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기한 / 김근혜
미풍 한 줄기처럼 다가온 그녀. 보랏빛 들국화였다. 무리 속에 있어도 유달리 눈에 드는 미소는 마음을 끄는 자석이었다. 시름을 담은 눈빛 속에서도 맑은 기운이 느껴졌다.
그녀가 선물이라며 대추 엑기스를 내밀었다. 가을부터 주겠다고 했는데 잊고 있었다며 긴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주는 것만 잊은 것이 아니고 유통기한도 깜빡했나 보다. 유통기한이 넉 달이나 지나 있었다. 차마 아름다운 마음에 미안함을 얹기 싫어서 함구했다. 살다 보면 입에 자물쇠를 채워야 하는 날도 있다. 그녀의 정이 담긴 엑기스를 차마 버릴 수 없어서 냉장고에 보관해 두었다. 내 마음에 그녀를 담아 둔 것처럼.
오래 알고 지낸 지인도 그런 적이 있었다. 가끔 만나 차도 마시고 마음도 나누는 사이다. 한번은 벌레 먹은 복숭아를 가지고 와서 고스란히 쓰레기통에 버린 적이 있었다. 오빠가 하는 농장에서 얻어온 것이라고 했으니 내용물은 확인하지 않고 덥석 받아왔나 보다. 처음에는 사람을 우습게 존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먹는 양이 적기 때문에 조금 사되 양질의 것을 선택한다. 그래서 더 불쾌했는지도 모른다. 기분을 정리하고 그 사람 입장에서 바라보았다. 나에게 주겠다고 기쁜 마음으로 달려왔을 것을 생각하니 오히려 미안해서 버렸다고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준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말해서는 안 될 것이 사람을 다치게 하는 진실이라고 한다. 그러한 것을 알기에 맛있게 잘 먹었다고 거짓말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설령 기분이 나빴다고 하더라도 바른말 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누구라도 이런 입장에서는 나와 같은 행동을 했을 것이다. 기분 나쁘지 않게 슬쩍 던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지만 나는 그런 넉살이 없다. 아버지가 하셨던 말씀이 생각난다. 남에게 주는 것은 내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어야 한다고 남에게 무엇을 주든 그 말씀을 새기고 살았다. 아버지도 이런 경험을 더러 하셨는가 보다. 그 끝에 교훈으로 자식들에게 주는 말씀이었을 게다.
벌레 먹은 복숭아나 유통기한이 지난 엑기스라도 마음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면 툭툭 털고 넘길 수 있다. 받는 사람은 하찮아 보여도 주는 사람은 최대의 것을 주었다고 믿는다. 따뜻한 가슴에서 우러나온 진심 어린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받기는 쉬워도 베풀기는 쉽지 않은 세상에서 그들은 ‘나눔’이라는 따뜻한 보따리를 건넨 것이다.
허물없이 지내는 사람이었기에 그나마 다행이지 않았을까. 귀한 사람에게 그런 실수를 했다면 아마도 난감했을 것이다. 선물은 물건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인사나 정을 나타내는 뜻이 담겼으므로 마음과 정성을 담아서 한번 살펴보는 지혜도 필요할 성싶다.
알코올 도수가 20도를 넘는 증류주는 유통기한이 없다고 한다. 사람은 유통기한이 짧은 발효주 같다. 잔 물살에도 지긋이 있질 못하고 변질하고 만다. 그들이 나에게 건넨 것은 물건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이다. 사랑과 믿음으로 밎어진 관계, 증류주라서 그들과 나의 우정 전선엔 우통기한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