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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는 고양이다』와 사물화의 차별성
- 이효 시인의 담백한 격조와 시적 형사形似
엄창섭(가톨릭관동대 명예교수, 아태문인협회 고문)
1. 삶의 조화로움과 시적 형상화
최소한 맑은 영혼의 소유자에게 ‘감성의 빛남과 자아 다스리기’는 극심한 대립과 갈등의 상황에서도 끝내 경계할 일이다. 까닭에 현재 아태문인협회 이사이며 인사동시인협회 사무국장인 이효 시인이 오랜 망설임 끝에 묶어내는 제2시집『장미는 고양이다』(책나라, 2024)야말로 저마다 분별력을 지닌 이 땅의 충직한 독자의 기대감을 충족시켜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따라서 ‘A(원관념)=B(보조관념)’의 메타포(metaphor)는 거부감을 수락하지 않기에 시집 평설에 앞서 사적인 변명이지만, 평자가 20여 년 남짓 인사동시인협회 태동 당시는 지도교수의 직함으로, 또 현재는 아태문인협회의 고문직을 담당하기에 지대한 관심사로 소홀히 지나칠 수 없다.
또 한편 빛나는 존재감의 이효 시인이 시집의 서문 격인「시인의 말」에서, “눈동자에 빛이 들어온다/ 새벽을 통과한 나뭇가지들/ 잎맥은 속도를 기억한다./ 태양이 나뭇잎 위로 미끄러지면/ 은빛으로 변한 들고양이들/ 비광飛光의 춤을 춘다.”라는 그 황홀한 꿈과 설렘은 또 하나의 신선한 충격이다. 그렇다. 최소한 정신작업의 종사자라면 응당 따뜻한 감성을 지니고 밝은 사회를 지향한 한 사람의 구성원으로서 ‘하늘의 언어인 감사感謝’에 공감하되 일관되게 상처받은 영혼의 치유治癒에도 고뇌할 일이다. 따라서「『장미는 고양이다』와 사물화의 차별성 - 이효 시인의 담백한 격조와 시적 형사形似」의 전제는 특정한 시인의 개별적인 창조 활동이기에 그 자신의 생산적 결과물은 다양한 시각에서 접근하고 조응함에 그 명료성이 확증된다.
모처럼 미국의 사상가인 랄프 왈도 에머슨이 그 자신의『성공이란 무엇인가?』에서 역설한 “당신이 살아있기에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조금 더 쉽게 숨 쉴 수 있었음을 아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라는 지혜로운 삶의 잠언에 항상 감사할 바다. 그 자신은 등단 이후 시 짓기에 전념하며 따뜻한 배려와 타자 간의 헤아림이 남달라 ‘사상과 서정의 미묘한 선상에서 온전한 미학적 시 세계를 구축하여’ 존재감을 확증 받은 맑은 영혼의 소유자다. 따라서 영국의 셰익스피어가『사랑의 헛수고』(4막 3장)에서 “사랑이 말을 할 땐 천상의 모든 신들이 소리를 맞춰 합창하며 온 하늘 전체가 황홀해진다.”라고 제시하였듯 새로운 시문학지형도를 펼쳐낸 그 자신의 시적 형상화는 칙칙함마저 깔끔 씻겨주기에 정신풍경화는 못내 이채롭다.
어디까지나 확고한 정체성을 그 자신의 시적 수용성에 평자 또한 가일층 근접하여 ‘오! 놀라운지고.’라는 삶의 일상에서 불현듯 만나는 신선한 감동은 엄숙한 생명외경심生命畏敬心이다. 비교적 형식상 호흡이 단순하고 현대적 기법을 최대한 적용하여 표현상 다소 풍자와 역설逆說의 양상인 시집의 편집구조는「1부 꽃, 초인종을 누른다(17편), 2부 루주가 길을 나선다(17편), 3부 발톱 없는 눈(17편), 4부 크레센도(16편)」의 그물망은 치밀하게 결結 고운 옷감으로 직조되기에 지극히 지켜보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삶의 조화로움과 시적 형상화」로 결속結束한 그 자신의 담백한 시격詩格은, ‘지나온 눈 맞춤은 어제의 과녁을 뚫는’ 상황일지라도 “여자의 징검다리는 벽 속에/ 갇혀 과거를 더듬는다(장미꽃을 켜는 여자)”에서의 일면처럼 깊은 사상에 몰입하는 정신력이 직관적이라면, 시간의 관점에서 주시하는 정신력의 한 방법은 그 관조觀照의 세계와 맞물림이다.
일단 시집의 표제 시로 단조로운 호흡에 나직한 음조音調로 직물 대상이 선명하게 투영된 “때로는 영혼의 단추를 풀어도/ 찌를 듯한 발톱이 튀어나온다// 왜 내게는 그런 날카로운 눈빛과 꼿꼿함이 없을까// 내 심장은 언제나 멀건 물에 풀어놓은 듯/ 미각을 잃는 혓바닥 같다// 고양이의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눈빛은/장미의 심장과 날카로운 가시의 고고함이다// 고양이는 붉은 발톱으로 오월의 바람을/ 천川 자로 할퀴고 간다/ 장미의 얼굴에는 오월의 핏빛이 칼날 위에 선다// 나는 오월의 발톱을 기르고 있다(장미는 고양이다)”의 보기에서 ‘장미와 고양이’의 대칭 관계는 영혼이 맑은 동반자와의 합일로 신선한 감동이며 하나의 놀라운 충격이다.
각론하고 ‘독자를 위한 배려로 치밀하고 꼼꼼한 시 감상을 곁들여 깊고 따뜻한 배려를 결손처리 없이 담백한 격조’로 빚어내어 새삼 시적 효용성을 높여주고 있다. 또 한편「꽃, 초인종을 누른다」의 시 심리의 충격 뒤 도솔천兜率天의 꽃비는 아닐지라도 ‘놀란 벚꽃이 하르르 쏟아지는’ 황홀경을 접한 끝에 “발꿈치 들고, 꽃잠 깬 무희들/ 그 소리, 참 하얗다// 바람이 가야금 줄에 올라탄다/ 봄이 튕겨져 나오는 소리(벚꽃 1)”는 물론 지극히 탐스러운 붉은 동백꽃을 응시하면서도 ‘저 가지 끝에 주먹만 한 슬픔이 피었더라’라고 나직이 읊조리는 그만의 시적 형상화는 마침내 “하늘을 펼쳐놓고/ 붉은 사랑 한 송이씩 떨구니// 살 끝에 남은 그리움/ 동백꽃 한 송이 말을 잃는다(동백꽃)”에서의 예시처럼「봄을 붙인다」에서 그 동질성은 ‘끈끈한 속살이 창문 안에 차오르는 일’이다. 이처럼 그 자신은 ‘변화의 몸부림과 격랑의 고된 세월을 동시에 드러냄’을 시적으로 형상화하였기에 ‘악연일까, 인연일까’라는 물음 앞에서 ‘잡풀들의 목을 비튼, 나는 지명 수배 중임’을 어설프게 자인할지라도 “겨울을 견뎌낸 눌린 숨소리// 몸살 같은 봄의 서막이 오르고/ 저 푸른 여름을 향해 바람은 뜨겁다(나는 지명 수배 중)” 또한 ‘벽을 허문 경계선→봄의 서막→푸른 여름’의 맞물림으로 ‘꿈의 미학 즉 동질성의 관망은 지대한 관심사다.’ 그렇다. 새천년도 이후 시인의 심리는 사회의 부조리가 극심해지면서 낯설게 하기가 한층 더 심해지는 것을 사회현상으로 볼 수밖에 없다.
2. 상상력의 확장과 생명 기표의 다양성
모름지기 감정의 절제에 의한 영혼의 잠식으로 해석되는 그 자신의 시 정신은 푸른 생명의 언어로 직조된 전율 같은 가슴 떨림이며, 그만이 겪는 황홀함이기에 미적 주권은 순수서정으로 빛난다. 또 그렇게 「국수 가락을 달빛에 풀어」내는 삶의 일상에서 가을이 깊어 ‘오늘, 그 감을 따야 하는데 당신은 가을과 함께 먼 곳으로 떠나신’ 그 아쉬움을 따뜻한 마음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한평생 자식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헌신을/ 온몸으로 땅에 쓰고 가르치신 어머니// 그렁한 내 눈은 붉은 감빛이 되었습니다(감나무와 어머니)”의 시편에서 지금은 흙으로 돌아가신 어머니와 함께 40년을 땅을 가꾸고 감나무를 심고 함께한 시인은 가슴 찡한 그리움과 비장감이 오롯이 묻어나는 시에서 진정한 한 사람의 시인으로서 정감을 보여준다. 어느 날 탐스러운 감을 따며 어머니를 그리워한다. 익어가는 계절 앞에서 시인의 마음도 ‘사랑과 헌신’을 깨달으며 익어가고 있다. 인간이 인간적일 수 있음은 사랑과 고통을 몸소 보여주고 함께하며 지내온 역사적 공감일 것이다. 그 공감이 그리움을 소환하여 감동을 자아낸다. 다음 시 「루주가 길을 나선다」는 ‘그리움의 운명은 파랗고, 거울 앞 침침한 시간 앞에서 운명을 바르는’ 시적 추구를 갈망하는 현대 여성의 심리를 형상화하고 도식화한다. 시적 정감은 더욱 또렷하고 선명하게 나타날 따름이다.
그리움의 변명은 파랗다//
인연은 호수에 배를 띄워 다가가는 것//
거울 앞 침침한 시간들//
부러진 루주 끝에도 심장은 뛴다//
내가 먼저 길을 나서는 것은//
슬픔과 후회가 거기 있기 때문//
운명을 바른다//
- 시 「루주가 길을 나선다」 전문
일단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어법과 새로운 시어가 필요하다. ‘그리움’은 ‘파랗’고 부러진 ‘루주’에서도 ‘심장’은 뛴다와 같이 루주로 ‘운명’을 바르고 길을 나서는 시인의 정서 변화가 현대여성의 심리를 함유하고 있어 시적 텐션이 높은 작품이다. 길을 나서는 것은 또 그렇게 삶의 일상에서 ‘올가을 당신 닮은 숲을 볼 수 있을까요?’라는 물음이 주어질지라도 “숲에서 아버지 닮은 눈빛을 찾는다// 여름을 지나 채도를 낮춘 가을/ 온화한 빛으로 나를 안아준다/ 바람이 쓸고 간 먹먹한 시간들/ 바위에서 꺼낸 아픈 문장들(붉은 가을을 토한 당신)”의 보기에서나 또는 “꽃무늬로 흔적을 남긴다// 마음에 창문을 내고, 깊고 우렁한 이름 하나/ 기억의 나무에서 말은 건다// 첫눈이 나무에 앉으면/ 돌아온 첫 키스가 새초롬히 꽃처럼 떤다(첫눈이 내리면)”에서 다시금 확인될 것이다. 그와 같이 ‘첫눈이 내리는 그 설렘’은 첫 입맞춤 뒤의 전율戰慄인 까닭에 그 자신도 ‘새초롬히 꽃처럼 떤다’로 이미지를 형상화하고 있다.
각론하고 한편 ‘태양도 샤워를 마친 여름 여자의 가슴에 가을이 흐른다’ 라는 시적 발상에 의한 묘미妙味도 한층 더 이채롭다. “울타리 안 감나무/ 매달린 감은 할머니 엉성한 이// 시집온 지 여러 해가 넘은 새댁/뱃속은 언제나 공실// 익지 않은 시퍼런 말/ 툭, 떨어진다/ 입맛은 화석이 된다(꼬물거리면 좋겠다)”에서처럼 짐짓 묵언으로 응시하는 서울태생의 현대적 상징이 따뜻한 감성의 변화를 보여준다. 이효 시인의 첫 시집『당신의 숨 한 번』(책나라, 2022)에 뒤이어「장미는 고양이다」에서도 긍정적 정서와 청정한 시적 소양의 심상으로 일상의 삶과 자의식을 진솔한 개아적 차별화로 빚어낸 행위에서 삶의 중량감은 지극히 상대적이다. 까닭에 보편적 시론에 견주어 감성의 저항이란 정서의 변곡점을 지나친 정신적 생산물은 시적 수사의 형상화로 그의 심상心象은 담백한 시격詩格에 투사되어 그 존재감이 빛난다.
어디까지나 시집 편집구성의「3부 발톱 없는 눈」에서 ‘천년 뱃사공 노래 흐른다.’를 식별하는「한강은 춤추고 싶다」또한 그 자신이 시적 정감을 시적 상상력에 배합시킨 수사적 기법(craft)의 활용은 특이하다. 푸르던 ‘한강’ 주변엔 아파트로 가득하여 백내장에 걸린 강은 빛을 잃어가고 있다. 거품을 삼킨 물고기들이 죽어가는 현실을 직시하는 시인은 맑게 흘러야 사람이고 물이라며 무자비한 개발의 현장을 고발하는 시로써 생태환경 시로도 부족함이 없다. 현대시는 현대가 지니는 흐름을 대변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인용하는 시편으로 “표정이 얼어붙은 연못/ 먼 곳으로 날아간 새 한 마리// 눈발의 부드러운 소리는 맑다// 자물쇠 풀린 호수/ 뿌리까지 내려간 언 살갗을 녹인다// 발톱 없는 눈/ 연못을 차분한 숨결로 잠재운다(발톱 없는 눈)”의 시가 그러하다. 따라서 문학적 실험은 서정성을 배제한다. 현대사회의 다양한 존재들은 자유와 개성 또한 다양하고 독특하다. 따라서 21세기 현대시는 난해할 수밖에 없다. 시제 「발톱 없는 눈」은 우리가 흔히 노래 부르던 서정성을 배제한다. 현대시는 노래하는 시에서 읽는 시로 변모했다는 것을 인식시키는 시이다. 현대시의 기호체계인 기표와 기의를 해독해야 한다. 시적 배경은 초겨울이며 꽃향기로 가득했던 여름을 지나 황량한 겨울이지만 호수에 눈이 녹아 사라지는 모습을 발톱 없는 눈으로 표현한 상상력을 극대화를 시킨 시이다.
또 한편 시집 편집 구성상 결코 예외일 수 없다. 까닭에 ‘하얀 밥과 김 따로, 내 자식들 같다 남자의 일회용 눈물이 쏟아진다’처럼 현대적 풍물을 모티프로 사각의 도시 풍경의 그 허망하고 처연한 그 양상이 맥을 같이 한다. “현관문 열어놓고/ 이봐 젊은이, 날 좀 앉혀주게나// 뼈만 남은 휠체어 바퀴를 보며/ 슬금슬금 사라지는 그림자들(삼각 김밥 번호)”에서 확증되는 이채로운 실상도 마찬가지이다. 또 한편 ‘두렵다는 것은 슬픈 것’인 까닭에 때로는 ‘겁에 질린 어린 눈망울이 글썽일지라도’ 노르웨이의 표현주의 화가인 에드바르 뭉크의 연작 중에 ‘핏빛의 노을이 지는 오슬로의 하늘을 배경으로 괴로워하는 인물을 묘사한 그림’을 소재로 삼아 “칠판 위에 붙은 교훈/분필 가루가 되어 교실 안이 술렁인다// 무질서는 유죄일까? 무죄일까?// 옆구리 차기로 운동화 날아오고/ 교사의 비명은 털이 뽑혔다(뭉크의 절규)”라는 시적 형상화도 새삼 묵언으로 응시하며 지켜볼 일이다.
그렇다. 때로는 암울한 삶의 현상에서 ‘밟지 말아야 할 스승의 그림자는 구석기시대 유물이 되어 밟힌 지 오래이기에’ 비정한 현대사회의 교육 현장은 더없이 암울하다. 인간성이 사라지고 무질서가 난무하는 과격해진 학생들, 일찍이『25시』저자 게오르규는 ‘시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회는 병든 사회’라고 말했다. 화가 뭉크의 ‘절규’를 시적 배경으로 차용한 시적 언어의 형상화가 독특하다. 예술의 독창성 없이 남의 것을 모방하는 것 또한 ‘아류’로 본다. 주제의 선택이 감각적이며 성찰을 이끌어내고 있다. 모름지기 40년 남짓 수채화를 그린 ‘인류의 스승’ 헤르만 헤세가 동물적인 대상을 일절 거부하고 ‘꽃밭에 물 주는 정원사’만 유작으로 남겼듯 ‘붓으로 평화를 그리는 미셀의 화폭 앞에서’ “파리의 백 년 전 모습은/ 명암으로 외투를 벗는다/ 풍차는 돌며 세상 그림자를 지우고/ 마차 밖 키스는 양산을 쓴다// 노을을 들추면 늙은 화가의 그믐달이 나온다/ 녹아내리는 시간 앞에서 붓을 잡는다// 누가, 마지막 정거장에 봄을 켜주실래요(벨 에포크*-미셸 들라크루아전)”에서 시적 미감은 신선한 충동일뿐더러 그 자신의 관조적 삶을 통해 언어예술로 직조될 것이다.
어디까지나 그 자신의 시편은 다양한 삶의 체험을 현대적 사유思惟를 통한 응축된 낯익은 언어들이기에 모호성이나 현학성玄學性이 드러나지 않을뿐더러 시적 감응은 동시다발적으로 비교적 교감이 되기에 “손에 든 슬픔은 진흙에 빠진 삼만 원을 편다/ 문턱 넘어 짙은 그늘이 가득한 집// 손주의 게임판에서 기어 나오는 살기/ 저녁마다 마중 나오는 주먹질과 욕설// 회오리바람 타고 집 나간 며느리, 목숨줄 버린 애비(동백꽃, 멍이 차오른다)”도 그렇듯 매몰찬 시장의 논리가 지배적인 이 시대의 충직한 독자에게 ‘무관심은 죄악이다.’라는 역설은 삶의 일면에서 지극히 교시적敎示的이다. 마치「숫타니파타(Sutta Nipāta)」에서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으로 풀이하였듯 바람의 미감은 풍요의 숨결을 뜻하기에, 가슴이 저며 오는 고통이 따를지라도 풀꽃의 향을 풍겨내는 감미로운 삶의 여적餘滴에 견주어 끊임없이 추구하여야 한다.
특히 비열한 이기주의로 치닫는 현대산업사회에서 모호함과 다양성을 심층적으로 수용하여 감동의 회복을 위한 깊은 사유思惟는 외면할 수 없다. 그렇다. 절망의 끝이 보이지 않아 한층 미래가 불투명한 현상에서 ‘최소한 정신작업의 종사자라면 항상 귀를 열어놓아야 한다.’라는 그 나름의 시적 행위는 지극히 지혜로운 삶의 잠언이다. 따라서 지극한 지극선至極善의 심성으로 시적 이미지를 엄격히 통제하고 즉물적 현상을 적확하게 ‘삶의 구조와 직물 세계의 상황인식’이 수용된 그 자신의 시편에는 ‘합리성, 그 모순에 대한 사유’에 묵언의 응시로 무위자연’을 읊어내되 ‘현실에 안주하는 여백의 틈새를 허락하지 않는 적확한 언어의 조합이 자리매김하고 있다.
3. 개아(個我)의 다스리기와 시적 합리성
차제에 바람의 통로와 생명 기표의 교신이라는 양상樣相에서 창조하는 영혼은 아름답고 위대하기에 가슴 따뜻한 정신작업의 종사자라면 소외와 갈등으로 인해 마음의 깊은 상처(trauma)로 좌절한 타자에게 힘겨운 삶의 일상에서도 꿈과 비전을 일깨워야 한다. 근간에 실험을 통해 좋은 예술작품이나 종교적 희열에 의해서 깊은 감동을 얻게 될 때, 인체 내의 면역체계에 강력하고도 긍정적인 작용이 발생 되어 암세포를 공격하는 현상이 입증되었듯, 진정한 삶의 좌표와 가치, 발상의 전환이나 고정인식의 틀 깨기로 결론 짓고 ‘생명의 씨앗을 뿌리는 농부의 보폭’으로 지상에서의 축복받는 삶을 허락한 신 앞에 감사하는 그 자신의 시적 행위는 지극히 합목적적이다. 또 한편 오웬의 “시인의 소임은 시대적 상황에 경고하는 것이다.”라는 인식의 전환에 감동의 마침표 하나도 놓치지 않는 관념의 일탈逸脫 행위야말로 스스럼없이 경계할 일이다.
까닭에 시집의 제4부에 수록된 시편 일체를 그 자신은 ‘점점 크게’라는 악상기호인 크레센도(cresendo)로 처리하여 클라이맥스에 달하고 있다. 시의 본질은 상상력이다. “봄은 악기다/ 누군가 몸에 구멍을 뚫어주면/ 세상을 향해 피리를 분다(크레센도)”에서 확증되듯 그 자신의 시적 상상력은 더없이 놀랍다. 문학은 아픈 상처를 깁는 명약임을 보여주는 시편 뒤, ‘굳어버린 색채의 뚜껑을 여는 남자’로 변주變奏를 시도하고 시적 상상력을 확장하여 ‘추상화와 구상화의 대화’로 “새벽이슬을 나뭇잎 위에 풀어서/ 하늘로 길을 그리고 시를 쓴다// 신발을 벗어야 하나// 나뭇잎의 소리와 모난 가지의 눈/ 자신의 틀 속에서 서로의 길이를 잰다(추상화와 구상화의 대화)”의 보기도 그렇거니와 “스르륵 배를 깔고 뱀처럼 내려앉는 고요/ 엉켜 있는 물을 빗질한다// 거울 속에 비친 별은 통증을 마주한다// 물의 혀에 수없이 달려 있는 빛깔/ 그린 사파이어는 둥근 잎으로 핀다(호수를 빗질하다)”를 통한 그 추이(推移)는 뜻깊다.
기실 특정한 시인의 정신적 생산물을 놓고 생명 기호에 의해 통일된 체계의 유지와 정체성의 확인 작업은 어디까지나 ‘우주의 신비를 캐어내는 현상’으로 가늠할 수 있다. 또 한편『카프카와의 대화』에서 체코의 작가 구스타프 야노흐가 “고향을 알기 위해서는 타향으로 떠나야 한다.”라는 그 역설만큼이나 그 자신의 지혜로운 삶의 교시(敎示)는 적절성을 수용한 감각적인 묘미는 앞의 시편인 「가을의 기도」에서도 “온 대지를 휘감는 침묵의 기도가 맑습니다”라는 시적 감응에 맞물린 ‘누가 저 등불보다 간절한 기도를 가을 하늘에 매달아 놓을 수 있을까?’라는 반문이 주어지는 삶의 일상에서 ‘가지 끝에 매달린 생명 하나!’ 저토록 최후에 드려지는 절박한 기도문은, “가지 끝에 꺼지지 않는/ 등불 하나 매달아 놓아서다// 심장마다 떨리는 붉은색/ 칼끝, 붙잡고 싶은 사랑이다(마지막 기도)”에서 이처럼 확증되다 끝내는 맑은 영혼에 투사되어 ‘칼끝, 붙잡고 싶은 사랑이다’와 같은 절박한 시 심리의 변주는 ‘지상에서 유일한 하늘의 언어인 감사’에 잇닿아 그 일념은 충만한 생명감에 못내 날刃 푸르다.
그렇다. 시각적인 수사의 기법(craft)을 통해 ‘주인을 기다리는 택배는 서쪽 옆구리가 터졌다’라는 그 자신의 공감각 처리로 개아적인 차별성은 놀랍거니와 “여자는 깨진 거울을 테이프로 붙인다/ 반찬 없는 늦은 오후, 수장된 식은 밥/ 이불 속 아이들의 구슬은 세모 칸 앞에서 정전된다/ 눈이 내리고 으르렁거리는 방들은 점점 기울어진다// 바닥에는 오징어 게임이 그려져 있다(새해는 세모난 눈이 내린다)”에서 직물 대상을 매개로 그 감응과 관조는 현대성을 융합시킨 우월성에 그 존재감은 한층 빛난다. 이처럼 그 자신의 치밀한 편집 구도로 1933년 충남 서천군 장항읍에서 태어난 ‘이 지상의 가장 위대한 이름! 어머니(장용애 여사)’의 이력서 뒤, 헌정시로 묶어낸 ‘부농을 이룬다-어머니를 그리는 詩’ 시편의 의미망은 새삼 이채롭다. 비교적 호흡이 단조롭고 격조格調가 담백한 그 자신의 시집 부록에 잇닿은「어머니의 이력서 」(<아플까 봐>, <부채와 어머니>, <작은 집> ) 3편은 못내 비장감이 묻어나 무채색의 정신풍경화는 그 아득한 정한과 감회感懷에 눈물겨워 가슴 뭉클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 자신의 정신적 생산물을 관조와 사유가 잇닿은 삶의 일상에서 육화된 것을 시적으로 형상화하였기에 그 삶의 궤적軌迹은 못내 빛난다. 한편 시어의 상징성을 깨달음의 위상으로 처리하였기에, ‘살아있는 자만이 춤출 수 있다’라는 삶의 경계로 호라티우스가 일깨워준 “카르페디엠(Carpe diem)” 또한 기억할 교시敎示다. 까닭에 ‘극소수의 창조자’로서 당당한 자존감의 실체인 이효 시인에게 평자로서의 간절한 기대감은 ‘역사적 소임의 온전한 수행’이다. 모쪼록 소외된 인간관계의 틀을 허물고 인위적 제도를 맑은 영혼의 노래로 줄기차게 변형시키되 개아個我의 각성에도 가혹하고 엄격한 담금질로, “식물성인 꽃과 동물성인 고양이의 대응”의 일면처럼 푸른 생명의 언어로 끊임없이 채근採根하는 막중한 역할을 끝내 담당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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