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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城北洞) 비둘기 / 김광섭 낳지 못하는 쫒기는 새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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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生)의 감각 / 김광섭 여명(黎明)에서 종이 울린다. 새벽 별이 반짝이고 사람들이 같이 산다. 닭이 운다, 개가 짖는다. 오는 사람이 있고 가는 사람이 있다. 오는 사람이 내게로 오고 가는 사람이 다 내게서 간다. 아픔에 하늘이 무너지는 때가 있었다. 깨진 그 하늘이 아물 때에도 가슴에 뼈가 서지 못해서 푸르른 빛은 장마에 황야(荒野)처럼 넘쳐 흐르는 흐린 강물 위에 떠 갔다. 나는 무너지는 둑에 혼자 서 있었다. 기슭에는 채송화가 무더기로 피어서 생(生)의 감각(感覺)을 흔들어 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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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개인 여름 아침 / 김광섭 비가 개인 날, 맑은 하늘이 못 속에 내려와서 여름 아침을 이루었으니 녹음(綠陰)이 종이가 되어 금붕어가 시를 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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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인 / 김광섭 꽃은 피는 대로 보고 사랑은 주신 대로 부르다가 세상에 가득한 물건조차 한아름 팍 안아보지 못해서 전신을 다 담아도 한 편(篇)에 2천원 아니면 3천원 가치와 값이 다르건만 더 손을 내밀지 못하는 천직(天職). 늙어서까지 아껴서 어릿궂은 눈물의 사랑을 노래하는 젊음에서 늙음까지 장거리의 고독! 컬컬하면 술 한 잔 더 마시고 터덜터덜 가는 사람. 신이 안 나면 보는 척도 안 하다가 쌀알 만한 빛이라도 영원처럼 품고 나무와 같이 서면 나무가 되고 돌과 같이 앉으면 돌이 되고 흐르는 냇물에 흘러서 자국은 있는데 타는 놀에 가고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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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 김광섭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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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 김광섭 이상하게도 내가 사는 데서는 새벽녁이면 산들이 학처럼 날개를 쭉 펴고 날아 와서는 종일토록 먹도 않고 말도 않고 엎댔다가는 해질 무렵이면 기러기처럼 날아서 틀만 남겨 놓고 먼 산 속으로 간다 산은 날아도 새둥이나 꽃잎 하나 다치지 않고 짐승들의 굴 속에서도 흙 한줌 돌 한 개 들성거리지 않는다 새나 벌레나 짐승들이 놀랄까봐 지구처럼 부동의 자세로 떠간다 그럴 때면 새나 짐승들은 기분 좋게 엎대서 사람처럼 날아가는 꿈을 꾼다 산이 날 것을 미리 알고 사람들이 달아나면 언제나 사람보다 앞서 가다가도 고달프면 쉬란 듯이 정답게 서서 사람이 오기를 기다려 같이 간다 산은 양지바른 쪽에 사람을 묻고 높은 꼭대기에 신을 묏신다 산은 사람들과 친하고 싶어서 기슭을 끌고 마을에 들어오다가도 사람 사는 꼴이 어수선하면 달팽이처럼 대가리를 들고 슬슬 기어서 도로 험한 봉우리로 올라간다 산은 나무를 기르는 법으로 벼랑에 오르지 못하는 법으로 사람을 다스린다 산은 울적하면 솟아서 봉우리가 되고 물소리를 듣고 싶으면 내려와 깊은 계곡이 된다 산은 한번 신경질을 되게 내야만 고산도 되고 명산이 된다 산은 언제나 기슭에 봄이 먼저 오지만 조금만 올라가면 여름이 머물고 있어서 한 기슭인데 두 계절을 사이좋게 지니고 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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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김광섭 나의 마음은 고요한 물결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고 구름이 지나가도 그림자 지는 곳. 돌을 던지는 사람, 고기를 낚는 사람, 노래를 부르는 사람 이 물가 외로운 밤이면, 별은 고요히 물 위에 나리고, 숲은 말없이 잠드나니. 행여 백조(白鳥)가 오는 날, 이 물가 어지러울까, 나는 밤마다 꿈을 덮노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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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孤獨) /김광섭 내 하나의 생존자(生存者)로 태어나 여기 누워 있나니 한 칸 무덤 그 너머는 무한한 기류(氣流)의 파동(波動)도 있어 바다 깊은 그곳 어느 고요한 바위 아래 내 고단한 고기와도 같다. 맑은 성(性) 아름다운 꿈은 멀고 그리운 세계의 단편(斷片)은 아즐타. 오랜 세기(世紀)의 지층(知層)만이 나를 이끌고 있다. 신경(神經)도 없는 밤 시계(時計)야 기이(奇異)타. 너마저 자려무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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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憧憬) /김광섭 온갖 사화(詞華)들이 무언(無言)의 고아(孤兒)가 되어 꿈이 되고 슬픔이 되다. 무엇이 나를 불러서 바람에 따라가는 길 별조차 떨어진 밤 무거운 꿈 같은 어둠 속에 하나의 뚜렷한 형상(形象)이 나의 만상(萬象)에 깃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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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山) /김광섭 이상하게도 내가 사는 데서는 새벽녘이면 산들이 학처럼 날개를 쭉 펴고 날아와서는 종일토록 먹도 않고 말도 않고 엎댔다가는 해질 무렵이면 기러기처럼 날아서 틀만 남겨 놓고 먼 산 속으로 간다. 산은 날아도 새둥이나 꽃잎 하나 다치지 않고 짐승들의 굴 속에서도 흙 한 줌 돌 한 개 들성거리지 않는다. 새나 벌레나 짐승들이 놀랄까봐 지구처럼 부동(不動)의 자세로 떠간다. 그럴 때면 새나 짐승들은 기분 좋게 엎대서 사람처럼 날아가는 꿈을 꾼다. 산이 날 것을 미리 알고 사람들이 달아나면 언제나 사람보다 앞서 가다가도 고달프면 쉬란 듯이 정답게 서서 사람이 오기를 기다려 같이 간다. 산은 양지바른 쪽에 사람을 묻고 높은 꼭대기에 신(神)을 뫼신다. 산은 사람들과 친하고 싶어서 기슭을 끌고 마을에 들어오다가도 사람 사는 꼴이 어수선하면 달팽이처럼 대가리를 들고 슬슬 기어서 도로 험한 봉우리로 올라간다. 산은 나무를 기르는 법으로 벼랑에 오르지 못하는 법으로 사람을 다스린다. 산은 울적하면 솟아서 봉우리가 되고 물소리를 듣고 싶으면 내려와 깊은 계곡이 된다. 산은 한 번 신경질을 되게 내야만 고산(高山)도 되고 명산(名山)도 된다. 산은 언제나 기슭에 봄이 먼저 오지만 조금만 올라가면 여름이 머물고 있어서 한 기슭인데 두 계절을 사이좋게 지니고 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