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곱째 참행복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 평화
“평화”는 히브리어로 ‘샬롬’입니다. ‘샬롬’은 단순히 전쟁과 투쟁의 종료, 갈등의 부재 같은 위험이 없는 상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질서와 조화, 삶의 행복과 복리가 있는 만족스럽고 안정된 충만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는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가 정립될 때 주어집니다.
성경은 거듭해서 하느님을 ‘평화의 하느님’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평화를 이 땅에 세우기 위해 파견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평화의 왕’이라 불리십니다.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 평화를 세우는 분이십니다.(에페 2,13-14, 16-17; 콜로 1,20 참조)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뒤를 따라가는 우리에게 평화의 사도 직분을 부여하셨습니다.(2코린 5,18-20 참조) 그리고 그 사도직을 충실히 수행하는 이들에게 놀라운 상급을 약속하셨습니다.
•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예수님께서 칭찬하는 사람들은 평화를 이루기 위해 실제로 수고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평화를 사랑하거나, 평화를 바라거나, 평화를 찬양하지 않고, 평화를 이루기 위해 실제로 온갖 희생을 하고 대가를 지불합니다.
평화를 이루기 위해 수고하는 그리스도인들, 곧 피스 메이커peace maker들은 하느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정직하게 성찰해야 합니다. 만약 하느님과 소원한 사람이 자신만의 힘으로 세상에 평화를 세우려 한다면, 그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가정과 공동체 구성원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진지하게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설령 자신이 하느님과 깊은 관계를 맺고 기도생활, 신앙생활, 봉사활동을 열심히 한다 해도, 가정과 공동체 안에서 늘 갈등과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면, 피스 메이커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평화가 깨어졌다는 것은 관계가 깨어졌다는 말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가족과의 관계, 공동체 구성원과의 관계가 깨진 사람이 평화를 이루기 위해 수고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썼다고 전해지는 ‘평화의 기도’는 감미롭고 서정적인 영화와 노래를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졌습니다. 대개 이 기도를 생각할 때, 아름다운 꽃이 만발한 들판에서 맑게 지저귀는 새들과 함께 성인을 상상합니다. 그래서 이 기도가 전쟁터 같은 삶의 한복판에서 자주 암송되던 기도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평화의 기도’가 가장 많이 암송된 때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참혹한 전쟁인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었다고 합니다.
주님, 저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음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해주소서.
……
이 기도에서 보듯이 우리가 평화를 위해 할 일은, 미움이 있는 곳에 하느님의 사랑으로 평화를 세우는 것이요, 절망이 있는 곳에 그분의 희망으로 평화를 세우는 일이며, 슬픔이 있는 곳에 그분의 슬픔을 심는 것입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삶이라는 전쟁터에서 우리 마음이 미움과 분열과 절망이 아니라 사랑과 일치와 희망으로 채워지도록 의식적인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 피스 메이커가 되기 위해서
피스 메이커이신 예수님의 성품을 닮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먼저 내 안에 평화의 성을 쌓는 것입니다. “전쟁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생기는 것이므로 평화의 방벽(성)을 세워야 할 곳도 사람의 마음속이다.” 유네스코 헌장 맨 앞에 나오는 유명한 문장입니다. 세상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도, 세상에 평화가 가능한 것도 인간의 마음 안에서 시작됩니다. 내 안에 평화의 성을 쌓기 위해서는 먼저 내 안의 욕심과 불만을 버려야 합니다.(야고 4,1 참조) 또한 평화의 주님께 나를 온전히 내어 맡기고 다툼과 분열이 없는 통합된 내면을 형성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과의 갈등을 자주 겪습니다. 실망, 후회, 화, 원망, 두려움, 비통함 같은 내적 갈등 때문에 작은 일로 사람들과 부딪치고 편을 가르며 대립합니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갈등의 씨앗은 대부분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열등콤플렉스, 불안, 정서적 불만입니다. 만사가 못마땅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기 주위의 사람들뿐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환경마저도 바꾸고 싶어 합니다. 세상이 자기중심으로 돌아가기를 바라고 자기 뜻대로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온갖 분열과 다툼의 씨앗을 여기저기 뿌리며 다닙니다.
물론 내 마음이 평화롭기 전까지는 세상의 평화와 내가 속한 곳의 평화를 위해 수고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성찰하는 것을 소홀히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 7,3)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내 눈에 있는 들보를 먼저 빼내려는 자기 성찰이 우선할 때 내 안에 평화의 성을 쌓을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평화를 위해 일하기 때문에 가정을 돌보지 못하는 것을 당연하게 말합니다. 그러면서 “세상을 바꾸기 위해 어떤 희생이 동반된다면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 그것이 내 가정이라 해도.”라고 합리화합니다. 그러나 이런 불성실한 태도로 세상의 평화를 위해 일한다면 그것은 자기만족을 위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대의를 위해 소의를 희생하는 경우가 있을 수는 있지만, 진지하고 정직하게 자기 내면을 성찰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마더 데레사가 노벨평화상을 받자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세계 평화를 위해 우리가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 그러자 수녀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세계 평화를 위해 무슨 일을 해야 하느냐고요? 어서 집에 가서 가족을 사랑하십시오.”
인류는 그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 한 사람과 평화롭게 살지 않는다면
평화라고 말할 수 없다.
평화의 원천 또는 전쟁의 원천은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내면생활인 것이다.
인류의 운명은
우리 내면의 자기중심성(이기심)을 극복하는 투쟁에 달렸다.
- 토인비
첫댓글 아멘. 아멘. 아멘.~~
"어서 집에 가서 가족을 사랑하십시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 7,3)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