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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매혹시킨 서경식의 문장들
오늘은 고 서경식(1951~2023) 선생의 2주기다. 그가 나가노 산장 집 근처 온천에서 저 세상 사람이 된지 벌써 2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는 최근 몇 년 사이에 세상을 뜬 여러 학자나 작가, 예술가 중에서 아직도 가장 애틋하고 진하게 내 마음에 남아 있는 존재다. 가끔 '이런 상황에서 서경식이라면 어떻게 생각했을까.' 같은 물음을 던질 때가 있다. 그만큼 그의 글과 책이 내 마음을 흔들었기 때문이리라
지난 해 3월 15일에 열린 강연 <나를 매혹시킨 서경식의 문장들>은 지금까지 읽은 서경식의 책 속에 나오는 문장 중에서 내 맘에 각별하게 새겨진 인상적인 문장들을 참가자들과 함께 읽으며 진행했었다. 바로 그 문장들을 이곳에 소개하고 싶다...(마지막 23번 문장은 경향신문에 발표한 서경식 선생 추모사의 한 구절이다.)
연말에 서경식이 젊은 날 자주 거닐었던 도쿄 진보초에 갈 예정인데, 이제 도쿄에 가도 그를 만날 수 없다. 참으로 허전하고 슬픈 마음이다. 부디 그가 하늘나라에서만큼은 편안히 잘 지내고 있기를...
1.
<“형, 나 지금 루브르 미술관에 와 있어. 언젠가 형이 편지에서 이야기한 미켈란젤로의 「빈사의 노예」와 「반항하는 노예」를 보고 있단 말야. 형이 직접 볼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말이 적힌 그림엽서를 형에게 보낼 작정이었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
2.
<진보는 반동을 부른다. 아니 진보와 반동은 손을 잡고 온다. 역사의 흐름은 때로 분류(奔流)가 되지만 대개는 맥 빠지게 완만하다. 그리하여 갔다가 되돌아섰다가 하는 그 과정의 하나하나의 장면에서 희생은 차곡차곡 쌓이게 마련이다. 게다가 그 희생이 가져다주는 열매는 흔히 낯 두꺼운 구세력에게 뺏겨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헛수고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런 희생 없이는 애당초 어떠한 열매도 맺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역사라고 하는 것이다. 단순하지도 직선적이지도 않다. 이 사실을 정말로 이해하는 일은 간단치 않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
3.
<잘 살지 못하는 예술가한테서는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없다. 이것은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지만, 여기서 ‘잘 산다’는 것은 ‘착하다’거나 ‘모범적’이라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예컨대 샤임 쑤띤(chaim Soutine)은 내가 유달리 좋아하는 화가의 한 사람인데, 시민적 도덕의 기준으로 보면 빈말로라도 모범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잘 산다’는 것은, 쑤띤이 그러했듯이, 무엇보다도 창조의 욕망에 충실하게 산다는 뜻이다.> (<청춘의 사신>)
4.
<그때 나는 이미 30대 중반을 넘어섰지만, 부모님이 두 분 다 세상을 뜨신 직후였고, 나 자신은 가족도 일정한 직업도 없었다. 나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승리를 기약하기 어려운 지루한 투쟁, 이루지 못한 꿈, 도중에 끝나버린 사랑, 발버둥치면 칠수록 서로 상처밖에 주지 않는 인간관계, 구덩이 밑바닥 같은 고독과 우울, 그런 것뿐이었다. 내가 너무 보잘것없다는 생각에 끊임없이 시달리면서, 그래도 이 세상에서 무언가 의미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어떻게 살면 좋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모든 것이 막연했다. 죽고 싶다고 절실하게 생각한 적은 없지만, 죽음이 항상 내 곁에서 숨쉬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청춘의 사신>)
5.
<지금도 이따금, 위기를 모면하고 용케 책장과 서랍 속에 살아남은 낡은 책들을 펼쳐들 때가 있다. 낙서와 손때로 지저분해진 책을 한 장 한 장 들추고 있노라면, 어린 시절 기뻐하고 슬퍼하던 감정들이 가슴 깊은 곳에서 어수선하게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성장에 대한 동경과 두려움, 자부심과 열등감, 희망과 실의가 격렬하게 교차하던 그 나날들이.> (<소년의 눈물>)
6.
<이마이는 누가 보더라도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손쉬운 땅볼을, 그것도 내 정면에다 데굴데굴 천천히 굴려주었다. 그러나 나는 그마저도 연거푸 뒤로 빠뜨려버리고 말았다. 이때만큼은 마음에 얼마간 상처가 남아 ‘내가 그러면 그렇지’ 하고 좌절했지만, 그래도 ‘이제 집에 돌아가 책을 읽을 수 있겠구나’ 생각하니 웬지 모르게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으며 안도감이 들었다.> (<소년의 눈물>)
7.
<대학을 졸업하고 3~4년이 흘렀을 무렵, 나는 어느 지방 도시의 파친코 가게에서 수습사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한때는 마작장에서 주임 같은 일도 했다. 나는 곧 그 방면에 전혀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그렇다고 다른 대안도 없었다. 고통 속에서 하루를 끝내고 파친코 가게 2층 숙소에서 우울하게 옆으로 웅크려 누웠을 때에도 이따금 루쉰을 읽었다.> (<소년의 눈물>)
8.
<얼마 전, 세계화가 진전되고 인구 이동이 급격히 증가함에 따라 국민국가의 문턱이 차츰 낮아져 결국 소멸하리라는 관측이 회자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소박한 낙관론에 지나지 않았다. 오늘날 점점 많은 사람들이 디아스포라가 되어 세계를 유랑하고 있지만, 국민국가의 장벽은 여전히 견고하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지구를 둘러싼 그 높고 무자비한 분리장벽을 보라. 그 벽은 팔레스타인인들의 땅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내면까지도 무참히 가르고 있다.> (<디아스포라 기행>, 2006)
9.
<왜 모든 것이 이렇게 어색하고 딱딱한가. 아무리 해도 더 자연스럽게 살 수는 없는 걸까. 그 원인이 나 자신이라는 외곬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봐도 자의식이 너무 강한 것 같은 나 자신을 애처로워하고 미워했다.> (<디아스포라 기행>)
10.
<사이드는 “멸망할 운명임을 알고 있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고 말한다. “거의 승산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진실을 말하려는 의지”를 표명했다. 마치 한 편의 시와도 같은 말이다. (…) 사람은 승리가 약속되어 있어서 싸우는 것이 아니다. 불의가 넘쳐나기 때문에 정의에 대해 묻고, 허위가 뒤덮고 있기 때문에 진실을 말하기 위해 싸운다.> (<난민과 국민 사이>)
11.
<나도 대학을 졸업하면 한국에 모국 유학을 할 예정이었다. 아니, 본시 해방 후 부모가 일본에 잔류하지 않고 조국으로 귀환했다면,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 자랐을 것이다. 내가 ‘이편’에 있는 것은 단지 우연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그 우연의 행운을 꺼림칙하게 느끼고 있었다. 일하는 척하거나, 책을 읽거나, 한 여성이 좋아지거나, 때로는 친구와 술을 마시거나, 요컨대 ‘이편’의 흔한 일상을 살면서도 마음은 언제나 ‘저편’의 짙은 그림자에 휩싸여 있었다. 가령 내 형제가 아니었다고 해도 누군가가 시시각각 고문을 받고 있는데 일과 취미, 식사와 섹스, 즉 일상생활에 어떤 의미나 중요성이 있다는 걸까……>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12.
<해방 뒤 우리 아버지가 일본에 남지 않고 조국으로 돌아갔다면 나도 이 아이들처럼 구걸하고 껌팔이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시대를 건너는 법: 서경식의 심야통신>)
13.
<자식들이 재판을 받던 날 부모는 서울까지 방청하러 갔다. 거기서 아버지가 목도한 것은 심한 화상으로 얼굴에 붕대를 둘둘 감은 아들의 모습이었다. 말없이 교토의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가 방바닥에 퍼질러 앉아 다다미를 치며 호곡하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 아버지를 인생의 승자라고 부를 만한 구석은 어디에도 없다. 아버지는 강하지도 영웅적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고단했던 인생에는 식민지배와 민족분단의 역사가 아로새겨져 있다. 그것은 바로 이 민족 역사의 일부다. 아버지 이름은 서승춘이다.> (<시대를 건너는 법: 서경식의 심야통신>)
14.
<인간과 사회의 복잡함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고, 흑백론으로 재빨리 단정 짓고 마는 것처럼 안이하고 위험한 태도는 없다. 오히려, 당연하다고 굳게 믿고 있는 전제를 다시 한번 의심하고, 보다 근원적인 곳까지 내려가서 다시 생각해 보는 것, 간단히 답을 얻을 수 없는 답답함을 견디며 끊임없이 묻는 것, 자신을 기존 관념의 지배에서 해방시켜 기어이 정신적 독립을 얻어 내는 것, 이것이야말로 참된 지적 태도라고 나는 믿는다.>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15
<형들이 감옥에 있을 때 본인들은 모르지만 솔직히 저는 별 내용도 근거도 없는 격려, “아, 내일은 좋은 날이 올 거예요.”하는 그런 말이 제일 듣기 싫었어요. 처참하고 참혹하고 희망이 거의 없는 상태를 바로 보지 않고 안이하게 위로만 구하려고 하는 나 자신의 나약함도 싫었고, 또 남을 그런 식으로 위로해서 자기만족을 느끼는 사람들도 싫었습니다. 그런데 싫다는 말은 안 했어요. 상대방의 성의를 봐서 싫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어요. 대신 저는 자폐증처럼 지냈지요. (…) 나는 왜 내용이 없는 격려보다 아주 어두운 루쉰을 좋아하고 있을까라는 것을 다시금 생각해 보았습니다.>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16.
<고독한데도 왜 하는가. 그것은 예술의 본질과 깊이 관계가 있습니다. 직접적이고 즉물적이며 당장의 목표만 득이 되는 것을 추구한다면, 고독은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받아들이는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더라도,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더라도, 아무리 불러도 좀처럼 대답해주지 않더라도,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은 필시 보편적인 일이라고 믿는 신념이 필요합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에게 그 신념은 가닿을 수 있습니다. 혹은 백년 후의 인간들에게 가닿을지도 모릅니다. 그걸 위해서 자신의 지금이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것이 예술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고뇌의 원근법>)
17.
<내 글을 읽은 사람들로부터 가끔은 “지나치게 가혹하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영락없이 나는 우에노 지즈코, 하나자키 고헤이, 이양지, 박유하, 와다 하루키, 그 밖의 사람들에 대해 주제넘게도 ‘가혹하게’ 썼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나라는 인간이 타인을 비난하고 규탄하는 것을 좋아해서가 아니다. 나는 오히려 소심한 평화주의자다. 내가 ‘가혹한’ 것이 아니라, 재일조선인이-모든 조선 민족이-처해 있는 상황이 ‘가혹한’ 것이다. “그래도 그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이에요”라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소리가 또 들려온다. 좋은 사람? 그럴지도 모른다. 구일본군의 병사도, 천황 히로히토도 개인으로 보면 ‘좋은 사람’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응답은 빗나간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다. 식민주의 피해자들이 요구하는 것은 ‘좋은 사람’이냐 아니냐와 관계없이 계속되는 식민주의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인 것이다.> (<언어의 감옥에서: 어느 재일조선인의 초상>)
18.
<일생에 단 한번만, 그렇게 마음먹었다. 단 한번만 브뤼헐, 뒤러, 렘브란트, 이딸리아 르네상스의 거장들, 그리고 고흐의 작품 실물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현장에서 진짜 음악을 들어보고 싶었다. 나는 이제 죽든지, 형들처럼 옥중생활을 하게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이도저도 아닌 설익은 생활을 앞으로도 질질 끌고 가게 될지 예측할 순 없었지만, 어떻게 되든 그 전에 단 한번만이라도 본고장에서 진짜를 보고 싶었다.> (<나의 서양음악 순례>)
19.
<젊은이들이여, 기성관념의 주술에서 스스로를 해방시켜라. 시야를 넓히고, 이 세상에는 어른들이나 권력자들이 권장하는 것과는 다른 삶의 방식, 다른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닫기 바란다. 기존의 거대 담론에 의지할 수 없는 시대에는 누군가 지도자 같은 인물을 찾아내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자연스런 이치다. 하지만 설사 외롭고 불안하더라도 오히려 지도자 같은 인물을 의심해보는 태도, 집단에 의지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자율적으로 판단해보는 태도를 키우기 바란다. 외로움이나 불안은 존엄한 개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대가인 것이다.> ('디아스포라의 눈', <한겨레> 2008, 3.14)
20.
<반파시즘 투쟁을 떠맡았던 전후 이탈리아의 풍요로운 지적 문화를 형성했던 세대는 거의 퇴장했다. “가장 뛰어났던(最良) 인간들”은 거의 세상을 떠났다. 지금은 조야하고 천박한 포퓰리스트들의 거칠고 사나온 목소리들이 사회를 휘어잡으려 하고 있다. 전 세계에서 이민 배척을 외치는 극우 세력이 대두하고 있다. 그런 현상은 이탈리아에 국한된 게 아니다. 일본에서도 심각하다. 나탈리아 긴츠부르그와 프리모 레비가 지금 살아 있다면 무슨 말을 할까.> (<내 서재 속 고전>)
21.
<엄혹한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용기를 잃지 말고, 얼굴을 들고, ‘진실’을 계속 얘기하자.> (<한겨레>, 2023년 7월 6일)
22.
<그래도 이 책을 쓰면서 당시의 나, 극동에서 정치범 가족인 젊은이에게 소박한 선의를 갖고 다가와준 사람들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그런 사람들의 작은 힘이 세계를 바꾼다.” 따위의 이야기를 할 수는 없다. 그렇게 말하기에는 나는 너무나 암흑만을 보고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또는 아직도 더 크고 깊은 암흑을 볼 일이 남아 있는지도.
하지만 나는 지금도 전혀 나아지지 않는 세계 여기저기에서 하루하루 현실에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내 경험의 작은 조각이라도 제시하여 참고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인간 그 자체에 절망하지 않기 위해. 그것이 나의 끝나지 않는 ‘인문 기행’의 한 페이지다. 2023년 12월 17일 서경식> (<나의 미국 인문기행>
23 <이제 망연한 우주에 계실 당신에게 이런 얘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보면 볼수록 그리운 사람들에 대한 추억 비슷한 생각이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탄산수의 포말같이 솟아나는 것이다.”라고 당신이 <나의 서양미술 순례>에서 적었던 것처럼 앞으로 수많은 독자가 당신과 당신의 문장을 그리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저세상에서는 부디 모든 상처와 고통을 잊고 당신이 이승에서 미처 쓰지 못했지만, 꼭 쓰고 싶은 글을 행복하게 완성하시기를 간곡한 마음으로 바랍니다. 교토 기온거리에 울려 퍼지는 낭랑한 피아노 선율의 크리스마스 캐럴을 들으며, 당신의 친구 권성우 올림.> (<삶과 죽음 사이에서: 故 서경식 선생을 기리며>, 경향신문, 2023.1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