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상급은 하늘 나라입니다. 주목할 점은 예수님께서 그 상급을 현재 시제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 될 것이다”가 아니라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입니다. 곧 우리가 죽고 나서 받는 것이 아니라, 지금 누리는 상급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이들은 자신의 무력함을 고백하고 아버지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탁하기에, 지금 이 자리에서 하느님의 주권적 통치, 구속적 돌봄을 받습니다. 곧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입니다.
*** 둘째 참행복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 5,4)
첫째 복이 가난한 이들이라면, 둘째 복은 슬퍼하는 이들입니다. “슬퍼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펜테오’는 ‘애통해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슬픔을 나타내는 그리스어 가운데 가장 강한 표현으로, 애간장을 녹이는 격렬한 슬픔을 가리킵니다.
칠십인역(그리스어로 된 구약성경)에 보면 야곱이 애지중지하던 이들 요셉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애통해하는데(창세 37,34 참조), 이때 사용된 단어가 ‘펜테오’입니다. 또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신부가 신랑을 빼앗기게 되면 슬퍼하며 단식할 거라고 하시는데(마태 9,15 참조), 이때 사용된 단어도 ‘펜테오’입니다. 자식이나 배우자를 잃고 애통해하는 마음이 얼마나 처절한지는, 우리가 경험해 보지 않았다 해도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심장을 찢는 듯한 격한 슬픔일 것입니다.
• 행복하여라, 애통해하는 사람들!
예수님께서 첫째 복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구약성경과 유다 전통의 배경에서 언급하신 것처럼 이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성경과 유다 전통에서 애통해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거슬러 지은 죄 때문에 애통해합니다. 자신의 죄는 물론, 다른 이들의 죄 때문에, 또 추락된 하느님의 명예와 하느님 백성의 처참한 상황 때문에 애통해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 경우에 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인간이 죄를 지으면 마땅히 애통해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은 죄를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런저런 면에서 살펴보고 분석합니다. 개인적 차원에서는 자라난 환경과 양육 문제, 본능적 충동, 심리적 장애 등으로 설명합니다. 사회적 차원에서는 불평등한 사회, 편중된 부의 재분배, 또는 차별과 불이익에 따르는 소외 등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지은 죄에 대한 합리화가 이루어지고 죄 대신 다른 단어들이 등장합니다.
정욕은 ‘성적 필요’로, 탐욕은 ‘생존 본능의 추구’로, 분노는 ‘자기 감정에 솔직한 것’으로, 교만은 ‘자기 자신의 가치를 긍정하는 것’으로, 질투는 ‘건전한 경쟁심을 북돋아 주는 것’으로 표현을 바꿉니다. 결국 세상에서 죄는 존재하지만 죄인은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정말 죄가 없는 걸까요? 신문이나 텔레비전을 통해 뉴스를 보십시오. 세상이 얼마나 엉망이며, 우리의 인간성이 얼마만큼 타락했는지 곧바로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악을 행했기 때문에 악한 것이 아니라 악하기 때문에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물론 성장 과정에서 나쁜 환경과 불평등한 사회의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근원적인 문제는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죄입니다. 우리에게 죄가 없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진심으로 자기가 지은 죄를 애통해하는 사람은 다윗처럼 ‘내 죄’와 ‘내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아파합니다. 다음 시편을 읽어 보십시오.
하느님, 당신 자애에 따라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크신 자비에 따라 저의 죄악을 지워 주소서. 저의 죄에서 저를 말끔히 씻으시고 저의 잘못에서 저를 깨끗이 하소서. 저의 죄악을 제가 알고 있으며 저의 잘못이 늘 제 앞에 있습니다.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 잘못을 저지르고 당신 눈에 악한 짓을 제가 하였기에 판결을 내리시더라도 당신께서는 의로우시고 심판을 내리시더라도 당신께서는 결백하시리이다.(51,3-6)
다윗은 다섯 번이나 자기 죄와 잘못에 대한 책임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 탓을 다른 사람이나 환경에 돌리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밧 세바가 문제였습니다. 그때 그녀는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있었습니다.” 또는 “주님, 하필이면 제가 산책하는 그 시간에 밧 세바가 목욕을 하고 있을 게 뭐란 말입니까?”, “세상에 어느 남자가 그렇게 매혹적인 여자에게 끌리지 않겠습니까?”
다윗이 애통해하는 것은 단순히 범죄 사실이 발각되어 그동안 쌓아온 명예와 지위를 잃을 위기에 놓였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하느님 앞에서 얼마나 가공할 만한 짓을 했는지 깊이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후회와 통회는 다릅니다. 후회는 잘못에 대한 깊은 반성보다는 사회적 체면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이고, 통회는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아파하는 것입니다.
죄를 통회할 때 중요한 것은 지은 죄보다 하느님께 눈을 돌리는 것입니다. 다윗처럼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바라며 애통해하는 사람만이 절망하지 않습니다. 애통해하지만, 죄가 아니라 하느님을 바라보기에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희망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그분의 발을 닦아드리고 향유를 부어드렸던 여인처럼 슬퍼하는 것입니다.(루카 7,38 참조) 그녀의 슬픔은 절망이 아니라 복된 희망의 슬픔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유다는 스승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세 차례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잡아떼며 맹세와 저주까지 하였습니다.(마르 14,71 참조) 그는 스승 예수님과 눈이 마주쳤을 때 자기가 한 행동을 떠올리며 통곡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자신의 배반 행위보다는 예수님의 자비와 용서에 더 매달렸기에 유다처럼 절망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고 다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 가운데에도 죄를 지었을 때 베드로보다 유다처럼 행동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주님이 아니라 자신의 죄와 허물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마음에 새겨야 할 말은 “자기 죄를 바라보기 전에 그리스도의 자비를 열 번 바라보아야 한다”입니다. 우리가 육체를 갖고 있는 한 죄를 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죄를 지어 애통해하는 것만큼이나 주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자비와 용서헤 우리 자신을 의탁하는 것입니다. 17세기 사제 베버리지William Beveridge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제가 기도하더라도 죄를 짓습니다. 제가 강론하더라도 죄를 짓습니다. 제가 사목하고 거룩한 성찬 전례를 집전하더라도 죄를 짓습니다. 제가 회개한다 할지라도 그 회개는 회개할 또 다른 이유를 만듭니다.
주님께서 행복하다고 말씀하신 애통해하는 사람들 중에는 다른 사람들의 죄 때문에 애통해하는 이들도 포함됩니다. 에즈라와 다니엘은 동족이 지은 죄 때문에 하느님 앞에서 애통해하며 “저희가 죄를 지었습니다.” 하고 기도합니다.
저희는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질렀으며 악을 행하고 당신께 거역하였습니다. 당신의 계명과 법규에서 벗어났습니다. 저희는 저희의 임금들과 고관들과 조상들과 나라의 모든 백성들에게 당신의 이름으로 말하는 당신의 종 예언자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다니 9,5-6)
저의 하느님, 너무나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서, 저의 하느님, 당신께 제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저희 죄악은 머리 위로 불어났고, 저희 잘못은 하늘까지 커졌습니다.(에즈 9,6)
시편 저자는 회개할 줄 모르는 사람들의 완고함과 그로 인해 벌을 받게 될 것이라 안타까워서 애통해합니다.
사람들이 당신의 가르침을 지키지 않기에 제 눈에서 눈물이 시내 되어 흐릅니다.(시편 119,136)
바오로 사도는 다른 이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서 애통해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바오로 사도야 말로 행복 선언에서 말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로마 9,2-3)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자주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필리 3,18)
주님께서는 땅에 떨어진 하느님의 명예와 하느님 백성이 처해 있는 비참한 상황 때문에 애통해하는 이들도(2마카 11,6; 이사 15,3; 예레 13,17; 애가 2,18 참조)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들은 하느님 나라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에 애통해하는 이들입니다.
첫댓글 마음이 가난한 이들은 자신의 무력함을 고백하고 아버지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탁하기에,
지금 이 자리에서 하느님의 주권적 통치, 구속적 돌봄을 받습니다. 곧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입니다.
다윗처럼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바라며 애통해하는 사람만이 절망하지 않습니다.
애통해하지만, 죄가 아니라 하느님을 바라보기에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희망을 갖게 됩니다.
“자기 죄를 바라보기 전에 그리스도의 자비를 열 번 바라보아야 한다”
아멘 아멘
감사합니다 신부님
아멘. 아멘. 아멘.~~
“자기 죄를 바라보기 전에
그리스도의 자비를 열 번 바라보아야 한다”
"하느님, 당신 자애에 따라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크신 자비에 따라 저의 죄악을 지워 주소서.
저의 죄에서 저를 말끔히 씻으시고 저의 잘못에서 저를 깨끗이 하소서.
저의 죄악을 제가 알고 있으며 저의 잘못이 늘 제 앞에 있습니다.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 잘못을 저지르고
당신 눈에 악한 짓을 제가 하였기에 판결을 내리시더라도
당신께서는 의로우시고 심판을 내리시더라도 당신께서는 결백하시리이다.(시편 51,3-6)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