은 더없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삶의 행위로 감성의 시학과도 맞물려 있다. 까닭에 창조하는 경건한 영혼 또한 ‘역동적인 생명감’이 넘쳐나기에「감정의 절제와 치열한 삶의 행보(行步)–정한준 시집「청보리」, 그 형상화의 특이성」을 전제한 서평에서, 따뜻한 감성을 눈부신 존재의 꽃으로 작열시키는 특정한 정신작업의 종사자가 암울한 현상에서 깊은 마음의 상처(trauma)로 고통받는 타자 간에 지혜로운 삶의 잠언으로 밝은 미래의 비전을 일깨워주는 행위는 더없이 뜻깊다.
그 같은 맥락에서 2012년『문학시대』로 등단하고 가장 의미 있는 시간대를 부산광역시의 공직에 머물렀던 정한준 시인이 틈틈이 시 짓기에 몰두하면서 근간에 출간하는 제3 시집 『청-보리』(모던포엠, 2024)는 따뜻한 정한(情恨)이 담채(淡彩)의 풍경화로 색조 대비되어 무딘 시혼을 흔들어 깨우는 신선한 매혹과 역동성으로 그 정체성이 빛난다. 특히 그 자신의 시적 경향과 특이성을 최창도 시인이 “고난의 삶과 억울한 노동 현장에 관한 아포리즘의 시 세계”로 검증하였듯, 시집의 서문 격(格)인 「시인의 말」에서 “다 쏟아버리고 수십 년 전에 써둔 글들을 버릴 수가 없어 함께 엮어보았습니다. 시대적 맥락이 맞지 않아도 그런 시절도 있었구나 하고 헤아려 주시길 바랍니다.”라는 겸허한 심상(心象)이 곁들인 ‘비움과 낮춤’은 충직한 독자의 공감을 불러주기에 결코 거부감이 주어지지 않는 분위기(情調)다. 모처럼 제3 시집의 편집 구도는 ‘각각 15편씩 5부로 나뉘어 균형감이 잇닿은 총 75편’은 결(結) 고운 옷감처럼 직조(織造)되고 있다.
또 한편 연작시 편인 <청-보리>는 음률의 묘미를 살려내려는 화자의 의도에서 <청-보리>로 일관성을 가늠케 할뿐더러 시적 작위(作爲)에 시차가 주어질 것이나 편의상 그 연계 층위에서 시적 모티프의 검색은 별개이다. 짐짓 평이한 직물 대상일지라도 ‘청(靑)보리’의 시각적 면에 견주어 ‘청(靑)-보리’에서 운율적 정감을 살려낸 공감각적 기법은 치밀한 시적 정감을 일깨워주기에 지극히 매혹적이다. 까닭에 <청-보리·1>은 인간의 지적인 측면을 절대시하고 관념이나 의지, 지성의 이미지화에서 그 자신의 의지가 강조된 현대시의 양상인 점에 비춰 사상성을 배제한 순수의 정감과 아름다움을 형상화한 <청-보리·2>의 대조적 분위기는 묵언의 응시로 감응할 바다.
줄줄이 엎드린 모습에도 웬 떡이 보여/쾌재 짓는 산유국 유가는 물가를 잡아당겨/지구촌 만백성은 슬픈 시름을 토해낸다/
아, 괴롭고 괴로운 이 전란 언제 끝나려나//
-<청-보리·1>에서
매서운 삭풍 파고드는 들녘에/푸르디푸른 네 모습 어이해 나부끼나/밟고 밟아도 어찌타 한들한들/누르고 밟을수록 푸른
기를 세우는/말 못 할 어느 뉘 기막힌 하소 더냐/하늬바람 맞으며 알알이 여문 사랑/아낌없이 안겨주는 보리야 청-보리야//
-<청-보리·2>에서
위에 인용한 시편에서 시 의미의 다양성과 그 양상(樣相)은 분할·통합될 것이나 그 자신이 ‘흐르는 물가에 앉아’ 앉아 아득한 유년의 기억을 떠올리며 비교적 나직하고 짧은 호흡으로 읊어낸 “동심을 가득 실은 풀잎 쪽배/어딜 그리 바삐 가느냐(여울목에서)”와는 다소 거리감을 유지한 <지도자의 덕목>에 견주어 이와는 대조적으로 호흡이 길고 장중한 터치로 “해빙의 흔적 막지 못하고 노르덴스키울드 빙하는 겉옷은 다 벗겨지고 살 빠진 뼈대 사이로 쉴 새 없이 흐르는 저 서러운 눈물.(인류의 위기)”에서 지구 온난화와 전쟁으로 암울한 지구촌의 종말을 우려하는 심정은 참담하다.
특히 이 지상에서 사용되는 유일한 하늘나라의 언어인 ‘감사(感謝)’도 그렇지만 그 시어는 개념상 ‘천국의 문을 여는 열쇠이며 가장 강력한 항암제’로 인식하는 그 자신이기에 “불행의 늪에 한동안 깊이 빠졌어도/감당할 지혜를 주시어 감사드리오며//이 모든 감사는 고통의 텃밭에 핀/절실한 기도의 꽃이라 더욱 감사드립니다.(감사의 기도)”의 확고한 일념은 경건하다. 따라서 ‘1965년 가을’의 단상을 선명하게 떠올리며 ‘추정(秋情)에 취해 “길가에 떨어진 가을 은행잎/페이브먼트는 온통/노오란 물감으로 칠갑이다.(꽃보다 고운 잎)”라는 시적 형사는 그만의 차별성이기에 신선한 충격이다.
각론하고 무한경쟁으로 치닫는 비정한 시간대에서 ‘진정 가슴으로 울어주고, 아름답게 노래하리라.’라는 그 자신의 심성은 지순하기에 “소쩍새 울고 넘는 슬픈 기별도/흠모했던 비련의 체읍마저 끌어안고/삭이고 녹여,(미움도 고통도 가락으로 빚으리)”라는 과정을 거쳐 때로는 ‘수많은 날 안절부절에 짓눌려 왔을지라도’ “스스로 이들 된 형색 만들었느니/청-보리 아픈 자책 푸념이 설웁다(말 더듬 일생)”에서 지나쳐온 삶의 여적은 이처럼 한 반(半)은 서럽도록 뜨거운 눈물이 선명하게 묻어있다.
2. 감성적 응축과 의미론의 순환
삶의 일상에서 특정한 시인이 시대적 상황에 어떻게 대응하는가의 문제는 지대한 역사성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다. 까닭에 한 사람의 맑은 영혼의 소유자가 삶의 현장에서 체득한 자잘한 기억 흔적을 절제된 감정으로 정제한 시편들이 생명체로 빛나는 시적 작위(作爲)는 더없이 유의미하다. 모처럼 그 자신의 시적 다양성은 제2시집 『詩, 길을 내다』(모던포엠, 2021)에서 전형철 평론가가「역마직성(驛馬直星), 방랑의 詩 길 떠남의 시학, 삶의 근원을 캐기 위한 길 찾기」로 확증했듯 직물 대상인 질료와 상호연계성을 검증할 일이기에 호흡을 가다듬고 묵언으로 응시하여야 한다.
비록 ‘삶이 삶답고, 지난(至難)한 삶은 서러운 삶이 되리니’라는 그 자신의 기대감 뒤 “헝클어진 매듭을 기어코 풀어주고 싶은/진정 아픔을 보듬고 싶은 맘 절절하지만/아무리 용을 써도 한 주먹밖에 되지 않는/풀기 힘든 메마른 한 손의 검불이어라(生의 뒤안길)”의 일면도 그렇지만 ‘잎을 볼 수 없는 꽃의 운명’일지라도 “어느 뉘 이별의 넋이더냐/꽃인 내가 떨어져야 온다지만/우리는 내생에서 볼 수 있을까/더없이 아름다운 슬픈 꽃이여(꽃무릇 사연)”을 통해 새삼 확증되듯 지극한 자연회귀성(自然回歸性)에 맞물린 우리의 존재성을 ‘더없이 아름다운 슬픈 꽃’의 상징성으로 형사(形似)한 그 자신의 시적 행위는 놀랍게도 이처럼 처연한 심사다.
또 한편 정신작업의 종사자인 시인은 응당 세계고(世界苦)를 몸소 견뎌내고 세상의 틈새 또한 비집어야 한다. 까닭에 삶의 처소이고 뿌리인 가정을 중심으로 혈연의 소중함을 지극히 단조로운 호흡의 시격(詩格)으로 처리한 “하얀 비단이 깔렸어/모처럼 내려온 저 귀한 손님/곧 날아갈 것 같은 은빛 세상/도망가기 전에/벌떡 일어나 맘껏 젖어봐 어서(부산의 첫눈-2014년 딸에게)”를 통해서 따뜻한 부정(父情)은 이처럼 다정다감하여 순결한 영혼이기에, 그 자신의 지극선의 심성은 마침내 “우리는 다만 슬기와 노력으로/세상을 아름답고 조화롭게/만들어야 할 필연을 안고 산다.(이 또한 사랑이다)”의 일면에서 그 맥의 맞물림도 체득할 일이다. 그렇다. 때로는 홀로 사유하고 또 취하다 ‘필연을 안고 살아가야 하기’에 물아일체의 존재감은 탐색할 바다.
각론하고 그 자신의 내면의식에 점철된 순수서정과 정신풍경에는 아니마(anima)적인 평온함이 자리해 있어 풀꽃 향을 발산하는 체취에는 ‘안타까움이나 두려움’마저도 깨끗하게 정화를 시키는 생명 외경심이 선명하다. 까닭에 허망한 삶의 일상에서도 가끔은 ‘아스라한 옛 추억을 잡아당길지라도’ “바위섬에 갇혀 열병을 앓고/5일 장배 타고 집에 오던 날//짠한 마음 뒤돌아보며 차라리/그 고운 꽃자리에 잠들고 싶었나(동백꽃 섬처녀)”의 감회(感懷)는 감동을 회복시켜줄 것이다. 그와 같이 ‘연하고 푸르던 시절엔 새콤달콤한 맛에 길들었지만’ “이제 다 내려놓고 無心의 무심으로/세월이 우려낸 곰삭은 깊은 맛/오는 이 가는 이 다 드립시다/모두 죄다 아낌없이요(곰삭은 맛)”를 스스럼없이 헤아리고 가늠하는 일이 지혜로운 삶의 비법임을 수락한 그 자신이기에 감사의 일상화는 축복의 은총으로 다함 없음에 자못 감동의 느낌표(!)다.
차제에 허드슨(W.H.Hudson)이 “시는 상상과 감정을 통한 인생의 해석임”을 지적하였듯 그의 시편에서 특이한 시적 감응이라면, 시집의 제3부「인류의 위기」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참사나 중동전쟁의 위기상황을 심히 우려한 끝에 절박한 심정으로 “폭풍우 지나간 듯 잠잠하여라/불꽃 튀는 파괴의 놀음 이젠 멈춰라/세상 증려烝黎 누군들 이 살육 반길 소냐/하늘이여 새해는 지구껍질 평화를 주소서(평화를 주소서)”라는 기도문은 못내 처연한 심사(心事)다. 특히 소중한 삶의 시간대를 공직에 충직하게 몸담아온 ‘더불어 함께’라는 공동체 의식도 시편 <너도 살고 나도 살자>에 맞물려 “메마른 도심에 꽃보다 아름다운 몸짓/사람 해하는 미물인들 한 울타리 머물다/헤어지고 또 새롭게 탄생하리니(같이 살자)”라는 그 기대감은 진정성으로 가슴 뭉클한 감동을 신선하게 안겨주고 있다. 까닭에 본질적인 고독 앞에서도 알맞은 정신기후를 조성시켜 눈부신 존재의 꽃을 피워내는 정신작업은 한층 더 생산적이다. 따라서 사물의 응시와 자아 회복을 가시적 이미지로 극대화하는 그의 표제 시에 관한 역설이랄까? 애써 그 자신을 ‘언어의 연금술사라’고 매듭짓지 않더라도 그 초연한 삶과 현실을 접목을 시키는 창조적 결과물은 차별성이 가늠된다.
모름지기 현대인의 자의식에 있어 탈관념 혹은 디지털 은유를 다시 변주를 시켜 그만의 시편은 육화되고 존재하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일관된 집념과 시적 분위기는 다감한 분위기다. 그 같은 관점에서 허드슨(W.H.Hudson)이 “시는 상상과 감정을 통한 인생의 해석임”을 지적하였듯 그의 시편에서 시적 교감이라면, 개념도 불투명한 이념의 문제로 갈등과 대립으로 치닫는 시간대에서도 “심장에 매어둔 포승줄 풀어/고운님 미운님/乙未의 첫 손님 오기 전에 떠나거라/수평선 너머로 머얼리 사라지거라(해운대 일출–세월호)”에서 새삼 명증되듯 그 자신의 맑은 영혼의 울림은 통섭과 상생의 기대감으로 충만하기에 그의 시편은 지극히 평온할 따름이다.
여기서 아득한 유년의 꿈이 자리한 ‘언덕보다는 높은 야트막한 삼천포 숨뫼산’의 정감은 “망산에 걸린 서녘 해에 깜짝 놀라/황급히 내려오던 그 오솔길 숨뫼산/지금은 어이해 흔적도 없는 삭막한/도회의 회색일 뿐 꿈속에만 있네(고향 땅 숨뫼산)”의 일면의 보기와는 상이한 미얀마 로힝야 난민의 '불가능한' 삶도 결코 외면치 아니하고 산문시 <로힝야의 참상>을 절연(絶緣)한 의지로 “다시 공해상으로 쫓겨나 타는 갈증에 오줌을 마시고 허기를 견디고 버티다 결국 미쳐서 바다에 뛰어들어 죽어간 사람들, 불판 같은 지구껍질 여기저기 콩이 튄다. 진정, 치유의 방법은 없는 것인가?”라는 반문 앞에 자신을 놓아보는 그 존재감은 지극한 눈부심이다. 까닭에 한순간 절박함에서도 ‘기도하는 성자인 나무’를 대상으로 “얼마나 아프고 목마른 발 북을 쳤으면/그토록 북채가 다 닳은 몽당 발 뿌리/까맣게 변해버린 검은 뿌리 감나무야.(감나무 죽은 사연)”를 애도하는 자유로운 바람의 영혼에 잇닿은 그만의 지순하고 따뜻한 감성의 발현은 황혼의 삶을 만보하는 여유로움은 지극히 역동적이다.
어디까지나 담백한 시격(詩格)을 지닌 존재감 빛나는 그 자신에게 깊은 사유와 행복한 언어의 집짓기는 눈물 묻은 정한과 삶의 구조에 해당한다. 따라서 초연한 삶과 현실을 접목을 시키는 시학적 접근은 현대인의 자의식에 있어 탈관념 혹은 디지털 은유를 다시 변주를 시켜 그만의 시편은 육화되고 존재하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집념과 시적 분위기는 이채롭다. 또 한편 ‘흙 속에 바람 속에서 강산은 그렇게 또 변할지라도’ “젊음은 저 푸른 장송이 앗아 갔는지/부러웠던 세상은 쑥국새가 물고 갔는지/텅 빈 가슴//空 空 空 그러나 아직도 더 비우라 하시네(흙 속에 바람 속에)”를 통해서도 삶의 허망함이 예감될 것이나, 다음에 인용하는 시적 의미망이 응축된 <노동의 뒤안길>에서는 긴장감에 이끌린 그 의문은 진지함 뒤의 참담함이다.
얼간이 같은 사람아/얼간이 같이 살다가//
몸과 마음 닳고 닳아/덜그럭 덜컹 무너지면//
설움 한 움큼 거머쥐고/짚불처럼 가려는가//
이 길밖에 없는데/어쩌란 말인가?//
-<노동의 뒤안길> 전문
이 같은 맥락에서 때로는 비정할 만치 무한경쟁으로 치닫는 삶의 일상에서 “십수 년 노동의 대가는 잔인하다//다한증이란 놈은 왜 여기에 붙어/땀길 인지 소금길인지 흘러 흘러/온종일 석면가루 풀풀 날리는데/짠 물줄기 눈 막아 일이 힘들다(노동의 그림자)”를 통해 그 일체감이 주어짐은 물론이거니와 시편 <새벽 찬 공기>의 모티프도 동일성을 지니지만, ‘새벽 4시 알람 소리에 깨어나 늙은 차(다마스)를 끌고 하루를 팔러 가는’ 삶의 일상이지만, 살아있다는 그 생명에는 최소한의 의무가 허락되기에 “새 쫓는 폭죽소리, 비행기 이착륙 폭음이/간간이 고막을 찢고 가지만/시야가 탁 트인 초원/일하기 상쾌하다(황새의 교훈)”라는 씁쓸한 위로가 주어질 것이다. 따라서 침잠의 시간대에서 생명의 봄을 소망하며 따뜻한 감성적 시편으로 자아를 인식하고 성찰하는 그 자신의 독자적인 ‘체취, 느낌, 사유, 색깔’ 등을 자르고 파헤치며 심층적으로 명증하지 않아도 불확실한 현상에서 ‘느림의 시학’에 충실함은 관망할 바다.
3. 구도자의 사변성과 따뜻한 정감
최소한 정신작업의 종사자임을 자처하지 않더라도 생명의 본체인 우주와 내면 인식의 경계를 위하여 그 동공(瞳孔)은 항시 열려있어야 한다. 까닭에 즉물적 현상에 대한 응시와 깊은 사유 뒤에 추구한 시 의미는「구도자의 사변성과 따뜻한 정감」이라는 일면에서 자유로운 바람의 선율(旋律)을 시적 형상화하여 짜임새 있게 변주를 시켜 세월이 흐르는 그 덧없음도 의미와 가치로 채워 마침내 그 자신을 ‘현명하고 명성이 빛나는 자’로 이채롭게도 확증시켜주는 점이다. 까닭에 그 자신은 한 사람의 시인으로서 생명 경외의 인식에 안목을 확장하여 몸담은 공간을 아름다운 서정의 미감으로 장식할 뿐만 아니라, 영혼의 닻줄을 피 멍든 손으로 당기는 절박하고도 경건한 신앙생활도 올곧게 수행하고 있다.
어디까지나 시집 구성 「제5부 계묘년(癸卯年)의 기도」에서 맑은 영혼의 소유자인 그 자신이 ‘책상머리에 앉아’ 절박한 심정으로 머리 조아리며 인류의 화합과 코로나 19의 위기 앞에서 창조주께 드리는 계묘년 아침의 “어쨌든 우크라이나 불바다는 태평양에 다 처넣고/자기 마당 제 식구 노략질 없어지길 바라나이다./코로나19 더 이상 귀한 생명 거두어가지 마소서/끝으로 제발, 지구가 울지 않게 돌을 던지지 말고/자연을 자연답게 살 수 있도록 자연되게 하소서.(계묘년의 기도)”는 절박한 분위기다. 따라서 즉물적 현상을 거부하지 않는 그만의 치밀하고 적확한 언어 캐기 작업을 충직한 시편은 끊임없는 정신적인 작업 뒤의 결과물은 ‘정신적 외상’인 트라우마(trauma)가 자리해 있기에, 명백한 시 심리에 근거한 이 땅의 독자에게 시적 영감을 신선한 충동으로 안겨줄 것이라는 부푼 기대감은 외면하고 지나칠 수 없다.
그렇다. 화자 자신이 ‘청보리의 매개로 한 시작 동기는 ’이 지상의 위대한 이름, 어머니!’의 초상화를 클로즈업시켜 ‘정화수 장독대 올려놓고 군대 간 자식, 어린 것들 위해 십 년을 하루 같이 빌고 빌었네.’를 발원(發願)하고 “날만 새면 논두렁 밭두렁 종종걸음/안개 낀 벼랑길 딛고 선 모진 날들/허기져 풀뿌리 잡고 바동거리던/갑진년 그 아슬아슬한 보릿고개(울엄니 일생)”의 일면에서 깔끔하게 메르헨적 정감이 가미되어 서정성이 담채색 풍경화로 장식된 “서늘한 바람 일렁이는/햇살 가늘어진 가을날/새끼여치 어미 등에 납작 붙어/풀 섶 양지에 세상 구경 나왔네(늦가을 여치)” 또한 ‘이슬인지 눈물인지 모를’ 그 감동을 회복시켜주기에 다감하다.
모름지기 그간의 새로운 변형을 합리적 해법으로 탐색하려고 대상의 물활론(物活論)을 심도 있게 수용하여 고조된 긴장감에도 이처럼 ‘청보리’를 통한 삶의 일상에서 끊임없이 신 앞에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평상심을 지탱하는 일념은 이채롭다. 비록 봄날의 몽환처럼 ‘슬픔의 서곡이지 행운의 전주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 “무엇을 암시하는 것일까?/황금도 빛도 소금도 아닌 헤일 수 없는/서릿빛 휘파람 소리 시원한 남실바람/흔들리며 춤추는 풍광명미 그 무엇인지(어떤 현몽)”에서 그 감미로움 뒤의 실상은 묘연하다. 혹여 그 자신이 ‘꽃잎에 흐르는 그윽한 고아함이여’라는 느낌표를 토해내며 “화사한 꽃송이는 정녕 형용키 어려운/참신한 보랏빛인지 검붉은 선홍인지/어느 귀족 안뜰에 피어도 귀한 대접 받으리. (엉겅퀴 사랑)”라는 그 간절함으로 ‘화자는 이항대립에 머물지 않고 대립의 해체를 시도하여 생태주의적 도심마저 받아들인 수용성은 신비스러운 동반자로서의 시적 행위와 맞물려 이채롭다.
결론적으로 시집 평설을 가름하며 정한준 시인에게 거는 기대라면 흘려버린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인식의 오류에 대해 항상 건강하게 비판하되 자성의 시간을 끊임없이 경계심을 지니는 분별력이다. 까닭에 다양성을 수용해야 할 문화의 21세기, 현대시가 일상에서 부대끼는 사물을 여과하여 재구성하는 과정도 모색하되 그간의 낡고 고루한 고정인식은 접어두고 발상의 전환은 이끌어야 한다. 모쪼록 새로운 시적 토양과 정신기후의 조성을 위해 주지적인 의도에서 실험·도전정신을 반복할지라도 개아적 차별성과 일관성을 당당한 존재감으로 지켜낼 것이라 확신하며 시집 간행을 함께 축하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