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계 2:12)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사 11:1, 4)
성경에 기록된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좌우에 날이 선 칼과 같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그분의 입의 말씀으로 친히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이들을 죽이신다고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심판은 "발하는 빛"과 같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계시록 1장16절에서 묘사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똑같습니다.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것 같더라"(계 1:16).
하나님의 심판이 "발하는 빛"과 같다고 표현했는데, 빛의 속성은 머뭇거리지 않으며 직선적입니다. 해가 떠오를 때에 결코 머뭇거리지 않습니다. 해는 1년 365일동안 항상 일정하게 떠오릅니다. 또 빛은 초속 30만km의 속력으로 빠르게 움직입니다. 즉 1초에 지구를 7바퀴 반이나 돌 수 있는 속도로 순식간에 움직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고 말씀하실 때에는 그것이 머뭇거림이나 천천이 실행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날 갑자기 순식간에 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로운 심판이므로 그 누구도 감히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입을 열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발하는 빛"과 같다는 말은, 그들을 심판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의 목적은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기 위함이라는 것을 말씀해주는 것입니다. "빛"이라는 것은 죄나 어두움과 반대인 "공의로움"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애'(헤세드 חֶסֶד)는 잠깐만 있다가 사라지는 '아침 구름'과 '이슬'과 같다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는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인애'는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하나님을 향한 충성(믿음, 순종)"을 비롯하여 "이웃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사랑"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안팎이 똑같은 사람을 원하십니다. 겉으로는 하나님께 최선을 다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 같은데 속으로는 불의한 마음이 가득차있는 사람의 예배를 결코 받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러한 예배를 하나님께서는 가증스러워서 보기도 싫어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찌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사 1:11-17).
마태복음 9장에는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를 부르시고 그의 집에 들어가서 많은 세리와 그 당시에 죄인 취급을 받던 이들과 함께 앉으셔서 식사를 나누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라고 빈정거릴 때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2-13).
우리가 예배를 왜 드립니까? 또 하나님을 왜 믿습니까? 매일 성경을 읽고 듣고 묵상하며 기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인애의 법을 깨달아 실천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4장1-2절에서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사위와 살인과 투절과 간음 뿐이요 강포하여 피가 피를 뒤대임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없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체험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받은 사랑을 전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귀로부터 받은 저주와 복수와 살인(시기심)과 간음과 강포함 등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이유가 바로 이런 연유에서입니다. 가인은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제사를 드렸지만, 그는 표면적으로만 알 뿐 실제로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제사를 드리지 않고 자기 방식대로 제사를 드렸고, 제사를 드린 후에 동생 아벨을 죽이고싶은 마음이 생겼으며, 그런 마음을 품고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가서 만나주셔서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까지 가진 사람이었으나 그 모든 것이 그를 신앙의 길로 이끌지 못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이웃을 사랑하기는 커녕 오히려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한 뒤에 더욱 강퍅해져서 동생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형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자세로 예배를 드리는 "예배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4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리로 예배할찌니라"(요 4:23-24).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과 용서하심을 알기 때문에 그분을 경외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분의 형상대로 만드신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참 제자들은 이러한 사랑을 피차간에 하게 되어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을 뿐만 아니라 거짓말 하는 자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명백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 13:34-35).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요1서 2:4)
따라서 사랑하라고 주신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교회의 모든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미워하십니다. 그러나 안팎이 똑같이 정직한 사람이 드리는 진실된 기도와 예배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잠 15:8)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방법은 성경을 읽고 듣고 배우는 것 밖에 없습니다. 성경을 외면하고 다른 곳에서 하나님을 알겠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과 유다가 그랬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더이상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이웃을 사랑하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모순된 이야기를 하고있는지조차 모릅니다. 왜냐하면 지각이 없기 때문에 도무지 깨달을 능력이 없으므로 심히 무식한 말을 하면서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며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십계명을 비롯한 모든 계명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방법과 인간을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을 어떻게 경외해야하는 지를 모릅니다. 또한 인간 상호간에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인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율법과 규례를 주신 것이며, 그 모든 율법을 예수님께서는 2가지로 즉 하나님을 경외하며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요약해 주신 것이며, 그것을 더욱 축약해야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이며, 그 사랑을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완성했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성경 66권 전체에 스며들어있고, 그 사랑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땅에 오신 것이며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모든 정과 욕심을 못박아 죽고, 예수님과 연합되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열심히 성경을 상고하며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에 대하여 힘써 알아야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긍휼이 풍성하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오래 참으시며 우리가 회개하기를 기다리고 계시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삶 속에서 체험해야만 합니다. 그러한 배움과 체험이 없기 때문에 사랑과 공의를 실천하며 살 수 없는 것이며, 그러한 사람이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너무나 가증스러워서 받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삶과 예배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비와 긍휼을 베푸는 '인애'의 삶을 살았으며,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통하여 진정으로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한 점검이 없이 매일 다람쥐 챗바퀴 돌듯 살아간다면, 우리의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지 못하시므로 우리의 삶은 더욱 엉망 진창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비록 죄를 지으며 살아가는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이지만, 매일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점검하며 다윗처럼 애통하는 마음으로 회개한 뒤에는 다시는 그러한 죄를 범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므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의 삶이 비록 풀무불처럼 감당하기 힘든 일의 연속일지라도 그 결과는 불순물이 모두 제거된 정금같이 단련되어 반드시 하나님께서 귀한 그릇으로 사용하시며 책임져주십니다.
지금 여러분은 얼마나 긍휼한 마음으로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가족과 이웃을 돌본다는 핑계로 혹시 하나님은 둘째 자리로 밀려나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날은 인본주의의 팽배로 인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은 뒷전에 밀려나 있고, 사람들의 상처치유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그럴듯한 제목을 걸고 회개는 권하지않고 치유만 받으라고 합니다. 사랑만 받으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비싼 댓가를 치르고 주신 구원을 시장에서 팔다 남은 '떨이식의 구원'으로 바꾸어놓았습니다. 그래서 아무나 무슨 짓을 하며 살던간에 예수 그리스도만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며 미혹의 길로 이끌고 있습니다.
구원은 어떠한 것으로도 살 수 없는 값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지식이 성경 전체에 골고루 스며들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진정으로 하나님께 상달되기를 원한다면, 기도가 응답받기를 원한다면, 예배 이전에 먼저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도 모르면서 매주일 교회에 가서 예배만 드리면 무엇합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전혀 나아지지 않는 것이며, 그러면서 우리 자신의 잘못은 깨닫지 못하고 엉뚱하게 하나님만 원망하며 기도를 응답해주지 않는다는 지각이 없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 기도하며 예배드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즉 불교신자가 교회에 와서 그 동안 절에서 했던 습관대로 부처에게 기도하던 그 마음으로 대상만 하나님으로 바꾸어서 기도하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인애를 원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하여 하나님을 힘써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삶 속에서 사랑을 베풀기를 원하십니다. 용서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서로 격려하며 권면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선을 행하며 낙심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소금처럼 자신을 죽이며 부패된 곳을 성결케 하기를 원하십니다. 소금이 음식의 간을 맞추는 것처럼 우리의 말이 은혜스럽기를 원하십니다. 빛처럼 어둠 속에서 헤메는 자들에게 밝은 빛을 비추어주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여러분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지금 선택하시고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받은 은혜와 감사의 제목은?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죄인 중의 괴수인 저를 지극히 사랑하셔서 죄의 자리에서 회개시켜 주시고 의인으로 신분을 바꿔주신 그 은혜를 생각할 때에 만입이 있어도 그 감사한 마음을 어찌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으로부터 이러한 은혜를 입은 제가, 저에게 상처를 주고 저주하며 핍박한 이들에게 빚쟁이마냥 살아왔습니다. 그들을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겉으로는 크리스천이니까 용서하며 살아야한다고 말은 잘 하면서도 실제로 제 속마음은 그들을 향한 미움과 복수심이 가득 차있었습니다.
주님은 주께서 저를 용서하신 것처럼 저도 그들을 용서하며 긍휼을 베풀기를 원하시는데, 저는 성경을 안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잘 알지 못했기에 그렇게 살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이들보다 교회생활을 더 오래했고, 중직을 맡았고, 성경을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의 제 삶을 들여다보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처럼 생활할 때가 많았습니다.
주여, 저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제가 교회생활은 오래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는 별로 생각하지 않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그것을 깨닫게하여주신 주님의 그크신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교회의 모든 예배에 하나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으나, 제 삶이 공허하고 혼돈 속에 있었던 것은 알지못하는 신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진정으로 주님을 알기를 원합니다. 주님과 매일 진실된 교제를 갖고 싶습니다. 주님과 함께 매순간 아름다운 대화를 꽃피우며 주님의 뜻을 알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주께서 가르쳐주시는 주님의 뜻을 제 삶 속에서 실천하며 주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 결과가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저에게 평강이라는 것을 매순간 체험하며 살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저에게 그러한 삶이 임하도록 허락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이제부터는 진정으로 안과 밖이 똑같은 정직한 주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서 제가 드리는 기도와 찬양이 주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향기가 되게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김 수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