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정래의 ‘나라다운 나라’
-조정래 장편소설 ‘천년의 질문’
다음은 4년 전 총선이 있기 전에 작성한 글이다.
2024년 4월에 또 총선이다.
당시의 상황과는 다르겠지만 조정래 작가의 올곧은 지적은 지금도 유효하다.
다시 그때의 글을 다시보며 별반 달라지지 않은 현실이 안타깝다.
세상이 시끄럽다.
‘나라다운 나라’는 저만치 먼 곳에 있는가!
아니다.
우리 민족은 국난에 대비하는 단결된 힘이 있다. 맘만 먹으면 못할 일이 없는 민족이다.
요새, 두문불출.
조정래 작가의 ‘천년의 질문 1, 2, 3권’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희망을 보았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나라다운 나라’ 설계도다.
여기에 그의 고견을 실어본다.
<조정래 작가의 구상>
우리나라는 지난 70년 동안 온갖 모순과 갈등과 문제점들이 뒤얽히고 중첩되어 이제 심각한 위기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그 문제점들을 전면적으로 뜯어고치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는 없습니다.
오래 전부터 우리에겐 전 국민적인 동의가 있었습니다. GDP 5만 달러의 선진국이 되는 것입니다. 그 꿈을 향해 우리는 애써 노력해서 3만 달러 직전에 이르러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국가적 문제점들을 그대로 방치하고서는 절대로 5만 달러의 선진국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나라를 지배하는 5대 권력인 입법, 사법, 행정, 언론, 재벌이 서로 얽히고설켜 썩을 대로 썩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증 종양을 과감하게 수술을 해야 합니다.
그 좋은 모델이 바로 선진국을 형성하고 있는 유럽의 여러 나라들입니다. 그 나라들은 우리가 앓고 있는 종양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5만 달러를 넘어서 10만 달러에 이르는 풍요롭고 민주적인 지상낙원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지상낙원은 정치인들이, 권력기관이, 기업이나 언론이 잘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시민들이 조직적인 힘으로 단결하여 줄기차게, 끊임없이 그 권력들을 감시 감독했기 때문에 이루어낸 성과입니다.
다시 말하면 수많은 시민단체들의 연대와 연합이 치열하게 감시와 감독을 실행해 얻은 결과입니다. 뭉쳐서 외치는 시민의 힘, 그것이 문제 해결의 핵이고, 열쇠였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시민의 힘을 절절하게 체험했습니다. 마침내 촛불 혁명으로 완성시킨 역사입니다.
“유럽과 미국은 이제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배워야 한다.”
독일의 저명한 주간지 ‘디 차이트’는 최근 한국의 촛불집회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서구에서 민주주의를 수입한 한국이 원산지 보다 더 모범적으로 실천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정작 촛불 혁명에 가장 놀란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안에 이런 엄청난 선의와 용기, 우애와 연대의 정신이 숨어 있다는 것에 서로 경탄하고, 숨 막히는 경쟁과 극단적인 불평등, 약육강식과 승자독식이 지배하는 이 정글 같은 사회에서 이런 고귀한 품성을 지닌 사람들이 이렇게도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서로 경외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 자신감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계를 놀라게 한 '광장 민주주의'의 저력을, 삶의 현장으로 옮겨 '현장 민주주의'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광장의 촛불은 이제 일상의 현장에서도 타올라야 합니다.
우리는 광장에서 위대한 민주주의 혁명을 이루었지만, 정작 실제 삶이 영위되는 현장에서는 비민주적인 일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일터에서 우리는 과연 얼마나 민주주의자로 살아가고 있으며, 얼마나 민주적인 제도와 문화가 실행되고 있습니까. ‘광장민주주의’와 ‘현장 민주주의’는 여전히 비대칭적으로 괴리되어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단지 정치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최고의 문제입니다.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하며, 약자와 공감하고 연대하며, 불의에 분노하고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는 태도-이러한 심성을 내면화한 민주주의자를 길러내지 못하는 한,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는 언제든지 권위주의와 독재의 야망으로 추락할 수 있습니다.
‘정치에 무관심한 것은 자기 인생에 무책임한 것이다.’
그러니까 당신 인생의 책임을 지기 위하여 우리는 능동적인 시민단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여기서 잠깐 스웨덴 국회 전반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합니다.
스웨덴은 인구 1,000만이 조금 못 되고 GDP는 54,000달러나 되니, 정치는 국민을 최고로 잘 모시는 세계적인 모범국입니다.
세계적인 모범 국가 스웨덴식 국회가 한국에서도 실현되어야 합니다.
법치국가의 변화는 법을 만드는 국회부터 변화시켜야 합니다. 한국 국회의원은 모두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데 스웨덴에서는 그랬다가는 국민들이 절대 용납하지 않습니다. 국민 세금을 낭비하기 때문에 용납되지 않습니다.
한국 국회의원 보좌관은 여덟 명입니다. 그러나 스웨덴은 보좌관도 비서도 없습니다. 단, 두 의원당 한 명씩 국가 입법조사관을 제공합니다. 그 조사관의 보조를 받으며 의원들은 연간 수십 건씩 법안을 발의합니다. 국회는 휴일 없이 일하고, 24시간 일하는 체제입니다. 그런 봉사 정신을 잃으면 자연스럽게 탈락합니다. 근무 중인 의원들 거의 전부가 도시락을 싸 가지고 옵니다. 의원들은 식당에 오갈 시간 여유가 없기 때문에 도시락을 싸 오는 것입니다. 그들은 남녀 의원들 거의가 자전거를 타고 배낭을 메고 출퇴근합니다. 4년 임기 동안 법안 발의를 게을리한다면 엄중 징계를 받아 국회에서 쫓겨납니다.
국회의원은 또한 특권이 없습니다. 법 앞에 평등하듯 국회의원들은 근로자들과 똑같이 일할 뿐입니다. 물론 면책특권이나 불체포 특권도 없습니다. 공무 출장으로 비행기를 탈 때도 가장 싼 좌석을 이용하고, 자동차를 이용할 때도 택시는 안 타고 대중교통을 이용합니다. 그 이유는 국민 세금을 절약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출장성 외유 같은 것도 없습니다. 출장의 경우 경비 영수증을 100% 제출하고 그 영수증은 영구 보관됩니다.
선거 공약 때도 꼭 지킬 수 있는 것만, 틀림없이 자신 있는 것만 공약으로 내세웁니다. 정치는 약속을 지키는 것이라는 신조로 의원 생활을 해 나갑니다.
스웨덴의 시의원들은 국회의원들 보다 훨씬 더 큰 희생과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어떤 특권도 보수도 없이 오로지 봉사만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받는 보수가 있다면 주민들의 행복과 안전을 위해 일한다는 긍지와 보람일 것입니다.
스웨덴의 정치가 이렇게 깨끗한 것은 지난 400년 동안 피나는 자각과 노력이 있었습니다. 그 자각과 노력이란 다름 아닌 시민들의 직접적인 감시와 감독을 말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권력은 감시와 감독 그리고 견제가 없으면 반드시 횡포하고 부패하고 타락하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이 권력의 속성이고 또 인간의 속성입니다.
서유럽 여러 나라의 시민들은 서로서로 보고 배우며 그 감시와 감독 조직을 철저하게 가동하여 오늘날의 민주주의의 꽃을 피워낸 것입니다. 비영리민간단체, 시민단체가 대강 23만 2천 개입니다. 핀란드는 14만, 프랑스는 백만, 영국은 87만 개입니다.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시민단체 수도 너무 적고, 국민의 참여도 낮고, 그러니 감시 감독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가 있겠습니까?
민주국가 국민에게는 국가에 대한 의무와 권리가 있습니다.
국민이 국법을 준수하는 것은 의무이고, 국민이 위임한 모든 권력을 철저하게 감시 감독하는 것은 국민의 권리입니다.
그 권리 행사는 바로 시민단체를 통해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민단체 수만 보아도 한국인들은 국민으로서 직무유기를 너무 크게 저지르고 있습니다. 수많은 시민단체들이 심장이 뛰듯이 살아 움직이지 않고서는 그 사회와 국가는 병들 수밖에 없고 민주주의는 시들어 꽃을 피울 수 없다는 것은 절대 불변의 사실입니다.
스웨덴의 시민단체들은 기업들의 경제활동도 치밀하게 감시 감독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민주국가의 2대 권력은 정치권력과 경제 권력입니다. 그 권력들을 줄기차게 감시 감독하지 않고서는 건강성을 유지해 갈 수가 없습니다.
스웨덴에는 기업이 크고 작음을 가리지 않고 탈세를 하지 않으며, 그 어떤 편법으로도 기업이윤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기업이 편법이나 불법을 자행했다면 그날로 대대적인 불매운동이 일어나고, 그 기업은 바로 파산됩니다. 모든 기업은 투명하고 정직하게 경영해도 이익을 남길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습니다. 그 이익만으로도 기업인들은 보통 시민들보다 몇십 배에서 몇백 배 부자로 잘살 수 있습니다. 기업 모두가 전문 경영인 체제이기 때문에 경영권 세습은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새로운 나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그 과정에 언론도 큰 역할을 해내야 합니다. 언론의 적극적이고 꾸준한 유도가 시민의식을 바꾸고 시민단체 증가를 촉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라다운 나라’를 설계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 사업은 국회를 개혁하는 일입니다.
국회를 첫 번째 대상으로 삼는 이유가 명백히 있습니다.
모든 걸 법에 의하여 다스리는 법치국가에서 그 법을 만드는 곳이 국회이기 때문입니다. 국회를 완전히 혁신시키고 뒤집어 바꾸면 나머지 행정부와 사법부의 혁신은 당연히 이루어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혁신법을 혁신된 국회에서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지금까지 난공불락의 철옹성으로 군림하고 버텨온 국회를 무슨 수로 뒤집어 바꿀 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지할 사실이 있습니다. 국회 권한은 바로 국민이 직접 만들어낸다는 점을 아셔야 합니다. 다시 말해 국회의원들의 생사여탈권은 바로 우리 국민의 손에 쥐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국회의원들의 아킬레스건인 동시에 국회를 완전히 뒤집어 바꿀 수 있는 공격 포인트입니다.
시민단체의 힘으로 국회의원에 출마한 의원들에게 서약서 서명을 받는 것입니다. 그 서약서 내용은, 모델로 제시된 스웨덴 국회의원들처럼 국회의원 노릇을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그 서약서를 보고 서명하지 않을 후보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제2단계 행동이 전개됩니다. 바로 낙선 운동입니다. 근데 낙선 운동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참여연대가 이미 18년 전에 시행해서 엄청난 효과를 낸 국회의원 정화운동이었습니다. 86명을 지목해서 59명이나 낙선시켜 버렸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결성할 참여연대는 그때의 참여연대 보다 훨씬 더 강력할 것입니다. 후보들에게 뜻밖의 서약서를 받고, 그에 불응하면 낙선 운동으로 연결시킨다는 사실을 매스컴들은 대대적으로 홍보할 것입니다. 국민이 간절히 바라는 바이고, 유권자들이 나서서 서명하지 않은 후보자들을 다 떨어뜨리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탄생한 혁명적 국회는 국가 예산을 현재 3분의 1 정도밖에 안 쓰면서도 효율은 몇 배로 올리는 혁명적 법안들을 계속 만들어 내게 될 것입니다.
그 법에 따라 행정부도 사법부도 완전히 새롭게 바뀌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방치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시민 단체로서의 임무를 한시도 소홀히 하지 말고 철저하게 수행해야 합니다. 그건 다름 아닌 줄기차고 끈질긴 감시, 감독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또 하나의 거대 권력인 재벌들도 새로운 법에 따라 선진국의 대기업들처럼 특혜 없는 투명경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동안 헌법에만 있었고, 긴 세월 동안 실행되지 못했던 경제민주화가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수십 년 동안 곪고 곪아 온 재벌들의 적폐가 마침내 수술 되어 정상 경제로 회복되게 될 것입니다.
국가권력과 경제 권력이 정상화되면 하나 남은 언론개혁은 돈을 좇아 곡필을 일삼았던 구태를 버리고 새롭게 서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 문제의 5대 권력은 대수술을 끝내고, 우리나라는 존망의위기에서 벗어나는 정상국가가 되는 것입니다.
지방의회에 대해서도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방의회의 문제점은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적지 않은 보수와 함께 그 자리가 권력화해서 봉사는 실종되고, 비리의 온상이 되고 있고, 또 하나는 출장을 빙자한 외유로 모든 지자체 의원들이 해마다 말썽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스웨덴 모델대로 우리 지방의회도 완전한 무보수에, 전면적 봉사로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도 출발할 때는 무보수로 시작했습니다. 근데 보수를 주면서 문제가 야기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말썽 많은 가짜 출장성 외유는 국회고 지방의회고 완전히 없애 버려야 합니다. 세금은 국민의 피고 눈물이고 고통입니다. 업무상 꼭 필요한 해외 출장은 예외입니다.
국회가 모든 특권과 기득권을 버리고 오로지 국민 행복을 위해 봉사하는 기관으로 바뀌었으니 그다음 단계는 당연히 사법부와 행정부의 횡포, 비리, 부패를 척결하는 법과 제도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먼저 사법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국민의 사법부 신뢰도는 일본이 65%인데, 우리나라는 27%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불신도는 해마다 상승해 70%를 넘어서면서부터 국회를 따라잡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 절대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요? 바로 전관예우 때문입니다. 판검사에서 법복을 벗고 바로 변호사가 되어 전관예우 대접을 받으며 벌어들이는 돈이 엄청나다는 사실은 이미 수없이 신문에 보도되어 세상이 다 아는 사실입니다. 법과 양심에 따라 심판하고 판결해야 하는 법관의 절대 원칙을 저버리고 돈에 법도 팔고, 양심도 팔아버리는 파렴치의 극치를 보여주는 범죄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악랄한 범죄의 뿌리를 뽑는 강력한 법을 만들어야 합니다. 전관예우를 절대 금하되, 만약 적발될 때에는 종신형에 처한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법이 아무리 엄해도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 탐욕의 뿌리를 완전히 뽑아 버릴 수 있는 한 가지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미국식 배심원 제도를 모든 재판에 도입하는 것입니다. 미국식으로 본격적으로 시행해, 배심원단을 15명에서 20명 정도로 구성하면 변호사와 판검사가 결탁할 도리가 없습니다. 배심원단의 신원은 비밀에 부쳐 변호사가 알 도리가 없고 판사는 재판을 진행할 뿐 판결권은 배심원단에 있으니까 변호사가 접근하고 회유할 도리가 없게 됩니다.
그리고 배심원제는 모든 국민에게 여러 가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자기도 법관 놀이를 해봤다는 긍지감과 참여 의식 고양, 법의 엄중함에 대한 인식과 바른 삶에 대한 성찰, 민주질서와 국가에 대한 책임감 등 시민의식이 크게 강화되고 높아지는 계기가 됩니다.
검찰 권력 또한 문제입니다.
일본식 잔재가 그대로 남아있는 검찰의 지나친 권력이 계속 사법 비리의 온상이 되어왔습니다. 검찰의 권력을 분산시키고 재조정 하는 법을 반드시 만들어야 합니다. 경찰 위에 군림하는 검찰이 바로 대표적인 일본식 잔재인데, 그 두 권력을 균등한 수평 관계로 만들어야 하는 건 필수입니다. 검찰과 경찰이 서로 견제와 협조의 관계를 유지해야만 검찰의 오래된 횡포와 비리를 근절시킬 수 있습니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사법 불신에 대한 지독한 조롱인 ‘유전무죄 무전유죄’에 동의한 사람들이 91%나 되었습니다. 이건 사법 불신의 극치를 넘어서 사법에 대한 사형선고입니다. 그런데 장본인들만 그 잘난 기소독점권, 강제수사권, 구속 영장 청구권 등에 취해서 그들 자신만 위기인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국민을 개돼지로 취급하는 국민 무시에서 나온 자만이나 오만 아니겠습니까.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국민을 개돼지라고 했다가 파면당한 교육부 국장 있잖아요. 그 사람이 억울하다고 소송을 낸 것도 뻔뻔하기 이를 데 없는데, 판사가 승소 판결을 내려 한 직급 낮춰서 복직시킨 것은 도대체 뭡니까. 국민을 개돼지 취급한 국민 무시 극치가 아닌가요? 그게 바로 국민의 법 감정을 무시한 사법부의 저질 판단이고, 사법 불신의 또 하나의 요인입니다. 그런 것도 우리가 뭉쳐서 바로 잡아야 할 문제입니다.
다음은 행정부 차례입니다.
행정부, 여기 또 한 문제가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입법부와 사법부에 비해 수십 배 수백 배 비대한 백만 명의 조직인 데다가 그들이 날마다 하고 있는 일 하나하나가 다 권력 행사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에게는 너무나 큰 권력이 주어져 있고, 반면에 책임은 지워져 있지 않기 때문에 숱한 문제와 비리가 야기 되어왔습니다.
모든 국민이 지난 70여 년 동안 귀가 닳도록 들어온 ‘복지부동 무사안일’이 행정부의 모습입니다. 그래,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국민을 위해 부지런히 일해야 할 사람들이 눈치만 보고 가만히 있으면 반드시 일은 잘못되고 탈이 생기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 대비해서 공무원들이 미리 준비해 놓은 말이 있습니다. ‘인력이 부족해서 어쩔 수 없다.’ ‘예산이 부족해서 어쩔 수 없다.’ 그들은 이 말도 지난 70여 년 동안 줄기차게 반복해서 써먹었고, 그것은 책임 회피의 만능열쇠로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그러면서 나라는 병들고, 국민은 불신을 키워가며 절망과 체념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 망국 행위를 뿌리 뽑기 위해서는 두 가지 법을 철저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첫째 유관기관 재취업을 전면 금지하고, 만약 위반자가 적발되면 중형에 처하는 것입니다.
둘째 업무 처리에 대한 무한책임을 지는 업무실명제를 신분보장처럼 철저하게 시행해야 합니다. 권한 행사에 있어서 그에 상응하는 책임이 따르지 않은 것은 부정해 먹으라고 권장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현재의 공무원사회가 얼마나 썩고 병들었는지를 보여주는 국제적 평가가 있습니다. OECD 35개 중 우리나라의 부패 지수는 29위입니다. 경제력은 세계 11위인데 청렴 순위가 29위인 것은 얼마나 썩은 나라인가를 실증하는 국제적 망신입니다.
그런데 절망 속에서 희망이 보입니다.
공무원 조직 중에서 국민의 절대적 신뢰와 존경을 받는 조직이 있습니다. 119입니다.
그 소방 공무원들은 불만 끄지 않습니다. 응급 환자와 조난자들을 신속하게 이동시켜 살려내고 구해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국민의 사소한 불평까지도 다 나서서 해결해 줍니다. 그 투철한 직업의식과 자상한 헌신과 봉사가 국민 모두를 감동시키고 있습니다. 이제 겨우 국가직공무원으로 전환 되었습니다. 모든 공무원들이 소방 공무원들처럼 신뢰와 사랑을 받기를 소원합니다.
덧붙이고자 하는 말은 공무원과 교사와 언론인들의 정치활동이 조속히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국가적으로 최고 수준의 화이트 칼라 그룹의 시민적 권리를 제한하는 것은 국가와 사회의 민주 발전을 막대하게 저지하기 때문입니다. 공무원은 공무원이기 이전에 자연인이고, 그러면 모든 시민이 누리는 기본권을 공무원도 누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공무원은 국민을 위해 헌신 봉사하는 존재이지 특정 정권의 하수인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정권의 하수인으로 속박 당하고 부려져 왔습니다. 이것도 필이 고쳐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음은 제왕적 대통령의 권한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왕적 대통령제는 권력을 독식하고자 했던 군부독재의 산물입니다.
그런데 민주정부라고 자처하는 정권들이 계속 바뀌었지만, 그 말썽 많은 제도는 그대로 유지되어 왔습니다. 자기들이 야당일 때는 제왕적 대통령 권력 남용이니, 횡포니, 폐해니 온갖 말을 다 동원해가며 비난하고 공격을 해대다가 자기네가 정권을 잡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그 권력을 행사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시대착오적인 제왕적 대통령제를 일거에 고치는 방법이 있습니다.
제왕적 대통령제가 야기하는 가장 큰 문제는 사법부의 독립과 검사의 정치적 중립입니다. 사법부의 수장인 대법원장을 누가 임명합니까? 검사들의 인사권을 누가 가지고 있습니까. 모두 대통령입니다. 그래가지고 무슨 독립이고 중립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위선과 모순이 어디 있으며 이보다 더 심각한 국민 기만이 어디 있겠습니까. 국회가 그나마 대통령 권한에서부터 벗어나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국민이 직선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는 주지사, 주의 법무장관, 감사원장, 대법원 판사, 검사장, 경찰국장 등 수십 가지의 직선을 합니다. 그거 복잡하고 정신없어 어쩌냐구요? 미국인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참여합니다. 미국 민주주의의 힘입니다.
대법원장 직선도 간단하게 끝낼 수 있습니다.
바로 핸드폰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대법관들 중에서 한 명을 뽑도록 하고, 인구비례에 따라 조별로 5천명에서 1만명 단위의 선거인단을 지원자 대상으로 선정합니다. 지원자가 많으면 컴퓨터 추첨을 합니다. 그리고 대법관들은 그 능력이 대동소이하니까 일정 기준에 맞춘 이력서만 인터넷에 공개하여 선거인단이 자유롭게 판단하게 한 다음 일시에 핸드폰 투표를 합니다. 그러면 비용도 적게 들고 복잡하지도 않고 완전한 비밀투표를 하게 됩니다. 이것은 이미 선관위에서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확인받은 사실입니다. 검찰총장 직선도 똑같은 방법으로 하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사법부 독립이 안 될 수 없고, 검찰 중립이 안 될 리 없지 않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국회가 제왕적 대통령제 권한을 완전히 뒤집어 새로 짜야 하는 것입니다. 새 국회에서 그런 새 법을 만들어 버리면 권력욕의 화신인 대통령도 속수무책입니다.
또 다른 권력 핵심인 검찰총장이나 경찰청장이나 국세청장도 직선해야 합니다.
감사원장도 직선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공무원 경찰’ 기능에 충실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문제는 대통령 선거도 ‘핸드폰으로 해야 하는가’ 입니다.
역대 대통령들은 단 한 사람도 헌법에 명시된 되어있는 경제민주화를 시도해보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러냐면 막대한 선거자금을 재벌들 도움으로 해결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이 재벌이 준 돈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야 합니다.
막대한 돈 낭비, 시간 낭비, 인력 낭비를 하는 전국 유세를 전면 금지시킵니다. 텔레비전을 통해서 후보 개개인이 휴대 자료 없이, 최소한 3시간 정도씩, 평균 3회 이상 생방송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 후보 전체를 모아 2회 정도 상호 토론을 벌이게 한 다음에 핸드폰 투표를 하는 것입니다.
4,200만 명이 핸드폰 투표를 할 수 있을까요?
물론 가능합니다. 우리나라는 IT 강국답게 5,100만 인구의 핸드폰 소유가 6,300만을 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도 선관위에 문의했습니다. 법적인 문제(핸드폰 투표방법 채용)만 해결되면 기술적인 문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답이었습니다.
선거 비용이 들지 않으니 재벌들에게 전혀 약점 잡힐 것 없이 탄생한 대통령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국가의 존망이 걸려 있는 경제민주화입니다.
시대적 요구인 경제민주화의 첫 단계는 지난 60년 동안 대기업들에게 베풀어 온 모든 국가적 특혜를 일소하는 것입니다. 상상할 수 없이 엄청난 특혜를 받은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또 쉴 새 없이 불법을 저질러 왔습니다. 그것이 탈세고, 비자금 빼돌리고, 일감 몰아주기입니다.
새로운 국회가 전관예우와 유관기관 재취업을 전면 금지하는 법을 만들면 재벌들이 저지르는 부정, 비리의 절반은 그에 따라서 해결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기업들도 선진국 수준으로 탈세와 불법 없는 투명경영의 시대를 맞게 됩니다.
그래도 기업들이 적정이윤을 확보할 수 있도록 국법이 보장합니다. 그럼 비정규직도 없어지고, 무너진 중산층도 복원되고, 돈은 돌고 돌아 경제는 활력 있게 발전하고, 우리나라는 모두 함께 잘사는 행복한 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런 건전하고 건강한 세상이 오면 모든 언론은 그에 따라서 건강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수많은 시민단체의 연대와 연합이 치열하게 감시와 감독을 실행하면 얻을 수 있는 결과입니다.
뭉쳐서 외치는 시민의 힘, 그것이 ‘나라다운 나라’ 만드는 해결의 핵이고, 열쇠입니다.
<발췌 후기>
우리 사회의 적폐 실상을 소상히 고발하고 있는 소설 ‘천년의 질문’은 21세기 현재, 대한민국에서 자본과 권력에 휘말려 욕망을 키워가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국민이 정치에 무관심하면 가장 저질스러운 정치인들에게 지배당한다.” - 플라톤
지금 돌아보지 않는다면, 결코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거대 자본에 휘둘려 인간을 소외시킨 현 상황을 통찰해, 대한민국의 미래를 재편하는 소설에서, 작가는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수천 년에 거쳐 하나의 거대한 집단, 즉 국가에 소속되어 살아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되물었을 법한 질문인 ‘국민에게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기본적이고도 치열한 질문에 대한 뜨거운 응답을 던진다.
소설은 21세기 현재 대한민국에서 자본과 권력에 휘말려 욕망을 키워가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그려냈다. 사건 취재에 고군분투하는 기자의 노력, 비자금 장부의 행방을 추적하는 재벌 그룹 구성원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 눈앞의 이익을 챙기기에 혈안인 국회의원과 사업가, 변호사 등의 아귀다툼.
나와 내 이웃을 위한 시민운동의 실천만이 거대 권력의 독재를 막을 수 있으며, 우리 모두 함께 걷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머물지 않을 때 큰 변화를 불러올 것이라는 작가의 믿음에 공감하여, 여기에 그의 고견을 옮겨 본 것이다.
(2024.4.1.-2020.3.1. 삼일절에 쓴 글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