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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학 권두칼럼 9>
비운의 천재작곡가 이건우 재조명
- 그 지순한 예술혼과 불멸의 노래
엄창섭(가톨릭관동대 명예교수, 본지 편집 고문)
1. 소중한 인연의 매듭과 의미망
모처럼 낮은 산자락이 푸르름에 젖은 성하(盛夏)의 계절에 창밖을 묵언으로 응시하다 『선으로 가는 길』의 이종철 발행인과 사제 간의 소중한 연(緣)을 60년 남짓 맺어옴도 그렇지만, 조금 전 카톡으로 ‘작고한 큰아버지의 자료 보냅니다.’를 전송받게 되었다. 그렇다. 불꽃처럼 불태우다 삶을 마감한 소월(素月) 김정식(金廷湜) 작사, 이건우(李健雨, 1919∼1998) 작곡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를 나직이 흥얼거리며 그 정겨운 음조에도 취해본다. 무엇보다 뒤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대다수 국민에게 생소한 이건우 작곡가는 1919년 8월 21일에 강원도 삼척군 원덕면 호산리 289번지 출생으로, 일제강점기 일본 유학 출신인 지식인이었으나 비운의 천재작곡가다.
그렇다. 모처럼 9월호 권두칼럼 모두(冒頭)에서 「민족의 예술혼과 불멸의 노래 - 천재작곡가 이건우의 삶과 예술」로 결부(結付)를 지어 거론할 때 다소 뒤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2020년 6월 19일 ‘드림 쉐어’에서 한국가곡연구소 설립 10주년 기념사업으로 기획, 제작된 나라 잃은 시대에 태어난 천재작곡가 이건우 탄생 100주년 기념 음반「다시 부르는 노래 이건우 가곡」을 출시하였다. 그 자신은 일본 유학 이후 1943년에 귀국을 서둘러 해방공간(1945∼1948) 전후로 조선 제1의 작곡가로 칭송받으며 활발한 활동을 벌인 빛나는 존재감의 실체였으나 불행하게도 이데올로기의 갈등과 대립 속에서 한국전쟁 당시 자진 월북하여 북한에서 생을 마감한 지극히 불행한 삶은 민족사의 일면에서 결코 예외일 수 없다.
각론하고 천재일우랄까? 한국가곡연구소가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월북 이전에 남긴 가곡의 전곡을 국내 최초로 국제무대에서 활동 중인 소프라노 서예리 독일 다름슈타트 음대교수, 바리톤 정록기 한양대 음대교수, 윤이상의 제자인 피아니스트 홀거 그로쇼프가 앨범 작업에 함께 했다. 따라서 우여곡절 끝에 복원된 이건우의 가곡 음반은 한국의 근현대음악사에 역사적 자료로서 그 가치를 지닌다. 그뿐 아니라 음반제작으로 한국가곡 발굴 및 한국가곡의 발전사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음은 더없이 극명해졌다. 까닭에 이건우 작곡가의 가곡이 지닌 의미는 한국가곡이 탄생된 지 불과 20년 후인 1940년대 일제강점기의 끝 무렵인 해방공간 전후에 작곡되었다는 사실에 있음도 그렇거니와 그가 추구한 작곡 방향과 탄탄한 작곡어법은 ‘한국가곡의 정체성’ 확립에 주목할만한 업적을 남겼다. 또 한편 이채롭게도 2019년 세상에 빛을 보게 된 음반인「다시 부르는 노래, 이건우 가곡」앨범의 자켓 하단에 ‘북으로 간 작곡가 이건우 탄생 100주년 기념’이라는 부제의 표기처럼 이건우의 존재가 비중 있게 평가받게 되었다. 기실 이영진 음악평론가의 깊은 애정과 관심은 물론 한국가곡연구소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그의 작품이 그 가치를 확증케 됨은 지극히 감사할 일이다.
2. 위대한 예술혼과 삶의 족적(足跡)
특히 2022년 11월 14일 『강원일보』(19면) 「월요칼럼」<작곡가 이건우를 아시나요?> 지면에서 이영진 음악평론가는 기고문을 통해 “1919년 강원도 삼척 원덕에서 태어난 비교적 온순한 성격과 품행이 바른 이건우는, 음악가의 꿈을 키우며 마침내 1938년 3월 춘천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도일해 동경고등음악학원(쿠나타치 음악대학원의 전신으로 현 국립음악대학)의 작곡부에서 수학한 엘리트 음악가다. 1940년 마이니치(每日新聞社) 주최 제9회 일본음악콩쿠르 작곡에서 <바이올린 조곡>으로 3위 입상을 하고, 또 1942년 제1회 교향곡 현상모집인 ‘빅타 관현악콩쿠르’에서 요미우리 신문사 주최 콩쿠르에 교향시 <청년>으로 1위 없는 2위로 입상한 경력을 거뒀으며, 그 당시 주목받는 천재작곡가라는 그의 스승인 스가타 이소타로오와 이치카와 토시하루와 끝까지 경합했음”도 새삼 놀랍다.
이같이 그 자신은 일본의 음악인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고, 그 무렵 일본 음악계에서 독일파의 거장으로 평가받던 모로이 사부로가 그의 스승이었는데, 모처럼 당대 음악계의 거장들이 격찬한 조선인 유학생으로 촉망받는 인물이었다. 한편 해방공간에서 피아노를 전공하며 <자장가>, <산유화>, <진달래꽃> 등의 작곡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던 당시 조선 제1의 작곡가 김순남과 양대 산맥을 이루게 되고 뒷날 일본음악문화 협회에서 작곡가로 활동하다 1943년 귀국 후 강제징집을 피해 1944년 개성여고와 또 강릉여고의 음악 교사로 재직 중에 광복을 맞았다. 그러던 그가 어떤 심경의 변화인지 서울로 생활근거지를 옮겨 김순남과 교유하면서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한 음악을 추구한다는 명분 아래 이념의 늪에 빠지게 되었다. 그 자신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되었다가 한국전쟁 직후 출감되었으나 자유의지로 자진 월북하였다.
차제에 그 당시 반공을 국시(國是)로 삼던 엄혹한 정치 상황이라 이건우란 이름조차 감히 입에 올릴 수 없었다. 비록 1988년 이후 해금(解禁) 문제가 완화되어 그가 작곡한 노래를 듣고 부를 수 있게 되었고, 또 이건우가 남긴 김소월·정지용·박세영의 시에 선율을 붙인 빛나는 가곡들은 한국적 정서가 강해 처연(悽然)한 분위기다. 빛바랜 이념논쟁은 접어두고라도 역사 속에 묻혀있던 비운의 그 자신을 소환하여 새롭게 조명하는 작업에 뜻을 모아야 할 것이다. 이 같은 조짐은 2023년 6월 9일자 『강원일보』 14면의「강원도 클래식 음악가 열전」에서 “정치적 이념에 월북 택한 비운의 천재, 이건우 작곡가”의 고교 후배로, 춘천고등학교 43회 졸업생인 이영진 음악평론가의 남다른 복원을 위한 일체의 집념은 가늠할 바다. 특히 그 자신의 고교 동문으로 한국 근현대미술의 거장 권진규(15회, 1922~1973년)보다 몇 해 앞서 유학한 이건우는 같은 연배의 윤이상과 나운영과 당시 유명세를 날린 작곡가였으나 자진 월북도 그렇지만, 그간에 블랙리스트의 경계 인물로 망각의 실체였다.
모름지기 그 자신은 ‘피가 뜨거운 젊은 시절 정치적 이념에 이끌려 월북하였기’에 한국음악사에서 불행하게도 소실된 존재였다. 그의 부친은 가난한 농민이었기에 1927년에 보통학교를 남들보다 늦은 9살에 입학하게 된다. 참고로 ‘덕흥보통학교(현 호산초) 졸업증서 대장에는 1917년 6월생으로, 춘천고등보통학교(현 춘천고, 10회) 학적부에 1919년 8월생으로 표기돼 있음’을 이건우 연구에 천착했던 노동은 교수는 지적하였다. 연유야 어떠하던 그 자신은 덕흥보통학교를 마치고 1933년 4월, 삼척에서 276㎞나 떨어진 춘천고보에 입학하였다. 지정학적으로 강원도 동해안에 있는 읍소재지 가운데 최남단의 원덕읍은 행정 편의상 경상북도 울진군에 인접하였고, 도청 소재지도 강원도청보다 경상북도청이 훨씬 가까운 위치에 있는 곳이다. 일단 그의 보통학교 재학 당시 전 교과목 가운데 가장 뛰어난 성적은 창가였고, 춘천고보 입학 당시 상급학교 진학을 삶의 좌표로 설정한 까닭에 ‘강원도청 소재지의 교육 수준과 문화적 환경을 염두에 두고 춘천으로 유학한 것이 아닐까?’라는 의문이 남는다. 또 한편 그가 상급학교 진학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중요 인물은 춘천고보 재학 시 음악 교유(敎諭, 현재의 교사)인 후이지 슌지(藤井俊治)다. 훗날 이건우 자신도 ‘시간·장소를 가리지 않고 모든 정열을 다했다.’라고 그 스승의 가르침에 감사했다.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후이지 슌지 선생으로부터 지도받은 바이올린은 그의 작곡 모티브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한편 우연의 일치이지만 그의 족적(足跡)에 지대한 관심을 쏟아온 이들에 의하면 강원도 홍천태생으로 강원도 최초의 일본 음악유학생인 하대응 (1914∼1983)과 이건우의 음악 행적은 비교적 유사하다. 각자의 부친이 농업에 종사한 환경이나 보통학교를 마치고 도시(서울과 춘천)에서 유학한 일, 현악기 중에 바이올린을 익히며 음악적 영감을 받았고, 일본 유학을 함께 한 그 자신은 하대응과 상이하게도 주체할 수 없는 열정을 이데올로기, ‘피아노의 시인 쇼팽’처럼 민족주의에 몰입한 끝에 순수한 창작의 예술혼을 소진한 인물임에 틀림이 없다.
무엇보다 뜻깊은 일은 지난 2019년 3월 28일 3.1운동 100주년 기념 및 뉴욕 주 "3.1운동 기념의 날' 제정 경축 기념 행사로 마련된 머킨 콘서트 홀의 음악 콘서트에서 비운의 천재 작곡가이자 비운의 월북 작곡가 인건우의 민요적 색채가 짙은 가곡 <금잔디>도 뜨거운 갈채속에서 공연되었다. 또 한편 2020년 6월 30일 「연합뉴스」의 송광호 기자는, ‘작곡가 이건우 월북 이전 작곡한 가곡 전곡 복원’, 모처럼 '다시 부르는 노래 이건우 가곡' 발매를 기사화하여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간에 그 자신이 월북 전에 작곡한 가곡 전곡을 복원한 음반이 국내 첫 발매도 놀랍거니와 김순남(1917~1986), 정작 조국으로 외면을 당한 세계적인 천재작곡가인 윤이상(1917~1995)과 함께 해방공간에서 활약한 그 자신이 월북 이전에 남긴 가곡 전곡(월북 이전에 남긴 14곡의 가곡과 월북 후 작곡한 1곡 등 15곡)을 복원해 최근 음반 '다시 부르는 노래 이건우 가곡'을 발매했다고 30일 밝혔다. 또 그 자신은 1948년 가곡집 「금잔디」(5곡), 「산길」(6곡), 「베이스를 위한 연가곡집」(3곡)을 발표하였으며 이 곡을 앨범에 수록됐다. 모처럼 앨범에 포함된 나머지 한 곡인 <동백꽃>은 월북 7년 후인 1957년 월북 시인 박세영의 시를 작곡한 것으로 남측의 가족을 애타게 그리며 쓴 가곡이다. 까닭에 최영식 한국가곡연구소장은 "이건우가 추구한 작곡 방향과 탄탄한 그의 작곡어법은 한국가곡의 정체성 확립에 기준을 제시했다. 그의 작품을 음악적 자료로 남겨 보존할 가치가 있어 앨범 작업과 가곡집 출간을 진행했다."라고 깊은 감동 뒤에 술회(述懷)하였다.
그렇다. 광복을 맞아 이건우는 경기중학교 재직 중 백남준과 사제 간의 소중한 연을 맺게 되었다. 당시 백남준은 음악에 대한 재능이 뛰어나 이건우의 각별한 지도를 받으며 이 시기에 놀랍게도 다섯 개의 곡을 작곡한 능력의 소유자였다. 뒷날 백남준은 ‘한국음악의 르네상스기’라는 거창한 표현을 거론할 때마다 이건우와 김순남에 관한 남다른 감회를 떠올리며 감사의 마음도 잊지 않았다. 한편 보편적으로 통일문학이 심도 있게 논의되는 현상에서 필자가 근간에도 김의중의 소설 「유년의 수채화」평설(달빛 아래서, 그 이별 뒤의 정한)에서 기술하였듯 2016년에 북한 당국이 금지곡으로 지정한 <우리의 소원(안석주 작사, 안병원 작곡)>(1947)을 한순간 충동적으로 부르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임도 그렇지만, 부친의 작사를 작곡한 안병원이 작고(作故)하기 전 2013년의 인터뷰에서 ‘이제 <우리의 소원>이 불리기를 더는 원치 않는다.’라던 그 의미가 새삼 가늠되었다.
3. 자유로운 영혼과 고매한 예술혼
각론하고 이건우 작곡가는 1950년 월북하여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이념과는 거리를 두고 창작 음악에만 전념하였다. 비록 조선작곡가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을 담당했으나 남로당 계열의 작곡가로 알려져 한때는 북한 정권의 탄압을 당하였다. 그 이후 1990년부터 평양의 윤이상음악연구소 명예연구사로도 활동하였고, <창성은 좋아>, <소년 빨치산의 노래>, <동백꽃>, <포위섬멸의 노래>, <노호하라, 남해바다여> 등 200여 곡의 가곡을 다양한 종류와 형식으로 창작했다. 한편 1997년에 묶어낸 작곡집「동백꽃」에는 대표작 25곡이 수록되어 있으며 <동백꽃>, <몽금포의 배노래>, <고향의 봄>이 그 같은 보기다. 이 같은 예술혼에 의해 북녘에서 이건우가 “민족을 위한 참다운 음악 창작의 길에서 이룩한 보배”로 평가받는 연유이다. 주로 그의 창작 장르는 다양할뿐더러 “양악 기법을 새로 적용하여 민족 언어에 바탕을 두었기에 작품창작과 음악의 다양한 종류와 형식을 민족의 정서 표현에 알맞게 창조한 작곡가”로 평가된다. 이처럼 그 자신의 대다수 작품은 그 색조가 민요적 음계와 리듬에서 도출되었음에도 대조적으로 민요적 리듬과 가락은 절제되는 분위기다.
특히 1988년 11월 28일 오페라극장에서 열린 해금 가곡제에 참가해서 “만약 분단의 비극이 없고 이건우와 김순남의 경우 그들의 작곡 활동이 순탄했다면, 바르톡이나 코다이가 헝가리 민족의 자랑이 된 것처럼, 우리 민족의 음악 유산으로 자랑할 업적을 남겼을 것이 자명하다.”라고 음악평론가 박용구는 담담히 회상하였다. 무엇보다 한층 심장이 울컥한 사실은 “저는 일본에서 가장 발전된 서양음악의 작곡기법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내 고민은 민족음악의 토대가 없는 속에서 먼저 서양의 작곡기법을 체득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음악적인 예능, 자신이 가진 작곡기법이 민족성의 확립에 장애가 되었다는 그였지만, 남쪽에 남겨둔 두 자녀에게 대한 애틋한 감정을 평생 잊지 못하였다. 한편 월북작곡가 김순남과의 운명적인 만남도 그렇지만 남쪽에 남겨놓고 헤어진 5살 귀염둥이 딸을 뒤늦게 접한 것은 1990년, 평양 공연을 위해 서울전통음악단에 동행했던 한 기자가 건네준 1991년 북한 정부로부터 기증받은 피아노 앞에서 찍은 『한겨레신문』지면을 통해서다. 그렇다. 세월은 흘러 어린 딸은 40대의 성숙한 여인이 되었기에, 그 자신 딸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배낭 위에 얹고서라도 모두 데려올 것을.”이라며 울먹이다 눈망울을 붉혔다.
결론적으로 그간에 어둠의 베일에 가려졌던 비운의 작곡가 이건우의 개별적인 창작어법은, 서양음악 작곡 1세대가 이룬 한국가곡의 방향 정립은 주목할 업적이다. 그 자신이 운명하기 직전까지 조국의 통일을 갈망하며 부모에 대한 존경심과 자녀에 대한 그리움을 민족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시킨 예술혼이었다. 비록 역사적으로 일제강점기와 국토분단의 가혹한 현실 앞에서도 음악인의 몫일 것이나 그 소임의 수행은 못내 눈물겹다. 모쪼록 해방공간에서 작곡한 가곡의 음악적 특징으로, 작곡기법과 민요적 색채가 짙은 11곡 중 비교적 이건우 작곡가의 대표적인 <금잔디>와 <산길>의 음악적 특징 중에 ‘임에 대한 그리움과 지나간 시간에 대한 아쉬움의 표현, 시의 내용이 길거나 서사적일 경우에 따른 빈번한 박자와 템포의 변화, 또 민요적 색채의 두드러진 형태’는 ‘조국→민족→가족’의 삼각대위(三角代位)로 지극히 유념할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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