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반’(折半)이라 함부로 말하지 말라(김포사랑)
하나를 반으로 나눈 것을 ‘절반’(折半)이라고 합니다. 뜻이 비슷한 ‘반절’(半折),이나 ‘반’(半)과는 의미가 조금 다르게 와 닿습니다.
‘반절’(半折)이나 ‘반’(半)이 그저 둘로 나눈 것 중 하나라는 느낌이라면, ‘절반’(折半)은 그 이상의 의미를 전달하게 됩니다.
“엔진점화 46초 부족…12년 프로젝트 절반의 성공”
한국형발사체 누리호의 발사를 두고 모든 언론들이 이구동성 ‘절반의 성공’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제목을 뽑은 것을 봅니다.
그러면서도 내용은 우주시대까지 우리가 ‘9부 능선’을 넘었다고 표현함으로써 사실상 절반 이상 거의 완벽에 가까운 성공을 했다는 뉘앙스를 전합니다.
그럴 것이면 처음부터 ‘2%모자란 성공’이라는 식으로 표현해야 맞는 것이죠.
굳이 ‘절반’(折半)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이유가 없는 겁니다.
‘반’(半) 또는 ‘절반’(折半)이라는 것은 하나를 둘로 나눈 반(半) 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半)에 사람 인(亻)이 붙으면 반려자(伴侶者), 동반자(同伴者)에서처럼 짝 반(伴)이 됩니다.
신영복 선생은 아프리카 체험을 통해 깨달은 더불어 사는 방법을 제시한 수필 ‘반은 절반을 뜻하면서 동시에 동반을 뜻한다’에서 반(半)의 의미를 말합니다.
그는 모든 관계의 비결은 반(半)과 반(伴)의 여백에 있다고 통찰합니다.
곧, 절반의 희망은 절반의 절망이 동반하며, 절반의 승리는 절반의 패배를 염두에 두지 않으면 동반은 불가능한 겁니다.
그 예로 희망봉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절망의 섬’이 지척에 있으면서도 공존하는 것을 들며, 희망과 절망, 승리와 패배라는 대적(對敵)의 언어라도 얼마든지 동반의 자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절반의 희망이 있다는 것만 기억할 뿐, 다른 절반인 누군가에게 절망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절반을 희망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주님, 우리가 주께 소망을 둡니다.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소서. 시편 3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