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半)은 절반을 뜻하면서 동시에 동반을 뜻합니다(신영복)
아프리카 대륙의 남단 희망봉에는 이름과 달리 거센 바람이 쉴 새 없이 몰아칩니다. 바람에 떠밀려 온 이랑 높은 파도가 암벽에 부딪쳐 자욱한 포말(물거품)로 일어섭니다.
이곳을 ‘폭풍의 곶(바다쪽으로 뻗은 육지)’ 대신 희망봉이라고 이름 붙인 까닭이 궁금합니다.
희망봉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절망의 섬’(백인들이 흑인을 감금한 감옥이 있는 곳)이 있습니다.
해안에서 약 6킬로미터, 뱃길로 30~40분 거리에 있는 로벤 섬이 그곳입니다.
로벤 섬에는 넬슨 만델라가 구속 기간 27년 중 17년 동안 갇혀 있던 감옥이 있습니다. 로벤 섬은 부시먼들이 물개를 잡던, 작고 한적한 섬이었습니다. 그러나 백인 통치와 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흑인 지도자들을 감금하는 감옥이 세워지면서 이 섬은 ‘절망의 섬’으로 전락합니다.
희망봉과 절망의 섬이 서로 지척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로벤 섬의 감옥이 ‘자유의 기념관’으로 바뀌고 타조와 키 작은 펭귄들이 다시 옛날처럼 한가롭게 거닐고 있습니다. 흑인 안내원은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을 모아 놓고 마치 작은 만델라(남아프리카 최초의 흑인 대통령 인권 운동가)처럼 이 절망의 섬이 꺾을 수 없었던 자유와 희망에 대하여 역설하고 있습니다.
나는 만델라 대통령이 갇혀 있던 독방을 돌아 나와 아프리카의 햇볕이 뜨겁게 괴어 있는 감옥 안마당을 천천히 걸어 보았습니다.
‘맬콤 엑스’(미국 흑인 해방 운동가)를 읽고 아마 생전 처음으로 화이트(White)와 블랙(Black)(흑인과 백인)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고 이 두 단어에 담긴 뜻의 엄청난 차이에 놀랐던 나의 감옥을 회상하였습니다.
화이트와 블랙은 단순히 색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라 선과 악, 희망과 절망의 대명사였습니다. 당신의 말처럼 희망은 절망의 땅에 피는 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희망이 다른 누군가의 절망이 되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희망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러야 한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요하네스버그에는 ‘환희의 동상’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최초로 금광을 발견한 조지 해리슨이 금광석을 움켜쥔 손을 높이 쳐들고 환호하는 모습입니다. 전 세계 금의 60퍼센트, 다이아몬드의 70퍼센트를 공급하고 있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생각한다면 그가 치켜들고 있는 돌멩이의 무게와 그 돌에 담긴 환희의 크기를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그러나 골드 리프 시티 광산에서는 다시 이 환희의 반대편을 목격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용암이 솟아오르지 않을까 두려워지는 지하 3,300미터. 나는 길고 어두운 갱도(갱에 뚫어놓은 길)에서 그 엄청난 매장량에 놀라기에 앞서 섭씨 60도의 뜨거운 열 속에서 암벽을 깨뜨리고 있는 흑인 소년들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환희의 동상과 어둠 속의 흑인 소년을 함께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누군가의 환희가 다른 누군가의 비탄이 되는 경우에도 우리는 그것을 환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지 어두운 지하 갱도에서 마음이 돌처럼 무거워집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당면하고 있는 갈등이 결코 피부색에서 연유한 것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희망과 절망, 환희와 비탄, 승리와 패배의 충돌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쌓여 온 억압과 저항의 골 깊은 상처는 쉽게 앞날을 낙관할 수 없게 합니다. 800만 백인들 가운데 400만 백인들이 흑인 대통령을 거부하면서 이미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떠났고, 남아 있는 백인들도 여전히 새로운 거주 구역을 만들어 요새화하고 있습니다. 흑백의 정면 대립과 그 위에 교묘히 사주(남을 부추키어 나쁜 일을 시킴)되고 있는 흑흑 갈등과 무질서까지 겹쳐 요하네스버그 방문은 백인이 아닌 나에게도 내내 조마조마한 것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아프리카가 생각났습니다. 유럽이 복잡한 국경선 때문에 나라를 찾기 어려웠음에 비하여 국경이 직선으로 되어 있는 아프리카는 나라를 찾기가 쉬워서 좋아했던 초등학교 시절이 회상되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300년 동안 단 한 번도 ‘동반자’가 되어 본 적이 없습니다. 일체의 교육과 문화에서 완벽하게 격리되어 오로지 흑인 노동으로서만 의미를 부여받았습니다.
식민과 억압의 과거가 곧 오늘의 갈등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문제는 비단 남아프리카 공화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아프리카 대륙의 문제이며, 도처에 남아 있는 20세기의 상처입니다. 동시에 21세기의 과제와 맞닿아 있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과제는 결국 희망과 절망의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희망과 절망, 환희와 비탄, 승리와 패배에 대한 역학적 패러다임(인식 체계)을 넘어서 희망과 절망의 관계를 처음부터 재건하는 일입니다.
아프리카에서 당신의 피아노 연주를 듣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었지만 내게는 참으로 뜻깊은 것이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듣는 피아노 선율은 내게 흑과 백의 조화를, 그리고 반음과 온음의 조화를 깨닫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피아노 선율은 흑백의 건반이 서로가 도움으로써 이루어 내는 화음을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흑과 백의 대립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맺고 있는 모든 갈등에 관하여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피아노는 우리에게 반음(半音)의 의미를 가르칩니다. [반(半)]은 절반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반(伴)을 의미합니다.
동반(同伴)을 의미합니다. 모든 관계의 비결은 바로 이 반(半)과 반(伴)의 여백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절반의 환희’는 절반의 비탄과 같은 것이며, ‘절반의 희망’은 절반의 절망과 같은 것이며, ‘절반의 승리’는 절반의 패배와 다름없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절반의 경계에서 스스로를 절제할 수만 있다면 설령 그것이 희망과 절망, 승리와 패배라는 대적(對敵)(적대적으로 겨룸, 또는 사람)의 언어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동반의 자리를 얻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칼날 같은 우리의 관계(대적의 관계)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하는 새로운 동락(同樂)의 공간(즐거운 공간)을 열어 나가기 바랍니다.
핵심정리 갈래 수필/성격 체험적, 성찰적, 설득적
특징 피아노 연주에서 깨달은 것을 전달, 타자를 배려하는 가치관 전달
주제 더불어 사는 삶의 자세, 타인을 배려하는 삶의 자세, 더불어 사는 동반(同伴)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 타인의 삶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자세의 필요성.
활동> 로벤 섬을 절망의 섬으로 부르는 이유는?
평화롭고 한적한 섬 로벤섬은 백인의 통치로 흑인 지도자를 감금하는 감옥이 세워졌기 때문
활동> 골드 리프 시티 광산의 지하 갱도에서 작가의 마음이 무거워진 이유는?
환희의 동상을 보며 어두운 지하갱도에서 읽하는 흑인 소년 노동자를 생각
누군가의 환희 뒤에는 누군가의 절망과 비탄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활동> 작가가 그린 아프리카 그림이 뜻하는 바를 작품과 관련지어 설명?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여행하면서 흑백의 갈등과 대립을 떠올리고 피아노의 선율이 가르쳐 주는 흑과 백의 조화, 반음과 온음의 조화가 우리에게 필요함을 말함. 그림 속 피아노의 흑백 건반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질 때 아름다운 선율을 만드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타자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이루어질 때 동반(同伴)의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일깨워 주기 위함이다.
<이해와 감상>넬슨 만델라의 조국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17세기 중반부터 백인들의 지배를 받으며, 많은 흑인이 빈곤과 질병, 무지 속에서 살아왔다. 만델라는 ‘아파르트헤이트’라는 ‘흑백 분리 정책’으로 악명 높았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차별 정책을 종식시키며 흑인 다수 사회인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흑인이 자유를 얻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그 결과 1993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이듬해 남아프리카 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대통령이 된 이후 흑인을 잔혹한 방법으로 탄압한 가해자들을 용서와 화해의 정신으로 사면하며 과거사를 청산하였다.
작가는 과거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겪었던 대립과 갈등의 해결책을 피아노의 조화로운 선율에서 발견하고 있다. 피아노가 흑백 건반들의 조화를 통해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 내듯이 ‘반(半)에 담긴 ’동반(同伴)의 의미를 통해 타인의 절망과 비탄을 이해하고 배려할 때, 우리가 사는 세계의 많은 대립과 갈등이 해결되면서 진정한 동락(同樂)의 공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작가의 삶에 대한 관점은 개인적 성향이 점점 두드러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자신과 다른 상황에 처해 있는 타자를 배려하는 삶의 가치를 일깨워 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