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유한 성품을 기르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온유의 덕을 기를 수 있을까요? 온유의 특성을 잘 이해하고 기억하며 그대로 살려고 마음을 쓰는 것입니다. 온유는 하느님께는 겸손하게 그분의 뜻에 순명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폭력적인 수단을 거부하고, 자신의 본능적 충동과 격정을 다스리며, 특별히 화를 내어야 할 상황과 그렇지 않은 상황을 잘 구분해서 신중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어느 것도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뜻과 의지를 과감히 포기하고 주님의 뜻과 의지에 완전히 복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별히 분노가 폭발하는 상황에서 격정을 누르고 다스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령께서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온유는 성령께서 맺어주시는 열매입니다.(갈라 5,23 참조) 온유의 덕을 기르기 위해서는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에게 배워야 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성질이 급해서 천둥의 아들이란 별명을 얻은 요한이 사랑과 온유의 사도로 바뀔 수 있었던 것은 온유하신 주님의 멍에를 메고 그분에게서 배웠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멍에를 멘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멍에는 쟁기나 달구지를 끌 때 소 목에 거는 막대를 말하는데, 팔레스티나식 멍에는 양쪽 끝에 소의 목이 들어가는 큰 고리가 있어서 멍에가 떨어지는 것을 막아줍니다.
유다 사회에서 멍에는 은유적 표현으로도 사용되어 남자아이가 성인식 때 들고 있는 토라 곧 율법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멍에를 멘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 곧 율법을 완성하는 새로운 가르침에 자신을 봉헌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실제로 초대교회 가르침인 <디다케>에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율법의 멍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멍에는 인간을 구속하는 유다교의 율법과는 달리 사랑과 섬김, 생명과 자유를 누리는 멍에입니다. 그리고 이 멍에는 무겁지 않고 편합니다.(1요한 5,3; 마태 11,30 참조)
마지막으로, 소중하고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온유하고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 우리가 배워야 할 지혜는 무엇일까요? 논쟁하지 않고 상대방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아빠스 마토에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누군가 어떤 주제에 대해 얘기할 때 논쟁하지 마십시오. 그의 의견에 동의하면 ‘맞다’라고 하고, 동의하지 않고 또 그가 틀렸을지라도 ‘무슨 일을 하시는지 알겠습니다’라고 하십시오. 논쟁하지는 마십시오. 그것이 온유요 겸손입니다.
논쟁하지 않는 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샌드Ilse Sand는 그의 책 <센서티브>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매우 민감한 사람이라면, 당신의 에너지 수준은 한계가 있어서 갈등에 할애할 에너지가 부족하다. 논쟁은 오랜 시간 신경 시스템의 균형을 흔들어 놓을 것이다. 불필요한 논쟁은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온유하게 살기 위해 꼭 필요한 지혜는 함께하는 사람의 한계를 생각해 화를 내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을 때까지 자기 생긴 모습 그대로 살게 되는데, 그 사람이 나와 맞지 않는다고 화를 내며 언쟁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충분히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상대방이 아무리 답답하고 싫고 짜증스럽다 해도 그 사람을 바꿀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결코 바뀌지도 않는다는 것을! 부정적 느낌들을 마음에 담고 있으면, 내 시간과 에너지만 소진될 뿐이고 온유한 삶을 살 수 없다면 결국 나만 손해인 것입니다.
모든 형제를 똑같이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앙심과 미움 없이
모든 형제를 온유하게 대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 사막의 교부 에바그리오
첫댓글 아멘.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