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락정기河洛亭記
이 정자는 옛적 해창(海窓) 송공(宋公)의 별장인데 편액을 ‘하락(河洛)’이라고 한 것은 석주(石洲) 이선생(李先生)이 명명한 바이다. 정자의 위치가 임하(臨河) 아래와 낙동강(洛東江) 위에 있으니, 뜻을 취한 것이 혹 이 때문인가?
공이 돌아가시고 나서 집도 드디어 무너지고 말아 잡초만 무성하여 일렁이게 된 지 여러 해였다. 근래에 공의 제자와 자제들이 그 땅이 황폐하게 됨을 차마 보지 못하여 자금을 증식하여 새가 날개를 펼친 듯한 정자를 중건하니 옛 규모에 비하여 더욱 꾸밈을 더하였다. 일이 끝나고 나서 나에게 기문을 청하니, 나는 일찍이 공을 모시고 따른 적이 있어서 마음이 기울어 향한 지 오래였기 때문에 그 일을 듣고 기뻐하여 나의 글이 보잘것없다는 이유로 끝내 사양할 수 없어서 다음과 같이 답한다.
공은 나라를 근심한 지사이다. 재능과 자품이 무리에서 뛰어나 일찍이 뇌헌(雷軒)의 강석에 나아가 배워서 자주 장려와 인정을 받아 어린 나이에 명성이 이미 영남의 사림에 널리 떨쳤다. 그러나 나라가 쇠망하는 때를 당하여 개연히 혁신사상을 지니고 서당을 설립하여 한 지방의 청년들을 불러 모아 영재를 육성하는 사업으로 후일 독립의 기초를 마련하려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았다. 이에 강구한 것은 동서양철학이고, 환기한 것은 민족정의였다. 많은 사람들의 구설수가 있었으나 돌아보지 않고 강한 일본의 위협이 있었으나 두려워하지 않고 정성스러운 뜻으로 한결같은 마음이 변함없었던 것은 다만 옛 조국을 회복하고 백성의 지혜를 개발하려는 데 있을 뿐이었다. 기미년(1919) 3‧1운동 때에는 안동에서 가장 먼저 나서서 왜경의 총검을 보기를 장난처럼 보고 감옥에 가기를 즐거운 곳에 가는 듯이 하였다. 30년의 오랜 암흑 같은 세월 동안 어느 때인들 국치(國恥)를 씻기를 다짐한 날이 아니었겠는가? 이에 평탄하거나 험하거나 간에 절조를 한결같이 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았으니, 고인의 말에 “삼군(三軍)의 장수는 빼앗을 수 있어도 필부(匹夫)의 뜻은 빼앗을 수 없다.”라고 한 것이 공을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노년에 이르러 다행히 을유년(1945) 광복을 보고 집에서 세상을 마칠 수 있었다. 이날을 보지 못하고 국내와 해외에서 세상을 마쳐 원통한 심정을 품은 채 펼치지 못한 많은 의인 열사들과 비겨보자면, 공은 눈을 감고 돌아가셨으니, 이것은 곧 하늘이 공에게 후하게 한 것인가?
대개 공의 일생은 백 번 단련한 정금(精金)이고 홀로 빼어난 고송(孤松)이었으니, 참으로 우리 민족의 선봉이고 후생의 사표였다. 비록 뒤에 이르는 사람일지라도 오히려 그 풍성을 듣고 흥기할 수 있는데, 하물며 평일 그 가르침을 친히 받은 사람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지금 공이 향기로운 자취를 남긴 곳에 집을 지어 사모하는 뜻을 깃들이니 보답하는 정성이 참으로 아름답다.
그러나 생각건대, 공이 사람을 가르친 것은 구도(舊道)와 신학(新學)이었으니, 구도는 곧 만고에 바뀔 수 없는 윤리 도덕이고, 신학은 곧 시대를 따라 마땅히 전공해야 할 과학 기술이다. 이러한 뜻은 공의 유문에 이미 누차 언급하였으니, 원컨대 여러 공들이 이 집을 풍류를 일삼아 술 마시고 시 짓는 장소로 삼지 말고, 공의 글을 읽으며 공의 뜻을 따라서 일제의 암흑을 겪고 살아남은 우리들로 하여금 전철을 밟지 않게 한다면, 이것이 곧 공이 후세에 깊이 바라는 것이다. 어찌 오늘날 우리들이 함께 두려운 심정으로 힘쓸 바가 아니겠는가? 연하(煙霞) 수석(水石)의 아름다움과 운림(雲林) 어조(魚鳥)의 즐거움 같은 것에 이르러서는 이 집에 올라서 보는 사람이 절로 얻을 수 있으니, 나는 짐짓 기록하지 않는다.
해창(海窓) 송공(宋公) : 송기식(宋基植, 1878∼1949)을 말한다. 자는 공필(鞏弼), 호는 해창(海窓), 본관은 진천(鎭川)이다.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1827∼1899)의 문인이다. 안동 협동학교(協東學校)에서 후학에게 독립정기를 고취하였고, 경술국치 후 이상룡(李相龍, 1858∼1932)과 함께 만주로 향했다가 중도에 귀국하였다. 1919년 3월 18일과 23일 안동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 운동을 주동하다가 체포당해 2년형을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출옥 후 귀향하여 남선면에 인곡서당(麟谷書堂)을 짓고 후진을 교육하였다. 저서로는 《해창문집》, 《국문사서(國文四書)》, 《한문훈몽(漢文訓蒙)》, 《홍범시의(洪範時義)》, 《유교유신론(儒敎維新論)》이 있다.
석주(石洲) 이선생(李先生) : 이상룡(李相龍, 1858∼1932)을 말한다. 자는 만초(萬初), 호는 석주(石洲), 본관은 고성(固城)이다.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1827∼1899)의 문인이다. 류인식(柳寅植, 1865∼1928), 김동삼(金東三, 1878∼1937) 등과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여 1907년 안동 임하(臨河)에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하였다. 1909년 대한협회(大韓協會) 안동지회를 결성하여 회장을 맡았다. 이 해에 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김형식(金衡植) 등이 만주로 떠나자 양기탁(梁起鐸)과 협의 후 1911년 2월 서간도로 망명했다. 1911년 최초의 만주지역 항일자치단체로 개간과 영농에 종사하는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여 사장에 추대되고, 그 부속기관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치했다. 1912년 경학사를 발전시켜 통화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에 교포들의 자치기관인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하고 단장으로 추대되었으며, 신흥강습소도 이전하여 제2의 기지를 정했다. 저서로는 《석주집》이 있다.
뇌헌(雷軒) :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1827∼1899)이 강학하던 풍뢰헌(風雷軒)으로서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금계(金溪)에 있다. 김흥락의 자는 계맹(繼孟), 호는 서산(西山),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의 11대 종손이고,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 1777∼1861)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서산집》이 있다.
삼군(三軍)의……없다 : 이 말은 《논어》〈자한(子罕)〉에 보인다.
백저문집(白渚文集) 배동환 저 김홍영․박정민 역 학민출판사(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