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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한 은총과 사유의 틈새 좁히기
- 고훈 시인의 고매한 품격과 삶의 차별성
엄창섭(가톨릭관동대 명예교수, 한국기독교문인협회 고문)
1. 자아의 차별화와 관조적 담론
모름지기 책의 그늘이 넓고 깊어 피폐한 영혼을 정화할뿐더러 감동의 회복과 미적 주권을 확립시키는 내적 충만의 그 적합성은 못내 경이롭다. 까닭에 충직한 독자의 시선과 관심사(關心事)로, 오랜 망설임 뒤에 시집 『하나님의 사람아』(창조문예사, 2024)를 묶어내는 고훈 시인은, 1946년 전남 신안에 탯줄을 묻고 풀러신학대학원 목회학 박사학위 소지자로 세계성신클럽 제9대 회장을 역임하고 현재 안산제일교회를 섬기는 존경받는 원로 성직자다. 일단 시집의 서문 격인 <서시>에서 “뼈가 부서져도/주님은 놓지 말라/그리고/당신을 보라/당신은 하나님도 이긴 승리자가 돼 있으리라.”라는 일면에서 창조주를 향한 절대적인 신앙의 대비는 고정인식을 깨뜨릴 때의 변즉생(變即生)에 의한 선명한 인상, 즉 아득한 영혼의 울림이다.
차제에 「신비한 은총과 사유의 틈새 좁히기 - 고훈 시인의 고매한 품격과 삶의 차별성」의 전제는 더없이 경건성(敬虔性)을 뜻한다. 모처럼 주저와 오랜 망설임 끝에 묶어내는 시집의 편집 구도는 「제1부-침상의 사순절(13편), 제2부-우리 안에 모든 것이 있다(10편), 제3부-그리고 그들은 행복했다(14편), 제4부-커피의 기도(12편), 제5부-봄 여름 그리고 가을 겨울(19편), 제6부-하얀 목련(17편), 제7부-감사 고백(9편)」의 총 94편은 그 온전하고 담백한 삶의 여적(餘滴)이기에 특이하게도 결(結) 고운 옷감을 직조할 것이기에, 모남이 없는 ‘바람의 초상(肖像)’은 불확실한 시간대에서도 진정한 예언적 존재로 따뜻한 감성의 시인으로 차별화된다.
특히 기독교의 사순절(lent)은 부활절을 경건히 준비하는 절기로서 생명의 봄(春)을 뜻하며 그 자신이 삶의 일상에서 자유로운 바람의 영혼을 지닌 따뜻한 영성(靈性)을 지닌 존경받는 성직자로서 또 주님께서 이 땅에 허락한 지극히 선한 목자이다.
까닭에 ‘실로 이 땅 함께 살아갈 아픔이며 또한 기쁨임을’ 이처럼 공감할뿐더러 “평생 나의 새벽은/대부분 교회에서였다/지금 나의 새벽은/주로 침상 위에서다/그럼에도 이것은/나의 놀라운 경건이다//새벽 식구들을/날마다 볼 수 있고/만날 수 있으니/장소야 상관인가(침상의 사순절)”라는 반문(反問)은 못내 신선한 충동이며 감사의 은총이다. 이처럼 그 자신의 소박한 시적 형사(形似)는 투명한 심상과 결부되기에, 이미지에 적합하고 음조가 좋은 언어로 장식하려는 시 짓기의 맞물림은 진지하다. 각론하고 비정한 이기주의로 치닫는 현대사회에서 공감하는 충직한 독자들의 맑은 영혼의 울림에 잇닿은 인자(因子)로 자신이 풀어쓴 정직한 시론과 천상의 층계를 향한 절절한 기도는 눈물겹도록 따뜻한 감사의 시학이다.
또 한편 내면의 미를 끊임없이 모색하는 그 자신의 시적 특이성은 인위적인 시적 구도를 거부하고 순수서정성을 내밀한 언어로 형상화한 독자적인 그만의 시미(詩味)는 한층 더 따뜻한 감성의 산물이다. 모처럼 “힘써 산 것이/모두 후회되니 애써 살았어도 별것이겠습니까//그리고/붙들려 끌려온/괴로운 듯 기쁜 시간들/그것만이 나의 진실한 삶이었습니다(뒤돌아보며 내다보며)”의 일면에서 새삼 반추(反芻)하되 오로지 복종하는 순전(純全)한 맑은 영성으로, 그것도 지상에서 사용되는 유일한 하늘의 언어인 ‘감사(感謝)’에 담아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그 사슬로 인해 내일도 당신의 것이 될 것이라‘는 간증(干證)은 끝내 신선한 충격이기에, 모의(模擬)나 아집의 모남이 없는 정신지리와 낯익은 풍경의 발현으로 그만의 시적 매혹이다.
그렇다. 가끔 평자 자신도 살아온 날을 뒤돌아보면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지난 2010년 제42회 국가조찬기도회에서 화자인 그 자신이 쓴 성시 <내 조국 코리아로 영원하게 하소서> 또한 감동적이었음도 그렇지만, 시의 본질인 서정성에 일관하여 지나친 언어유희(pun)나 수사적 기교와는 거리감을 두고, 소소한 삶의 자잘한 정감을 포착하여 지상에 나직하게 갈 앉은 낮은 음성과 감미로운 감성은 행복한 정신작업이다. 이 같은 특이성은 영과 육체의 분리인 암울한 죽음마저도 생명의 순리로 순응하는 ’작은 신의 대변자‘의 눈물겨운 현상적인 추이(推移)인 연유로, “주님의 위로가 있고/그 위로는 말씀을 통해/양 무리 위에 임하기 때문이다(목사가 아프면 설교는 더 깊고 은혜롭다)”에서 새삼 확증되듯 그 자신이 오랜 날 목회자로서의 고독과 고뇌를 감내하며 체득한 동병상련(同病相憐)이다. 비록 절규마저 나직한 음조로 토(吐)해낸 ‘목자의 아픔이 반드시 교회에 영적 손실은 아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그 어떤 것도 헛되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육성엔 투명한 눈물이 묻어있다.
차제에 그 자신의 합리적인 시 심리의 해법은 특정한 인물을 느끼고 탐색하는 행위로서 인문학적 의미망의 확장을 위한 융합의 본말(本末)로의 방점이다. 그렇다. 시적 고뇌를 거부감없이 입증하려는 정신작업은 때로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천상의 층계 오르는 과정이기에, 고통과 환난이 주어질지라도 그 자신의 일상은 ‘기도하며 묵상하며 산길을 오르는 은총의 매 순간’ 말씀(logos)의 축복이기에 “비우며 숲속을 걸었다/숲은 숲이 아니라/겸손이었다//감격으로/도시를 걸었다/도시는 도시가 아니라/감사였다(우리 안에 모든 것이 있다)”라는 절대적 신앙은 경건하다. 짐짓 여기서 창조주의 섭리로 세상만사가 그렇기에 ‘바다도 광풍 속에서 밤새우며 통곡하는 이치’를 숨죽여 묵언으로 응시하는 그 자신이 “애통하지 않고/뛰지 않고/목마르지도 않는 사람아/날마다/그날이 그날이고/더러/어제보다 못한/오늘을 거두리니/그것이 두렵다(바다는 광풍 속에서)”에서 명증되듯 깊은 자기성찰이나 속죄의 기도를 끊임없이 드려야 한다는 삶의 교시(敎示)는 못내 엄숙하다. 아울러 이 시대의 충직한 독자에게 감동을 회복시켜주기에 족한 독창적 창조물로 절제된 감정에서 비롯된 시적 특이성의 표징은 신비스런 동반자로서의 시 창작이기에 뜻깊다.
2. 영혼의 감응(感應)과 창조적 생명감
차제에 ‘책의 바깥은 없다.’라는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의 상징성은 간접체험을 통하여, 사유의 깊이와 이중적 거리로 떠받들고 있는 화자의 시 정신은 지극히 생명적이다. 혹여 시평과는 다소 상이할지라도 지난 2010년 그 자신이 제42회 국가조찬기도회의에서 낭독된 장중한 흐름의 서사 시격인 <내 조국 코리아로 영원하게 하소서!>도 그렇거니와 또 한국교회 첫 순교자인 토마스 선교사를 기리는 추모시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의 각고의 노력 끝에 독자적인 조화의 세계를 구축하여준 조심스럽게 공간과 시각, 그리고 시적 중량감에 대해 그 나름의 인상 비평적인 접근은 유의미한 작업이다. 이처럼 생생한 일탈의 정신을 축(軸)으로 예술적인 질감과 터치의 대비로서 자연에의 회귀를, 시각화한 통시적 행위는 탈진된 영혼에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신선한 감동일 따름이다.
모처럼 여기서 평자가 지적하려는 의중은 자연을 연결고리로 할 때, 우리 시단의 불행은 정직성과 사상의 결여이다. 애써 그 자신의 시적 특이성이나 유의미를 논하지 않더라도 일단 ‘좋은 시란 외연(外延)과 내포(內包)의 양극에서 모든 의미를 통일한 것으로, 정서와 상상을 통한 인생의 표현이며 생명의 재해석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렇다. 한 폭의 수채화처럼 삶에서 ‘비록 노년인 그들 인생의 황혼 녘에 서로 의지하며 공원길 산책하는’ 그 형상을 시적으로 형상화하여 “어느 날/지아비는 휠체어를 타고 지어미는 밀고/거리로 나섰다/아무도 말이 없다/다만 안타까운 눈빛을 보내며…(그리고 그들은 행복했다-어떤 부부 이야기)”에서의 일면도 그럴 것이나 때로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가난한 나 또는 병든 나’였을지라도 운명적으로 소중한 만남인 부부의 관계 층위에서 “꿈이 많았던 당신은 나를 만나/오늘 우리 모습 이대로가 주님의 은총이었음을 알았습니다(우리 부부의 고백)”에서 그 시적 상상력은 자연의 순차에 거슬림 없는 삶의 수용성 또한 일깨워주고 있다.
이 같은 시적 행위는 잘 다듬어진 목관악기에서 쏟아내는 투명한 음계에 해당하는 인자(因子)로서, 그 자신의 독자적인 시적 자주성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작은 신의 대행자’로서의 일관된 도전은 전통의 틀을 쌓고 허물며 아우르기를 반복하는 진정한 고뇌이기에, “과거는 망각 속에 잠들어도, 소망을 담은 영원한 빛”이라는 인식의 전환은 진실로 친근한 그만의 개아적인 역동성에 맞물린 결과이기에, 이 지상에서 ‘가장 빛나는 이름, 어머니!’의 존재는 물론 화자(persona)인 그 자신이 시적으로 형상화한 고향은 단순히 탯줄을 묻은 단순한 장소성(場所性)이 아닌 종교적 차원에서 낙원의 상징성을 식별할 일이다. 까닭에 자연 친화적인 것과 생명 경외의 모티프가 고뇌의 숨결에서 연기(緣起)된 산물로, 궤린(Guerin. W.L)이 원형상징인 ‘물’을 ‘창조적 신비로서의 탄생-죽음-부활로, 정화와 구원으로’ 또 칼 융(Carl Gustav Jung)이 무의식의 일반적 상징에 속한 ‘바다(海)’를 모든 생명의 어머니(母)로 ‘정신적 신비, 무한, 죽음과 재생 등’으로 해석한 것임도 새삼 유념할 점이다.
나도 자식을 낳고 기르며 늙고 병들다 보니/이제야 어머니의 모든 비천은/나 때문
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에서
석양 길 걸어가는 ‘나의 벗들아//해지기 전에/함께 모여/고향에 한번 가고 싶다//
-<고향에 가고 싶다
까닭에 ’영감의 신비성과 시적 작위의 극대화‘에 기인(起因)한 투명한 내면 의식은 생명의 본체인 우주를 지향한 소중한 삶의 교시이기에 또 한편 절망의 끝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시간대에 깊은 사유에서 비롯된 타자에 관한 조응과 세심한 분별력은 창조적 영혼에 맞물려 있음도 유추(類推)할 점이다.
차제에 그 자신의 독자적인 위상의 확립을 위해 다소 인상 비평적인 시평을 감안할 때, 그 자신이 ‘지극히 현대적임을 자처했던’ 독일의 시인이며 의사인 고트 프리트벤(Gottfried Benn)이 “시는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완성된다. 작가는 그의 텍스트를 아직 모를 뿐이다.”라는 지적은 깊은 분별력으로 가늠할 바다. 따라서 오늘의 삶에서 기호식품인 커피를 의인법으로 수식하여 “당신도/이 세상 누군가를 위해/한잔의 커피가 되십시오/그때 사랑하는 사람들 속에서/나는 영원히/살아있을 것입니다(커피의 기도)”의 양상도 그렇거니와 마치 ‘기도하는 성자’의 표징인 나무에 견준 시편 <소나무를 보며>에서나 ‘바람 부는 날에는 춤이 되기’를 절절히 기대하며 “빛나는 날에는/찬란하지 않고/고개 숙이게 하십시오//캄캄한 밤에는/어둠이 되지 않고/별들과 속삭이게 하십시오(나무들처럼)“의 일면에서 ‘순진무구함을 지켜내기 위하여 시적 작업에 전념한 뒤 자신의 아픔도 수긍하며 실존적 상황과 치열하게 대응하는 시인’으로서 진정성 있는 술회로 생명감을 안겨줌은 놀라운 충격이다.
어디까지나 생명의 봄날 ‘그분 앞에서 오직 그분 뜻으로 사는 나날일진대’ “세상의 강함 앞에서/“나약함 이대로 아름답다”/항상 미소 보내시는/나의 생명 나의 하나님(나의 봄)“은 더없이 기대감은 경건하다. 그 같은 맥락에서 다소 낯설고 거리감이 절감되는 현상에서 ‘겨울나무로 홀로 서 있음이 더욱 쓸쓸할지라도’ 청유형 어미를 작동시켜 “강물 되어 흐르는/이 아름다운 시간들로 인해/우리의 추위를 감사함으로 감싸자(겨울나무)”라는 그 자신의 ‘감사함’에 올곧은 집념은 이채롭다. 그렇다. ‘맑은 영혼의 소유자’로 일컬어도 족한 그 자신은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10여 년 넘게 암 투병 중 그 절망의 병상에서도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과 위대하심을 믿음으로 확증하고, 지쳐 쓰러진 성도들의 두 손을 푸른 생명나무 그늘로 이끌어 죄악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게 할뿐더러 '테레사 효과(Teresa effect)'도 몸소 수행하였다. 이같이 오랜 날 소외된 타자 간의 관계성 회복을 위해 ‘그 자신의 희생 또한 자처했기’에 순결한 영혼의 상징인 ‘섣달 첫 자락 이른 아침의 눈(雪)’도 시적으로 형사(形似)하여 “오늘은/나도 저 거리의 첫눈이 되고/추억으로 가는 길이 되어/누군가에게 아프도록 밟히고 싶다(첫눈)”를 통해 확인되듯 자기희생 곧 성(聖)스러움은 특화되어 목가적(牧歌的)인 정조는 나무 가장이 잘게 흔드는 손 없는 바람의 의미망이다.
특히 유대 경전인「탈무드」에서 “말은 깃털처럼 가벼워서 주워 담기가 힘들다.”라는 그 잠언적 일깨움은 ‘베들레헴이 아름다워 성탄이 거룩한 것이 아님’을 “버리지 않기 위해 버림받으신/비천하기 위해 존귀하신/나의 존경이여/오늘은/내 마음 문을 열고 오셔서/나의 영광이 되어/모두에게 메리 크리스마스가 되십시오(성탄의 노래)”라는 그 간절한 기대감은 ‘민족의 혼이고 역사’인 모국어에 관한 지극한 애정과 관심에 잇닿아 눈부신 영성을 켜켜이 지켜낼 따름이다. 또 한편 시적 치유를 위해 쌓기와 허물기를 반복하는 그 자신의 시적 발상은 블레이크식 발상으로 영혼의 잔(盞)이 비어있음으로 내적 충만의 변주나 초대로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 이 같은 관점은 결과적으로 두 개의 포물선이 교차하는 공집합 속에서 모성회귀(母性回歸)로도 확증되기에, 모든 시편은 황홀함 그 이전에 창조주가 허락한 은총이다.
3. 시적 상상력의 확장과 언어의 집짓기
각론하고 고뇌와 갈등, 그리고 때로는 견고한 고정체를 언어로 빚어내는 시의 틀 짜기와 공간 만들기의 정신적 행위는 언어의 집짓기에 견주어진다. 그 어느 시간대보다 언어공해가 심각한 현상에서 예언자적 시인으로 퇴색된 영혼의 정화를 위해 고뇌의 밤을 묵상기도로 지새우는 영혼이 맑은 소유자의 작업을 응시하면 신선한 감동과 삶의 환희를 맛볼 것이다. 한편 창조적 활력(Gold Blain)이 넘쳐나는 정신작업의 종사자인 그 자신에게 영생의 기쁨을 수반하는 창조적 영혼은 더없이 위대하고 아름다움도 그렇거니와 보람과 감사를 안겨주는 인자(因子)의 맞물림이다.
특히 서정적 자아로 한 폭의 무채색 수채화는 정신풍경화로 클로즈업되는 그 자신의 시편은 끝내 “아픈 겨울 아직 토해내는/우리 뜨락에 찾아온/하얀 목련이/굳게 닫힌 창문을 연다//우는 자 곁에서 소복을 하고/웃는 자 곁에서 환한 미소로/모두에게 모든 것이 되는/순결한 사월의 꽃이여(하얀 목련)”에서의 일면처럼 공동체 인식의 소중함을 매듭을 짓는 시적인 모티프는, 열린 우주로의 지평을 열어 보일 ‘새로운 감동의 느낌표(!)’로 장식될 상징적 기능의 대상인 하얀 목련의 꽃말이 ‘순수와 성실, 그리고 숭고함’에 맞물린 그 오브제(objet)는 은총의 신비(神祕)다.
모름지기 불확실한 삶의 시간대를 시적 응시와 형사(形似)의 빛남을 위해 쌓기와 허물기를 끊임없이 반복하며, 인간의 본질적 고독 앞에서 그 자신의 시편은 마치 『탈무드』에서 “신의 나라는 열매를 팔지 않는다.”라는 그 교시를 반증(反證)하듯 “꽃은/열매를 위해 진다...줄임...그러나 꽃은/영원한 열매를 위해 진다(꽃은 열매를 위해 진다)”라는 그 일깨움은 오래 기억할 일이다. 혹여 그 자신의 개아적 동일화 현상에서 ‘너는 너대로 너인 꽃이 되기를 끊임없이 반복하며’ “여름이 숨 쉬는 길섶에/이름 없는 들꽃이 피었다//꾸미지 않아도/그대로 좋은 아름다움(들꽃)”의 보기에서나 시적 발아(發芽)를 통한 즉물적 현상과 목숨의 바다에서 무한공간으로 비상하고 싶은 충동을 블레이크식 발상의 신비성으로 형상화한 시적 흥취와 묘미는 다양성을 지닌다. 지극히 여성상징으로 푸른 식물성인 꽃은 심미와 관심의 대상이기에, 그 이면에 생존과 종(種)의 보존이라는 명백한 결정체로서 한층 매혹적이다.
또 한편 『25時』의 작가 안젤라 게오르규(Constantin-Virgil Gheorghiu)의 “어떤 고난의 역사도 결코 당신들에게서 당신들의 아름다운 시와 노래와 기도를 빼앗아 가지는 못했다.”라는 역설에서 차오르는 자긍심을 자아 성찰의 자세로 그 자신이 못내 수긍하는 현재성이다. 까닭에 “주님이 우리 모든 것인데/무엇이 두렵습니까/어제와 오늘/내일과 더 내일…(감사 고백)”의 보기에서나 또는 “몹쓸 병으로 많이 아프십니까/병든 자를 위해 채찍 맞고/등 가슴 살점 할퀸 피투성이 되신/주님을 생각하십시오(고난 주간의 묵상)”에서 그 자신의 남모를 회한(悔恨)은 지극히 감동적이다. 그렇다. 더 큰 ‘주님의 형상과 사랑’을 재현(再現)하는 역사 인식의 결합으로 일체의 과장됨 없는 ‘정직함과 서정성의 미감, 그리고 오랜 날 제단(祭壇)을 지켜온 화법(話法)의 구사력’이 그 자신의 시를 떠받드는 매혹적인 역동성이다.
결론적으로 멕시코의 국민작가 옥타비오 파스(Octavio Paz)의 “종교의 문제는 신이 아니라 시간이다.”라는 주장처럼 맑은 영성의 소유자로 그 자신이 조심스러운 시적 변명일 것이나 ‘하나님의 사람임’을 자처하는 고훈 시인에게 ‘공간이행의 상징’인 하나의 문을 통하여 미로의 출구로 통하는 길과 출구 바깥의 세계는 모두 시간의 직선적 개념의 산물인 연유로, 불멸의 시혼을 발화시킨 창조물은 지극히 이채롭다. 모쪼록 존귀한 자존감을 지켜내며 영혼의 닻줄을 피 멍든 손으로 움켜잡은 ‘신의 작은 대행자’로서 타자 간의 통섭에도 어긋남 없이 암울한 세기를 초연하게 부활의 신앙으로 구속(救贖)하고 ‘극소수의 창조자로서 소임’은 끝내 담당할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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