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어스와 고지도로 주변 지형을 3일 동안 도식화해 본 결과........
고려지경이라는 비석을 세운 선춘령은 지금의 훈춘시를 지나 두만강으로 흐르는 훈춘하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험준한 산들 사이 물줄기가 세개로 갈라지는 곳에서 서쪽으로 조금 틀어진 곳에 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공험진이 있었다는 소하강은 지금의 수분하(쑤이펀강)으로 연해주 블라디보스톡 서쪽에 아무르만이 있고 그 하류로 빠지는 큰 강이 바로 그 강입니다.
그리고 공험진은 지금의 중국 동녕(러시아의 국경관문) Dongning 주변에 있었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동녕 역시 쑤이펀강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물론 조금 더 동쪽으로 위치할 수도 있습니다.
고지도를 같이 올려야 하는데 자꾸 엑박이 떠서 안되네요.
그리고 관련된 사료는 지난번 올린 세종실록지리지 경원도호부 편에 나와있습니다.
중구난방으로 신뢰하지 못했던 그 사료 내용 의외로 맞는 구석이 많습니다.
연해주의 '연해'란 말은 이미 그 당시에도 사용되던 말입니다. 연해굴포라 하는 지명이 사료에 남아있습니다.
고려와 조선이 이 곳 연해주 남부지역까지 직간접적으로 통치했던 건 명확한 사실입니다.
블라디보스톡과 두만강 사이 바다에 떠 있는 섬들까지 기록으로 남겨두었더군요.....
해도(海島)가 다섯이니,
초도(草島)【부의 동쪽에 있다. 예전에 호인(胡人)이 목마(牧馬)하던 곳인데, 속설에 전하기를, “좋은 말[良馬]이 난다.”고 한다. 그 옆에 소초도(小草島)가 있다.】
적도(赤島)【부의 동쪽에 있는데, 육지와의 거리가 1리이다. 닭[鷄子]을 기른다.】
난도(卵島)【적도(赤島) 남쪽에 있는데, 뭇 새들이 알을 낳아 기른다.】
후라두도(厚羅豆島)【난도(卵島) 동쪽에 있는 데, 육지와의 거리가 30리이다. 역시 뭇 새들이 알을 낳아 기른다.】·
시반두대도(時反豆大島)【후라두도(厚羅豆島) 동쪽에 있는데, 육지와의 거리가 1리이고, 그 동쪽으로 3백 40리쯤이 수빈강(愁濱江)이다. 동쪽으로 바다 가운데에 섬들이 있으니, 대개 1백 개나 되며, 그 모양이 바둑[碁]을 벌여 놓은 것 같다. 새와 짐승들이 많으므로, 야인(野人)들이 간혹 사냥을 행한다.】이다.
참고로 아래 뉴스메이커에 실린 글을 달아놓겠습니다.
명나라가 건국된 이후 두만강 이북에 대한 중국의 영유권 주장이 본격화했다. 원나라 멸망 이후 옛 공험진 지역은 여진족 거주지로 대토호였던 태조 이성계의 세력권에 있었고, 조선 건국 이후에도 영향력에는 큰 변화가 없는 상황이었다. 조선 태종 3년인 1403년, 명의 영락제는 왕가인을 만주지역의 여진에 보낸다. 건주위(建州衛)를 설치해 여진족을 직접 관할함으로써 이 지역을 편입하겠다는 의도였다. 조선과 명나라 사이에 영토분쟁이 발아하는 중대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이에 태종은 영춘추관사 하륜과 지춘추관사 권근에게 명하여 고려의 〈예종실록〉에서 윤관이 여진을 치고 변경에 (선춘령)비를 세운 것을 조사하게 하였다. 그리고 사료에 따라 지도를 작성하는 한편 계품사 김첨을 명나라에 보내 공험진 이남의 여진족은 조선 관할임을 주장하였다. 결국 명은 태종 4년 10월, 공험진 이남 지역을 조선 영토로 인정한다. 이는 고려의 옛 영토를 그대로 이어받겠다는 조선 초기의 영토의식을 고스란히 드러낸 사건이다.
공험진이 우리 영토의 경계라는 인식은 세종 때에 최고조에 이른다. 〈조선왕조실록〉 등을 살펴보면 윤관의 동북 9성에 대한 세종의 관심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