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화진 제1묘역(사-5)에는 영국성서공회(British and Foreign Bible Society, BFBS) 한국지부 초대 총무로 성서 번역과 반포(頒布)의 새 길을 튼 켄뮤어 (Kenmure, Alexander)선교사 가족(아들) 묘지가 있다.
그는 고돈 켄뮤어(Kenmure, Alexander Gordon)이며 1896년 9월 10일 출생하여 1897년 1월 1일 사망했다. 묘비에는 “켄뮤어 선교사 부부의 어린 아들 (Infant Son of A. and A. H. Kenmure)”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와 연관하여 BFBS 총무 켄뮤어 선교사의 삶과 업적을 살펴보고자 한다.
알렉산더 켄뮤어(Kenmure, Alexander)는 1856년 영국에서 출생했다. 스코틀랜드 글래스고대학 재학 중 중국 선교사로 지원하여 1885년 12월 16일 영국을 출발했다. 1886년 1월 29일 부인과 함께 홍콩에 도착하여 다음해 1월까지 중국의 남부지방을 여행하다가, 1887년 2월부터 마카오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다. 1891년 영국성서공회가 중국의 남부지부와 중부지부를 통합하면서 그는 번역 출판과 회계 업무를 담당했다.
그는 1893년 5월 8일 서울을 방문하게 되었다. 한국 방문 길에 만주 심양에서 성서를 번역하며 활동하던 로스(Ross, John, 羅約翰)목사를 만났다. 이때 “로스 번역본” 성경은 반포에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성경 내용이 한문체(漢文体)가 많고, 용어에 북쪽(義州) 지방성이 두드러지며, 번역상의 오류와 인쇄 등 문제점이 있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그는 한국 방문 길에 “로스 번역본”이 아닌 “새로운 한글 성서 번역”의 필요성을 인식했다.
한편 언더우드 선교사도 1890년 로스역의 무용성을 앞장서 주장하며 “빠른 시일 내에 새 번역본이 나와야한다.”고 역설한바 있었다. 그리고 헐버트(H. B. Hulbert)선교사에 의해서도 비슷한 지적이 제기되었다. “한국어는 중국어나 일본어와는 완전히 다르므로 순 한글 성경의 번역과 인쇄가 필요하다.”고 했다(자료: 대한성서공회사).
서울에 도착한 켄뮤어는 1893년 5월 16일 상임성서위원회에 참석하여 영국성서공회, 미국성서공회(The American Bible Society, ABS), 스코틀랜드 성서공회(NBSS)의 세(3)공회가 연합으로 운영되는 “중국위원회”를 모델로 한국 상임성서위원회(PEBC) 조직을 개편하도록 제안했다.
결국 켄뮤어의 서울 방문은 BFBS로 하여금 “로스역” 성경의 반포를 포기하게 하고, 기존의 한국 상임성서위원회를 재편성하는 역사적 전환점의 계기가 되었다.
그 후 1894년 4월. 영국, 미국, 스코틀랜드의 성서공회에서는 세 기관이 연합하여 성서 번역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켄뮤어는 1895년 10월 18일 만주-한국 담당 임시 총무로 선임되었다.
그는 우선 서울에서 영국성서공회 한국지부 개설 준비 작업에 착수하여 1896년 5월 20일 결성하고 초대 총무가 되었다. 그는 서울에 정착하면서 성서번역과 반포사업을 지휘하며 1900년 신약 전체를 번역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성서 반포사업의 기초를 확립하기 위하여 평안도에서 제주도까지 순회하면서 현장 사정을 파악했다. 그리고 성경 판매를 위하여 서울에 중앙보급소와 각 도시에 성경판매보급소를 개설했다. 권서사업(勸書事業)을 재정비하여 “東에서는 元山으로부터 南下하고, 西에서는 仁川으로부터 北上”하게 했다(자료: 대한성서공회사).
그는 1901년 안식년 휴가에 앞서 6년 간의 한국 활동을 1차 마무리하면서 “권서사업은 하나님의 왕국을 앞당기는데 가장 귀중한 도구이다. 성령 님께서는 우리가 전혀 상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인쇄된 말씀을 풍성히 사용하고 계신다.”고 했다.
그는 1904년 3공회(영국, 미국, 스코트랜드) 연합성서위원회 공동총무(Joint Agent)로 선임되었다. 1904년 7월부터 12월까지 6개월 간 일본에 머물면서 “신약 전서”의 원고와 교정지를 일일이 검토하고 인쇄에 넘겨 성서를 계속 출간했다.
그러나 1904년 구약 번역 착수 중 성서번역 사업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신경쇠약(Nervous Breakdown)으로 쓰러져 4월 19일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다.
에비슨 의사의 치료와 장기 요양 권고로 결국 하던 일은 밀러(Miller, Hugh, 閔休) 부총무에게 일임하고, 1904년 5월 3일 서울을 떠나 일본과 시애틀을 거쳐 6월초에 북미 철도로 미국을 횡단하여 빅토리아호로 대서양을 건너 런던으로 돌아갔다.
그의 건강이 극도로 악화된 원인에는 ABS 루미스(Loomis, Henry) 선교사 측과의 불협화와 갈등에서 비롯된 주도권 싸움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켄뮤어 선교사는 한글 성서의 새로운 번역과 반포를 통하여 수많은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접할 수 있는 핵심적인 선교사역을 담당한 고마운 분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양화진 선교회>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선교문화신문 기자 2004-10-22 (124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