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창이나 친목 모임에서 서로 말을 피하는 주제는 대개 정치와 종교입니다. 서로 얼굴을 붉히고 마침내 화를 내고 싸우는 불상사는 주로 이 두 가지 일에서 일어납니다. 무릇 종교와 정치는 세상이 더 평화롭고 사람이 잘 살자고 만든 것인데 싸움으로 끝을 맺으니, 결국 인간이 문제입니다. 분노는 우리 마음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다른 어떤 성현보다 분노에 대해 많은 법문을 했습니다. 분노와 슬픔 등 우리 심성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이는 자유와 해탈을 말할 수 없습니다.
바라문 아쑤린다까 바라드와자는 경전에 이름이 남겨져 있은 것으로 보아 권위가 높은 제사장입니다. 부처님이 활동하던 당시 바라문은 제사를 주관하고, 그 대가로 재물과 토지를 받아 재산을 축적한 종교계급이었습니다. 제사의 형식이나 제사에 필요한 주문 등은 모두 베다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수천 년 내려오는 베다의 방대한 경전은 바라문교의 전통이자 권위입니다. 제사나 주문을 거부하고 탐욕과 분노에서 스스로 해탈하는 내적 성찰의 길을 가르친 부처님은 필연적으로 바라문교의 사제들과 부딪쳤습니다.
어느 날, 바라문 아쑤린다까는 자기 주위의 한 바라문이 부처님에게 귀의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분노한 바라문 아쑤린다까는 부처님을 찾아가 욕설을 퍼붓고 모욕을 주었습니다. 당시 부처님은 여러 신흥 종교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일 정도로 아직 미미한 존재였던 것을 감안하면, 권위에 상처를 입었다고 생각한 바라문 제사장의 분노는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부처님은 화를 내는 아쑤린다까에게 다음과 같이 시를 읊었습니다.
말로 거칠게 꾸짖으면서 어리석은 자는 이겼다고 생각하지만,
인내가 무엇인가 안다면 승리는 바로 그의 것이다.
분노하는 자에게 다시 분노하는 것은 더욱 악한 자가 될 뿐,
분노하는 자에게 더 이상 화내지 않는 것은,
이기기 어려운 싸움에 승리하는 것이네.
다른 사람이 분노하는 것을 알고,
새김을 확립하고 마음을 고요히 하는 자는,
자신만이 아니라 남을 위하고 그 둘 다를 위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 모두를 치료하는 사람을
가르침을 모르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네.
- <아쑤린다까의 경> 쌍윳따니까야(전재성 역) 제1권 (7-1) 아라한의 품
부처님의 목소리는 담담합니다. 큰 소리로 거칠게 떠드는 자는 자기가 이겼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부처님은 인내하며 침묵을 지켰습니다. 분노를 참아내는 것은 우리 같은 범부의 입장에서 보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요. 놀라운 것은, 부처님이 침묵을 치료로 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새김(성찰)을 확립하고 마음을 고요히 하는 것은 자신의 분노를 치료할 뿐만 아니라, 화를 내는 상대방도 치료하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부처님의 시 가운데 다음 구절은 우리의 눈을 번쩍 뜨게 합니다.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 모두를 치료하는 사람을
가르침을 모르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네
부처님은 세상 사람들이 침묵하고 있는 자신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조롱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인내와 침묵은 도덕적 당위나 자기도취에서가 아니라, 분노가 자신과 타인과의 관계에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통찰해서 취한 자비의 결단입니다. 그래서 남이 어리석다고 비웃어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욕설을 퍼붓고 모욕을 주어도 도리어 고요하게 침묵하는 부처님을 본 바라문은 이윽고 부처님께 귀의했습니다. 부처님은 분노를 제어하는 것이 곧 자신을 지키는 수호자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이야말로 자신의 수호자이니,
다른 누가 수호자가 되랴.
자신을 잘 제어할 때,
얻기 어려운 수호자를 얻는다.
- 법구경(전재성 역) 자기의 품 160번 게송
나이가 들수록, 인내와 침묵은 참으로 자신을 지키는 수호자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공감하게 됩니다. 주문을 외우면 얻어진다는 신통한 힘이 자신을 지키는 수호자가 아니라, 자신의 분노를 잘 제어하는 것이 곧 자기의 수호자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오늘 우리 불자의 신행을 경책하는 큰 죽비입니다. 바라문 아쑤린다까가 만난 부처님은 욕을 먹어도 고요히 선정에 든 수행자였습니다. 부처님의 선정은 무념무상(無念無想)이 아닌, 그 속에는 성찰과 자비가 살아있습니다. 자기와 타인의 분노를 다스린 부처님의 고요함은 살아있는 선(禪)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여운 2016.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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