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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부흥운동의 전개 시점과 이를 통해 대야성의 신라 반환 시기에 대해 알아볼까 합니다.
이에 왕과 태자 효가 여러 성과 함께 모두 항복하였다.
정방이 왕과 태자 효(孝)·왕자 태(泰)·융(隆)·연(演) 및 대신과 장사(將士)
88명과 백성 12,807명을 당나라 서울[京師]로 보냈다.
나라는 본래 5부(部)·37군(郡)·200성(城)·76만호(萬戶)가
있었다. 이 때에 이르러 웅진(熊津)· 마한(馬韓)· 동명(東明)· 금련(金漣)·
덕안(德安)의 5도독부(都督府)를 나누어 두고 각각 주·현을 통할하게
하였고, [그 지역의] 우두머리[渠長]들을 발탁하여 도독(都督)·자사(刺史)·현령(縣令)으로
삼아 다스리게 하였다. [그리고] 낭장(郞將) 유인원(劉仁願)에게 명령하여
서울[都城]을 지키게 하고 또 좌위랑장(左衛郞將) 왕문도(王文度)를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삼아 남은 백성들을 위무하게 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기록대로 해석해 보면, 백제는 멸망직후, 당나라군에 의하여,
각각 백제의 우두머리들을 발탁하여 도독,자사,현령으로 삼아 다스리게 하였다고 분명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백제인들은 백제멸망직후 잠시동안은 나당연합군에게 협조적이었던 걸로 알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구체적인 증거는 신라본기에서 찾아보겠습니다.
7월 18일에 의자왕이 태자와 웅진방령(熊津方領)의 군사 등을 거느리고 웅진성으로부터 와서 항복하였다. 왕이 의자왕의 항복 소식을 듣고 29일에 금돌성(今突城)으로부터 소부리성에 이르러 제감(弟監) 천복(天福)을 당나라에 보내 싸움에서 이겼음을 알렸다. 8월 2일에 주연을 크게 베풀고 장병들을 위로하였다. 왕과 정방(定方) 및 여러 장수들은 대청마루 위에 앉고, 의자왕과 그 아들 융(隆)은 마루 아래 앉혀서 때로 의자왕으로 하여금 술을 따르게 하니 백제의 좌평 등 여러 신하들이 목메어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 날 모척(毛尺)을 붙잡아 목베었다. 모척은 본래 신라 사람으로서 백제에 도망한 자인데, 대야성의 검일(黔日)과 함께 도모하여 성이 함락되도록 했기 때문에 목벤 것이다. 또 검일을 잡아 [죄목을] 세어 말하였다. 네가 대야성에서 모척과 모의하여 백제 군사를 끌어들이고 창고를 불질러 없앰으로써 온 성 안에 식량을 모자라게 하여 싸움에 지도록 하였으니 그 죄가 하나요, 품석(品釋) 부부를 윽박질러 죽였으니 그 죄가 둘이요, 백제와 더불어 본국을 공격하였으니 그것이 세번째 죄이다.이에 사지를 찢어 그 시체를 강물에 던졌다. 백제의 나머지 적병은 남잠성(南岑城)과 정현성(貞峴城) 등의 성을 차지하고 버텼다. 또 좌평 정무(正武)가 무리를 모아 두시원악(豆尸原嶽)에 진을 치고서 당과 신라인을 노략질하였다.... 중략
23일에 백제의 남은 적군이 사비성에 들어와, 항복하여 살아남은 사람들을 붙잡아 가려고 하였으므로 유수(留守) 유인원이 당과 신라인을 내어 이를 쳐 쫓았다. 적이 물러가 사비성의 남쪽 산마루에 올라 네댓 군데 목책을 세우고 진을 치고서 모여 틈을 엿보아가며 성읍을 노략질하니, 백제인 중에 배반하여 이에 부응한 것이 20여 성이나 되었다.
자, 여기 신라본기 기록을 그대로 본다면, 최초의 백제 부흥군의 활동기록은 8월 2일 남장성과 정현성, 또한 좌평 정무가 두시원악에서 신라군을 노략질하였다는 기록입니다. 즉, 백제가 멸망한 7월 18일과 8월 2일사이에는 아무런 기록이 없고 공백입니다. 더군다나, 신라는 주연을 베풀고 장병들을 크게 위로하였다는 문구처럼, 백제의 잔당들이 대거 소탕내지는 신라군에 항복해 정리가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즉,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보이는 각 지역의 우두머리를 선발하여, 도독,현령등으로 임명하여 그들이 고분고분 따른 시기가 백제 멸망 직후인 7월 18일과 8월 2일 사이에 분명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이 왜 갑자기 태도를 돌변하여, 나당연합군에 반기를 들기 시작한 이유는 분명히 보입니다.
왕과 정방(定方) 및 여러 장수들은 대청마루 위에 앉고, 의자왕과 그 아들 융(隆)은 마루 아래 앉혀서 때로 의자왕으로 하여금 술을 따르게 하니 백제의 좌평 등 여러 신하들이 목메어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즉, 나당연합군은 항복한 의자왕에게 8월2일 술시중을 들게 하는 치욕적인 의식을 행하게 하였고, 이를 직접 두눈으로 지켜보았던
흑치상지를 비롯한 수많은 백제인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킵니다. 더군다나, 신라를 배신하였던 검일을 산채로 능지처참시키는 끔찍한 행위를 보이자, 신라와 숱한 전쟁을 치루었던 백제인들과 신라를 배신하였던 인물들 역시 그렇게 끔찍한 처벌을 받을까 몹시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남장성과 정현성등에서 반기를 들게 된것이고 좌평출신이었던 정무 역시 두시원악에서 신라인을 노략질 한것이지요.
백제인들은 7월 18일과 8월 2일 사이 나당연합군에게 매우 협조적이었던 것입니다. 당나라 역시 백제를 완전히 멸망시켰다고 좋아하며 대당평백제국비명을 남기지 않았습니까? 겨우 사비성과 웅진성만을 함락시켜놓고 지방의 성들이 두눈을 뜨고 언제든 함락하려고 노리고 있었다면, 대당평백제국비명을 남기며 자랑하거나, 주연을 베풀어 장병들에게도 술을 먹이고 놀게 할 정도로 수비를 허술하게 하였으니, 나당연합군이 적들을 만만하게 본것일까요? 그런대, 나당연합군은 사후처리를 잘못하여 감정적 대응으로 인하여 오히려 고분고분 따르던 백제인들의 대대적인반발을 불러일으킨 셈이 되었으니, 어찌보면 자업자득인 셈이지요.
백제군은 분명 멸망직후인 7월 18일에 이르러 순순히 나당연합군에게 지방의 성주들은 항복을 하였고 8월 2일까지 이들의 협조가 지속되어 오다가, 의자왕에게 치욕을 주고 검일과 모척을 비롯한 대야성 반란자들을 척결한 8월 2일 사이에 이르러서 결국 울분을 머금고 남장성과 정현성,두시원악등지에서 시작지점으로 하여, 의자왕의 치욕적 장면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은 백제인들 중에서 포로였던 흑치상지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 탈출을 하였고, 그뒤 임존성, 사비성 남부지역 20여성등 점점 부흥군 세력들이 늘어나간 것이지, 백제멸망당시 사비성과 웅진성을 빼고 나머지 지방성들이 백제멸망 직후부터 줄기차게 부흥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는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죠. 이는 곧, 이들이 협조적이었던 7월 18일과 8월 2일 사이에 나당연합군에 의한 이 때에 이르러 웅진(熊津)· 마한(馬韓)· 동명(東明)· 금련(金漣)· 덕안(德安)의 5도독부(都督府)를 나누어 두고 각각 주·현을 통할하게 하였다는 기록들 통해 보듯, 대대적인 행정,지역적 개편작업이 이루어 졌고, 또한 이 시기 신라역시 당나라군에게 말하여 본래의 영유권을 주장하여 신라영토였던 대야성을 되돌려 받을수 있는 시기적,행정적,정치적 여건이 이루어 졋다는 점입니다.
결론: 백제인들은 나당연합군에게 1달가량은 고분고분 명령을 따랐다. 이 시기에 신라는 대야성을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행정적인 개편작업만으로 평화적으로 되찾을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렇기 때문에 기록에 대야성을 되찾았다거나 함락되었다는 기록이 없었던 것이다.(따지고 보면, 신라입장에서도 김유신의 당시 비유처럼, 당나라의 개가 되어 신라의 힘으로가 아닌, 당나라의 영향력으로 대야성을 되찾았다고 하여 이를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김유신이 정말 648년경, 전쟁을 통해 대야성을 함락하였다면 그 기록은 대야성의 참패기록을 만회할만큼 영광스럽게 기록하여 남겨졌을 것이다. 단순히 압독군주가 자리를 비웠다고 하여 그곳을 빈집털이 하지 않았다고 병법의 무지를 논하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백제와 신라의 관산성 전투 당시, 한강유역의 신주 군주인 김무력이 출동하였으니, 그렇게 따지자면, 신라는 이미 532년 한강유역을 텅텅 비워버린것이고, 고구려가 이 한강을 안친것이니 비록 고구려와 신라가 불가침 밀약을 맺었다고 하더라도, 혼인을 통한 혈연적 관계까지 맺어가며 이루어진 나제동맹을 깨고 국가의 이익을 취한 신라처럼 하지 않았던 고구려는 병법에 무지한것인가?
추신: 역사는 승자의 것이고, 승자는 언제든 자신의 패배보다는 승리의 기록을 더 과장시키고 부풀리기 마련입니다. 훗날 왕이 된 김춘추의 사위였던 김품석이 적장에게 항복하였다가 죽임까지 당한 치욕은 상세히 적어놓았던 승자인 신라입장에서 대야성을 전쟁을 통하여 다시 되찾았다면 치욕적인 순간을 만회했으니 이를 후세에 널리 알려야 함이 마땅할지언대, 자신의 승전기록을 오히려 감추고 숨기려 든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것 아닐까요? 만약 이를 은폐 내지 숨기려 했다면 도대체 그 이유가 뭘까요? 뭐가 두려워서 그들은 대야성을 되찾은것을 기록하지 않으려 든걸까요?
첫댓글 웅진(熊津)· 마한(馬韓)· 동명(東明)· 금련(金漣)· 덕안(德安)의 5도독부(都督府)를 나누어 두고 각각 주·현을 통할하게 하였다는 기록들 통해 님께서 백제인들은 나당연합군에게 1달가량은 고분고분 명령을 따랐다고 본다면 저 5도독부에 가야(加倻)가 없습니다..거창지역의 거열성이 고분고분 했다는 말도 없고 김흠순.천존장군에게 토벌 당할때 까지 버텄는데 같은 인근이면서 가야지역에서 고분고불 할리가 없고, 만일에 고분고분 했다면 위의 5도독부이지요 가야 도독부는 왜 빠졌는지요?...마한 도독부가 있는데 가야 도독부는 왜 없지요?..바로 신라지역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가야 도독부를 둘수 없지요.
<백제인들은 7월 18일과 8월 2일 사이 나당연합군에게 매우 협조적이었던 것입니다> 라는 내용은 사료 어디에 찾을 수가 있을까요?...물론 전투에서 그 지역의 큰성이 함락당하면 인근의 작은 성들이 덩달아 항복하는 경우는 있습니다..그것을 보고 설마 우호적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요..차라리 나당연합군에 우호적인 것은 부여융과 훗날에 변절한 흑치상지이겠지요...관산성 전투건은 사료조사를 보다 세밀하게 검토하여 님께서 내공이 충분히 쌓이면 그때 토론합시다..지금은 님께서 전혀 준비가 안된 주장이라 반론을 생략하겠습니다.
제가 본문에서도 언급하지 않았습니까? 백제인들이 고분고분 따랐기에 신라나 당나라인들이 주연도 베풀고, 대당평백제국비명을 남기며 여유를 부릴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최소한, 백제인들은 나당연합군에게 고분고분 따르는 척이라도 한것인 것입니다. 또한 제가 말하는 나당연합군에 협조적이었다는 기간은 7월 18일과 8월 2일 사이인 한달가량으로, 왜 시기와 동떨어진 2년 가량 이후의 흑치상지의 당나라 항복 사건 이야기를 꺼내시는 것인지 모르겠군요. 이글의 제목에서도 멸망직후라고 분명 언급하였을 텐대요?
나당연합군에 협력을 할려면 한달 후이든 십년 뒤에든 적어도 부여융이나 흑치상지 정도로 협력해야 명색이 그래도 협력자를 붙일 수 있겠다 싶어서 한말이니 크게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소호금천씨님의 주장이 오히려 저에겐 더 도움이 되는군요. 가야도독부가 없는것이 바로, 구가야의 지역이 이때모두 신라에 편입되었다는 또다른 증거가 되니깐요. 자, 그럼 소호금천씨님이 물을수 잇겟죠? 거열성은 그럼 어떻게 된것이냐고요? 1번, 거열성은 의자왕 즉위 이전부터 백제의 영토였다. 2번, 거열성 역시 대야성과 함께 신라에 반환되었으나, 검일과 모척같은 가야파 인물의 처형사건으로 대대적인 민심반발을 불러일으켜 부흥군에 가담되었다. 두가지 사례 모두 반박할 만한 결정적은 증거가 있습니까?
???...그리고 검일과 모척같은 가야파 인물의 처형사건으로 대대적인 민심반발을 불러일으켜 부흥군에 가담되었다 라는 결정적인 사료적 증거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아니면 일본서기에 그런 내용이 있었습니까??..아 그렇다면 그 부분이 어디 있는지? 소개 좀 부탁 합시다.
백제와 신라는 100여년이 넘게 서로 치열하게 전쟁을 벌여왔고, 그러는 와중에 적장에 포로가 되거나 배신을 하는 인물들도 속출하였을 것입니다. 제가, 검일과 모척이 가야출신이라서 그렇다는게 아니라, 검일과 모척같이 그러한 전쟁과정중에 백제에 배신한 인물들을 김춘추는 용서해주지 않고 숙청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전례를 갖고있던 신라출신의 백제인들은 모두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라도 부흥운동에 적극 동참하였을 것이고, 대야성 함락이후 그지역에 유민 1000여명을 백제땅으로 옮겨두었는대, 그들 모두 검일과 모척의 고향사람들인진대, 신라의 보복이 두려워서라도 그들중 일부도 부흥운동에 가담하였을 개연성이 매우 높죠
대야성 함락시 윤충이 약속을 어기고 항복하는 신라군사들을 몰살시키는 바람에 이후에는 백제군은 무더기로 항복을 하는 경우는 있어도 신라군이 백제에 항복한 경우는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전쟁과정중에 그렇게 배신한 사람은 검일과 모척 말고 누가 또 있는지요? 검일과 모척이외 백제에 투항한 신라군사들이 없는데 누굴 잡아다가 처형과 숙청을 시켰는지 궁금하네요?..대야성 함락시 끌려갔던 대야주 백성 1,000 여명이 백제 부흥운동에 가담했다는 사료적 근거는 아예 없는데 무슨 근거로 그들이 백제 부흥군에 합류했을 개연성을 창작 하시는지요?
물론 개연성으로써 어디까지나 추론에 불과합니다. 그 이상의 증거를 굳이 대라고 한다면, 옛 구 가야 지역인 거열성이 백제부흥에 가담되었다는 것 정도겠군요. 백제가 망한 이후에도 가야지역이었던 백제와는 연고가 거리가 먼 거열성에서도 백제부흥이 일어난다는 것은 뭔가 신라의 보복성이 짙은 두려움이 커서가 아닐까요? 부흥운동을 일으키려면 그 지역의 민심도 중요한 작용을 했을것인대, 가야출신 백성들이 백제부흥군을 받아들인다? 뭔가 큰 이유가 있을것입니다. 그러한 거열성에 대야성 출신의 유민들도 흘러들어갈 가능성도 전혀 없다곤 할수 없겠죠. 최소한 1000명중 1명정도는 가담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