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의미
초가을 밤이었다. 여름 한창 북적이던 바닷가 도시는 이제는 조용히 나뭇잎들만 켜켜이 쌓이고 있었다. 관광객으로 붐비는 여름에 파견되지 않아 다행이다 생각하며 여유롭게 저녁 식사 후 커피를 홀짝였다. 그날은 2년 차인 나 혼자 응급실 당직을 서는 날이었다. 제발 아무 일도 없기를, 이 여유로움이 내일 아침까지 지속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당직실로 가는 비상계단을 천천히 오르는 중이었다. 느낌이 좋았다. 여름이면 놀러 왔다가 갑자기 아픈 아이들로 더 바쁠 때도 있지만 그날의 응급실은 공기부터 가벼웠다.
그 가벼운 공기를 찢고 울려 퍼지는 소리.
“씨피씨알 코드레드 응급실 씨피씨알 코드레드 응급실!”
내 귀를 의심했다. 코드레드? CPCR 방송은 간간이 들렸지만 보통 Code blue로 성인 심정지 상황을 알리는 방송이었고 소아청소년과 레지던트인 나와는 상관없는 소리였다. Code red는 소아 심정지 상황을 알리는 병원 내 방송이었다. 그 방송을 듣자마자 심장은 빠르게 달리고 내 다리도 달리기 시작했다. 파견 나온 이 한적한 병원에서는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들을 수 있는 방송인데, “제발 취소 방송이 떠라 떠라!” 속으로 외치면서 응급실로 달려갔다. 응급실 소생실에서는 아무 일도 아니길 바랐던 나의 간절함을 무시한 채 분주한 사람들의 음성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사람들을 헤치고 나아가 마주친 것은 붉은 덩어리, 그리고 피비린내였다.
옆에서 다급한 목소리로 누군가가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엄마는 태국인 이주 노동자인데 화장실에서 아기를 출산한 채 의식을 잃었나 봐요. 공장 사장님이 발견하셨더라구요.”
아기는 태반과 연결된 채 차디찬 화장실 바닥에 30분가량 방치되어 있었다고 했다 첫울음을 울기는 했을까? ‘왜 하필 내가 당직일 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속으로 거의 엉엉 우는 가련한 전공의와 그 앞에 놓인 핏덩어리. 벌벌 떨리는 손으로 기관 삽관을 시도하려는 때 다행히 당직 교수님도 방송을 듣고 뛰어 내려오신 거였다. 교수님의 다급한 처치 후 한차례 다시 내가 상황을 교수님께 설명드렸고, 몇 차례의 심폐소생술과 기관 삽관 이후에 맥박은 아주 느리지만 돌아왔다. 아직도 태반과 연결된 채 달려 있던 탯줄을 자르고 핏덩어리는 신생아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아기는 전혀 움직임이 없었고 모든 뇌간 반사도 나타나지 않았으며 혈액검사는 처참했다. 죽었다고 해도 이상치 않았다. 중심정맥관도 넣고, 이미 저체온이었지만 뇌 손상을 막기 위해 저체온 치료도 하고,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보았다. 흡사 밑 빠진 독에 물을 붓고 있는 심정이었다. 당직 교수님과 함께 불면의 밤을 보내며 소위 말하는 ‘망한’ 당직을 보낸 나는 1시간 정도 쪽잠을 자고 일어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동공반사 확인을 위해 펜 라이트를 비춰봤다. 뇌간의 기능이 살아 있을 때 반응하는 동공의 움직임이 살짝 보이는 것 같았다.
“교수님! 동공반사가 있는데요. 혈액검사도 조금은 나아졌어요.”
신이 나서 종알대는 내 옆에서 어제 함께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었던 동료들은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그게 앞으로 어떤 최악의 상황을 만들게 될지 모른 채.
핏덩어리였던 아기는 여전히 아무런 움직임도 자발 호흡도 없었지만 조금씩 사람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며칠이 지나고 몸을 추스른 태국인 엄마가 딱 두 차례 찾아왔다. 복잡한 상황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그 엄마는 우선 태국에 이미 두 명의 아이가 있었다. 1년 전쯤 사귄 태국인이 아빠인지 그 뒤에 사귄 러시아인이 아빠인지 본인도 확실치 않다 말하며, 아빠가 누구인지 알아도 둘 다 지금은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도 출생 신고를 해준 엄마 덕분에 아기는 이름이 생겼다. 그리고 두 번째 만남에서 엄마는 자신은 이 아기를 키울 수 없고 태국에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 엄마 입장에서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결정이었다. 아기는 자발 호흡이 어려웠고 한 번씩 경련으로 의심되는 팔다리의 떨림 외에는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불행히도’ 뇌간 반사가 나타나고 뇌사를 뜻하는 평탄뇌파 소견이 보이진 않았기에 아기는 뇌사 판정도 받을 수 없었다. 그저 살아 있었다. 으레 뇌 병변 환자들이 그렇듯 경련을 했고 항경련제를 복용하게 되었다. 한 차례의 협진 수술로 아기는 기관 절개술과 위루관 삽입술을 받아 목과 배에 구멍 두 개를 가지게 되었다. 인공호흡기를 달고 위루관으로 분유를 먹기 시작했다.
두 번의 만남을 끝으로 엄마는 떠났다. 덩그러니 신생아 중환자실에 남겨진 아기 덕분에 어른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계속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병원비. 이 아기를 어디로 보내야 되는지, 아니 갈 수는 있을지 나는 여기저기 매일 전화를 했다. 서울의 공공병원이나 그 지역의 권역센터에서도 이런 경우는 외국인이고 연명 치료가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에 받아주기 어렵다고 하였고, 보육원에는 말도 꺼내지 못했다. 서울 본원 법무팀에까지 전화해서 내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지만 방법은 없었다. 다들 안타깝다는 말투로 ‘어쩔 수가 없네요.’라는 말뿐이었다. 아기는 살아서 어른들의 짐이 되었다.
아기는 답답한 우리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쑥쑥 자랐다. 파견 나왔던 나는 서울로 돌아왔고 파견 나간 동기들로부터 그 아기의 소식을 가끔 전해 들었다. 태어난 지 백일이 되어 신생아 중환자실의 가장 큰 형님이 되었다. 정이 넘치는 간호사님들이 준비해준 기저귀 케이크와 찍은 백일 기념사진도 전해 받았다. 손발 모두 축 처진 채 신생아 중환자실에 안 어울리는 큰 아이 사진을 본 기분은 묘했다. 기뻐해야 하나, 슬퍼해야 하나. 그래도 그 아기의 백일을 축하해주는 이가 있음은 왠지 모를 위안이 되었다. 그 뒤로 마지막 들은 소식은 신생아 중환자실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 커버려 소아 중환자실이나 병동으로 옮겨야 되는데 누구도 담당 교수가 되려고 나서지 않고, 어느 곳에서도 받으려 하지 않아 난감하다는 소식이었다. 뒷일은 모른다. 알려고 노력한다면 알 수 있지만 그 어떤 것도 즐거운 소식은 아닐 듯하여 그만두었다. 결국 내가 살리려고 노력했고 살아나서 기뻤던 아이가 어느 곳에도 있을 곳이 없어 부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내게 죄책감을 가지게 했다.
전공의 시절 신생아 중환자실 교수님이 쓰신 글을 본 적이 있다. 정확하게는 기억나지 않지만 미숙아를 열심히 살려냈지만 뇌 병변으로 느린 발달, 미숙아 망막증, 기관지 폐 이형성증으로 불안정한 호흡 등 수많은 후유증이 남은 아기를 보며 ‘살려내서 미안하다.’라고 말하는 글이었다. 그런 아이들은 꽤 있었다. 정말 의료행위가 이 아이의 삶을 연장해서 이 아이에게 도움이 되었을까? 그 아이는 괴로웠더라도 남아 있는 가족들에게는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을까? 고민되는 많은 순간들.
의사라는 직업은 사람을 살리는 일인가 사람을 괴롭지 않게 하는 일인가? 만약 후자라면 나의 길은 한참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100일 넘게 퇴원하지 못했던 말기 암 환자 소년. 마지막으로 집에 돌아가 자신의 방에서 죽고 싶다고 했지만 나는 집에 보내주지 못했다. 병원에서 수많은 진통제와 수액과 산소 줄을 달고 죽었다. 폐가 지속적으로 나빠져 중환자실에 누워 있던 16세 소녀는 사이다가 먹고 싶다고 간절히 부탁했다. 호흡이 안정적이지 못해 금식 중이던 그 아이에게 나는 사이다를 주지 못했고, 영영 마시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내가 온전히 결정할 수 없는 순간들이지만 그 순간들은 선명하게 남아 불쑥불쑥 손끝에 박힌 가시처럼 찔러온다.
튜브로 밥을 먹고 누워서 10년 이상 지내는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내 아이에 대해서만큼은 거의 의사 수준이다. 이 표정은 여기가 아파서, 이 표정은 기분이 좋아서, 지치고 무거운 부모의 손, 남들보다는 더 늙어버린 얼굴, 그래도 아이를 바라보는 눈에는 사랑이 있다. 그 아이의 고단한 삶의 한 조각이라도 부모에게 행복이고 기쁨이 된다면 의미가 있겠지 스스로를 다독여왔다.
하지만 이 아이는 사랑을 줄 부모도 없었다. 잠시라도 흔들리는 초록 나뭇잎이나 파란 하늘을 본 적도, 계절이 바뀌는 냄새, 꽃향기를 맡은 적도, 혀로 새콤달콤한 과일의 맛을 느껴본 적도 없다. 그것이 못내 가슴에 사무쳤다. 이 아이의 삶의 의미는 무엇에서 얻어야 하는지
‘살려서 미안하다. 너에게 이 고통의 삶을 계속 살아가게 해서 미안하다.’ 아주 가끔씩 그 아이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그런 생각이 파도처럼 밀려든다. 그 파도에 잠겨 숨이 막히는 듯하다. 이제 세상을 떠났을 수도, 아직도 그 좁은 침대에 누워 있을 수도 있겠지 짐작만 할 뿐인 삶. 그래도 만난다면 이 한마디는 하고 싶었다. “네 살았던 그 순간만큼은 나에게 기쁨이었어.” 너의 괴로운 삶에 조금의 의미라도 줄 수 있다면.
- 2022년 보령의사수필 동상 당선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