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꺼삐딴 리' (한니발 )
이인국 씨는 외과 의사이자 큰 종합병원의 원장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그는 잠꼬대조차도 일본어로 할 정도로 철저한 '일본인'이었고, 덕분에 '국어(일본어)를 사용하는 집'이라는 표창까지 받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변고가 생기지요. 그날은 1945년 8월 15일이었는데, 그만 일본이 패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소련군이 진주해오게 되지요.
친일을 이유로 감옥에 끌려갔으나, 그의 외과의술이 그를 살릴 수 있었습니다.평양에서 실력자로 있던 스텐코프 소좌의 혹을 깔끔하게 수술해줬던 것입니다. 감옥에서 풀려난 그는 이제 소련인들과 친분을 쌓으며 자신의 아들을 소련으로 유학까지 보냅니다. 철저한 변신이었지요.
그러나 5년이 채 지나지 않아 다시 한번 세상은 바뀝니다. 전쟁이 크게 일어났고, 그는 당시 이북의 부호들이 그랬듯이 1.4후퇴를 계기로 미군이 진주한 남한으로 이주했던 것이지요. 소련에 가 있는 그의 아들이 마음에 걸렸으나, 일단 내 목숨이 붙어있어야 다른 일도 생각할 수 있는 법. 그는 이번에는 주저없이 미국인들과 친해집니다.
그는 미국 대사관을 찾아가 귀한 고려 상감청자를 선물로 바쳤고, 영어를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소련의 아들을 구하기 위해 미국 대사관의 브라운 씨를 기다리며 시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렇듯 카멜레온 같은 처세술과 뛰어난 외과 의술이 있는 한, 이인국 씨는 어느 곳을 가더라도 죽지 않고 살 수 있을 것이라며 빙긋 웃습니다.
소설가 전광용의 <꺼삐딴 리>는 <고교생이 알아야 할 소설> 시리즈를 통해 접할 수 있었습니다. 작가가 일체 감정이입을 하지 않는 전지적 작가 시점 특유의 냉철한 시각을 통해 카멜레온과도 같은 이인국 씨의 심리 변화를 객관적으로 그려낸 이 소설은 상당히 생소하게 다가왔는데, 제목상의 '꺼삐딴'은 Captain의 러시아어 발음이라고 합니다. 제 기억으로는 스텐코프 소좌가 그의 혹 수술을 성공리에 마친 후 감탄하며 붙여준 호칭으로 알고 있습니다.
모두들 아시겠지만 여기서의 '이인국'은 사실 누구도 인정하지 않았지만, 자기들 멋대로 '지배층'이라는 완장을 차고 있는 기득권 세력의 전형입니다. 이들의 사전에는 '노블레스 오블리제'라는 말은 금시초문, 남의 나라의 이야기이며, 그저 자신들의 알량한 기득권과 재산만 지킬 수 있다면, 무슨 일이던 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남에게 지도할 점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으면서 왜 스스로들 '사회지도층'이라고 자화자찬하는 것인지 저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만..
'이인국'으로 드러난 이들의 놀라운 '변신'과 처세술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이들은 그동안 자신들의 목소리를 대변해 온 거대야당의 총재가 대통령으로 당선될 가능성이 크자, 앞다투어 '거액의 보험금'을 기탁하려 들었고, 만약을 대비해 당선가능성이 떨어졌던 후보에게도 '최소한의 보험'을 들어두는 능란함을 보였습니다. 저는 이 시대의 '꺼삐딴 리'들에게서 아버지의 뜻을 저버리고 미국인과 결혼하여 도망간 이인국의 딸과 더불어 늘 안전을 도모하고자 스트레스를 받던 이인국 박사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원래 마음의 창에 금붙이가 덕지덕지 붙게 되면 자기 모습 밖에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누가 그 금붙이를 떼어가지나 않을까 불안한 마음이 가셔지지 않게 마련입니다.오 늘도 이 시대의 '꺼삐딴 리'들은 마음속의 금붙이를 어루만지며, 그저 불안하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