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섯째 참행복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 5,7)
• 자비로운
‘자비로운’은 아람어로 ‘헤세드’입니다. ‘헤세드’는 ‘자비, 자애, 연민, 친절, 성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비 안에 자애, 연민, 친절, 성실이 다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헤세드는 구약성경에 150번 정도 나오는데, 90%가 하느님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마음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가난하고 부서진 마음을 그대로 느끼면서 당신의 자비, 연민, 친절, 성실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부서진 마음을 그대로 느낀다는 것은 상대방과 같은 마음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영어로 ‘sympathy’인데, 이 말은 ‘함께’와 ‘고통당하다’라는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헤세드를 갖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함께 느낄 뿐만 아니라 그 고통이 가벼워질 수 있는 방도까지도 찾아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육신을 갖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더 선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자비로운 마음을 ‘가엾은 마음이 들어서’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가엾은 마음이 들다’를 직역하면 ‘애간장이 찢어지다’입니다. 그분의 자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한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애간장이 찢어질 정도로 우리의 아픔에 함께하며 큰 자비를 베푸는 분이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는 예수님의 말씀은 마음이 움츠러든 우리에게 위안이 됩니다. 그분께서 목자 없는 양들처럼 방황하는 이들과 무거운 짐을 지고 고생하는 이들을 볼 때마다 애간장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끼신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찌 감동하지 않으며 어찌 그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자비는 단순히 마음속 연민으로 끝나지 않고, 돌봄의 행위를 동반합니다. 자비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그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마르 1,41)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루카 7,13-14)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자, 그들이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을 따랐다.(마태 20,34)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로운 마음을 닮기를 원하십니다. 사람들의 가난하고 부서진 마음을 우리도 함께 느끼면서 돌보기를 바라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얼마나 험악한가요! 상대가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들면 아무런 근거도 없이 “아니면 말고!” 하는 식으로 모함하고 헐뜯고 인격을 난도질합니다. 오늘날의 세상은 무자비합니다. 자비의 문화가 아니라 무자비한 문화입니다. 사람들의 손에는 언제라도 남을 향해 던질 돌멩이가 들려있는 것 같습니다. 우월감의 돌, 단죄의 돌, 비판과 분노의 돌! 내 손에도 그런 돌들이 들려있지 않은지 정직하게 돌아볼 일입니다.
•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 자비의 통로
어떤 아버지가 아들에게 옆집에 가서 낫을 빌려오라고 했습니다. 아들이 돌아와서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낫을 빌려줄 수가 없대요.” 며칠 후 옆집 사람이 도기를 빌리러 왔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도끼를 빌려주어라.” 그러자 아들이 “아버지, 저 사람은 우리한테 낫을 빌려주지 않았는데, 왜 우리는 도끼를 빌려주어야 하죠?”라고 묻자, 아버지의 대답은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아들아, 저 사람이 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도 빌려주지 않는다면 그건 복수를 하는 거야. 그리고 ‘당신은 빌려주지 않았지만 우리는 빌려줍니다.’라고 하면서 빌려준다면 그건 증오지. 하지만 아무 말 없이 ‘도끼가 필요하시다니 빌려드리겠습니다.’ 한다면 그건 자비란다.”
자비에는 어떤 조건이 붙지 않습니다. 보상이나 칭찬 같은 것엔 관심조차 없습니다. 자비는 약한 이들이 내민 손을 내치지 않는 것이요, 상처받은 이들의 울부짖음을 외면하지 않는 것입니다.
폴란드 사람인 이레나 샌들러Irena Sendler, 1910-2008는 홀로코스트의 가톨릭 영웅으로 불립니다. 이레나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 유다인 수용소에 갇혀있던 어린이들을 2,500명이나 살려냈습니다. 사회복지사이던 이러네나느 당시 만연한 전염병 때문에 자주 수용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그때마다 아이들을 빼냈습니다. 아기들은 공구상자에 넣어서, 큰아이들은 마대자루에 넣어 트럭에 숨겨서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개를 훈련시켜 검문소를 지날 때 짖게 만들어 마대자루 속에 있는 아이의 기척이 들리지 않게 했습니다.
그녀는 아이들이 언젠가는 가족과 만날 수 있도록, 아이들과 부모의 이름을 적은 명단을 집에 감춰주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폴란드식 이름을 지어주고는 수녀원이나 폴란드인 가정에 맡겼습니다. 그러다가 나치에게 발각되고 맙니다. 공범의 이름과 아이들을 어디다 숨겼는지 대라며 혹독한 고문을 받다가 팔과 다리가 다 부러졌습니다. 그런데도 이레나는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사형선고를 받고 죽을 날을 기다리던 중 폴란드 저항세력 동지들이 그녀를 살리려고 어렵게 게슈타포 장교들을 매수하여 이레나는 극적으로 탈출하게 됩니다.
그 후에도 그녀는 숨어 지내면서 계속하여 유다인 아이들을 도왔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이레나는 아이들의 부모를 찾아주려고 했지만, 애석하게도 대부분의 부모가 수용소에서 죽었거나 행방불명되어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그녀는 아이들을 직접 입양해 키웠고, 또 많은 아이에게 새 부모를 찾아주는 일에 열성을 다했습니다. 이레나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이들을 떠나보내는 엄마의 눈을 저는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이레나는 유다인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목숨을 내어놓으면서까지 유다인 아이들을 살린 것은 영혼 깊숙이 자리한 가엾은 존재를 향한 연민 때문이었습니다. 참으로 자비하신 주님을 닮은 숭고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녀는 폴란드와 미국에서 여러 가지 영예로운 상을 받았고, 2007년에는 고어Al Gore와 함께 노벨평화상 최종 후보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이레나는 2008년 5월 12일 9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형제자매들이여, 우리 서로 가까이 다가앉자.
우리를 떼어놓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자.
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는 다만 불행하고 불쌍한 사람들만 존재하는 것.
우리가 계속 누릴 수 있는 행복,
유일한 행복이 이 세상에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면서 사랑하는 것뿐이다.
- 로맹 롤랑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자비를 전해주는 통로가 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칙서 <자비의 얼굴>Misericordiae Vultus에서, “교회는 복음의 뛰는 심장인 하느님의 자비를 알려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또한 ‘우리 각자는 자비를 베푸시는 아빠의 뚜렷한 표지가 되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자비로운 인간이 될 때 아빠 하느님의 표지가 된다는 뜻입니다.
• 자비로운 하느님의 성품을 닮기 위해서
우리가 자비하신 하느님의 성품을 본받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자비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다른 이들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자비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다른 이들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비의 특별 희년 로고를 보면 착한 목자가 어깨 위에 아담(인간)을 업고 있는데 두 얼굴이 아주 가깝습니다. 자세히 보면, 착한 목자의 오른쪽 눈과 아담의 왼쪽 눈이 합해져 하나의 눈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들도, 배신한 제자들조차도 자비로운 눈으로 보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시선으로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자비하신 하느님을 본받기 위해서 우리는 공감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인간관계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면, 상대가 갖고 있는 마음의 상처를 헤아려 공감하고 위로와 치유를 주는 관계와 그 상처를 공격해서 더욱 덧나게 만드는 관계가 있습니다. 진정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당연히 상대의 아픔에 공감하면서 치유의 과정을 걷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과 동일시하던 가장 작은 이들에게 자비의 봉사를 할 때에는 그들을 연민의 대상으로만 대하지 말고, 소중한 인격체, 곧 나의 형제자매로서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수프를 나눠주면서 미소를 지었겠지요?” 사랑의 선교수녀회 수녀들이 걸인들에게 수프를 나눠주고 돌아왔을 때, 마더 데레사는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마더 데레사는 걸인들을 돌보는 일이 사회복지사업이 아니라 영혼을 돌보는 일이기에, 습관적으로 하면 안 된다는 것을 깨우쳐 준 것입니다. 그래서 걸인들에게 따스한 미소를 짓고, 형제애로 그들의 손을 잡아주고, 짧은 말이라도 건넬 것을 수녀들에게 권하였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자비롭게 대해주십시오.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전쟁을 치르고 있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육체적 고통을 느끼고
마음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들이 가만히 있는 까닭은
말하면 푸념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그들에게 가까이 갈수록
그들이 지고 있는 짐을 발견하고
신음을 듣게 될 것입니다.
- 존 왓슨
* 피정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첫댓글 아멘. 아멘. 아멘.~~
"자비에는 어떤 조건이 붙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자,
그들이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을 따랐다.(마태 20,34)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