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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신라,가야토론방 백제는 멸망직후, 나당연합군에 협조적이었을까?
백제사랑 추천 0 조회 489 10.01.18 23:11 댓글 9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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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0.01.19 00:23

    첫댓글 웅진(熊津)· 마한(馬韓)· 동명(東明)· 금련(金漣)· 덕안(德安)의 5도독부(都督府)를 나누어 두고 각각 주·현을 통할하게 하였다는 기록들 통해 님께서 백제인들은 나당연합군에게 1달가량은 고분고분 명령을 따랐다고 본다면 저 5도독부에 가야(加倻)가 없습니다..거창지역의 거열성이 고분고분 했다는 말도 없고 김흠순.천존장군에게 토벌 당할때 까지 버텄는데 같은 인근이면서 가야지역에서 고분고불 할리가 없고, 만일에 고분고분 했다면 위의 5도독부이지요 가야 도독부는 왜 빠졌는지요?...마한 도독부가 있는데 가야 도독부는 왜 없지요?..바로 신라지역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가야 도독부를 둘수 없지요.

  • 10.01.19 00:21

    <백제인들은 7월 18일과 8월 2일 사이 나당연합군에게 매우 협조적이었던 것입니다> 라는 내용은 사료 어디에 찾을 수가 있을까요?...물론 전투에서 그 지역의 큰성이 함락당하면 인근의 작은 성들이 덩달아 항복하는 경우는 있습니다..그것을 보고 설마 우호적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요..차라리 나당연합군에 우호적인 것은 부여융과 훗날에 변절한 흑치상지이겠지요...관산성 전투건은 사료조사를 보다 세밀하게 검토하여 님께서 내공이 충분히 쌓이면 그때 토론합시다..지금은 님께서 전혀 준비가 안된 주장이라 반론을 생략하겠습니다.

  • 작성자 10.01.19 00:22

    제가 본문에서도 언급하지 않았습니까? 백제인들이 고분고분 따랐기에 신라나 당나라인들이 주연도 베풀고, 대당평백제국비명을 남기며 여유를 부릴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최소한, 백제인들은 나당연합군에게 고분고분 따르는 척이라도 한것인 것입니다. 또한 제가 말하는 나당연합군에 협조적이었다는 기간은 7월 18일과 8월 2일 사이인 한달가량으로, 왜 시기와 동떨어진 2년 가량 이후의 흑치상지의 당나라 항복 사건 이야기를 꺼내시는 것인지 모르겠군요. 이글의 제목에서도 멸망직후라고 분명 언급하였을 텐대요?

  • 10.01.19 00:48

    나당연합군에 협력을 할려면 한달 후이든 십년 뒤에든 적어도 부여융이나 흑치상지 정도로 협력해야 명색이 그래도 협력자를 붙일 수 있겠다 싶어서 한말이니 크게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 작성자 10.01.19 00:25

    소호금천씨님의 주장이 오히려 저에겐 더 도움이 되는군요. 가야도독부가 없는것이 바로, 구가야의 지역이 이때모두 신라에 편입되었다는 또다른 증거가 되니깐요. 자, 그럼 소호금천씨님이 물을수 잇겟죠? 거열성은 그럼 어떻게 된것이냐고요? 1번, 거열성은 의자왕 즉위 이전부터 백제의 영토였다. 2번, 거열성 역시 대야성과 함께 신라에 반환되었으나, 검일과 모척같은 가야파 인물의 처형사건으로 대대적인 민심반발을 불러일으켜 부흥군에 가담되었다. 두가지 사례 모두 반박할 만한 결정적은 증거가 있습니까?

  • 10.01.19 00:52

    ???...그리고 검일과 모척같은 가야파 인물의 처형사건으로 대대적인 민심반발을 불러일으켜 부흥군에 가담되었다 라는 결정적인 사료적 증거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아니면 일본서기에 그런 내용이 있었습니까??..아 그렇다면 그 부분이 어디 있는지? 소개 좀 부탁 합시다.

  • 작성자 10.01.19 23:23

    백제와 신라는 100여년이 넘게 서로 치열하게 전쟁을 벌여왔고, 그러는 와중에 적장에 포로가 되거나 배신을 하는 인물들도 속출하였을 것입니다. 제가, 검일과 모척이 가야출신이라서 그렇다는게 아니라, 검일과 모척같이 그러한 전쟁과정중에 백제에 배신한 인물들을 김춘추는 용서해주지 않고 숙청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전례를 갖고있던 신라출신의 백제인들은 모두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라도 부흥운동에 적극 동참하였을 것이고, 대야성 함락이후 그지역에 유민 1000여명을 백제땅으로 옮겨두었는대, 그들 모두 검일과 모척의 고향사람들인진대, 신라의 보복이 두려워서라도 그들중 일부도 부흥운동에 가담하였을 개연성이 매우 높죠

  • 10.01.20 00:54

    대야성 함락시 윤충이 약속을 어기고 항복하는 신라군사들을 몰살시키는 바람에 이후에는 백제군은 무더기로 항복을 하는 경우는 있어도 신라군이 백제에 항복한 경우는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전쟁과정중에 그렇게 배신한 사람은 검일과 모척 말고 누가 또 있는지요? 검일과 모척이외 백제에 투항한 신라군사들이 없는데 누굴 잡아다가 처형과 숙청을 시켰는지 궁금하네요?..대야성 함락시 끌려갔던 대야주 백성 1,000 여명이 백제 부흥운동에 가담했다는 사료적 근거는 아예 없는데 무슨 근거로 그들이 백제 부흥군에 합류했을 개연성을 창작 하시는지요?

  • 작성자 10.01.21 00:08

    물론 개연성으로써 어디까지나 추론에 불과합니다. 그 이상의 증거를 굳이 대라고 한다면, 옛 구 가야 지역인 거열성이 백제부흥에 가담되었다는 것 정도겠군요. 백제가 망한 이후에도 가야지역이었던 백제와는 연고가 거리가 먼 거열성에서도 백제부흥이 일어난다는 것은 뭔가 신라의 보복성이 짙은 두려움이 커서가 아닐까요? 부흥운동을 일으키려면 그 지역의 민심도 중요한 작용을 했을것인대, 가야출신 백성들이 백제부흥군을 받아들인다? 뭔가 큰 이유가 있을것입니다. 그러한 거열성에 대야성 출신의 유민들도 흘러들어갈 가능성도 전혀 없다곤 할수 없겠죠. 최소한 1000명중 1명정도는 가담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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