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명예나 찬사를 뒤로하고, 알아주는 이 없이 묵묵히 수행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이런 일은 자기 스스로 마음속에 단단한 신심이나 가치관이 있어야 합니다. 수행은 자기 발 밑을 보는 일입니다. 그러나 자칫 세상의 관심을 끌기위해 극단적인 고행(苦行)으로 치닫는 수행자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고행이 깨달음에 도움이 되지 않고, 오래가지도 못하는 것은 부처님이 이미 말씀한 바 있습니다. 명예와 찬사를 얻기 위해 잠시 고행을 할 수는 있어도, 결국 감추어진 위선이 드러나고 마는 예를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몇 달 전 우연히 큰 수행단체의 지도자를 가까이서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남을 위해 봉사하며 스스로 적은 돈으로 생활하는지 강조했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돕는 수행자답게 도덕적 당당함이 있었지만, 그 속에는 큰 단체의 대표로서의 권위의식이 숨어 있었습니다. 권위는 명예와 칭송을 구하는 세속적 태도입니다. 명예나 찬사를 구하는 까닭은 아직 수행에서 기쁨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안으로 기쁨을 누리는 자는 바깥 명예에 마음을 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어느 날 부처님은 '일사능가라'라는 마을에 들렀습니다. 마을에 부유한 사람들이 많았던지 동네 유지들이 다투어 부처님을 초대해서 공양하려고 했습니다. 밖에서 서로 다투는 소리가 들릴 지경이었습니다. 제자 나제가는 부처님께 간청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일사능가라 마을의 모든 찰리(끄샤뜨리야)와 바라문과 장자들이 제각기 한 솥의 밥을 지어 동산 숲 속에 가져다 놓고 저마다 ‘내가 먼저 세존께 공양하리라.’고 하며 외치고 있습니다. 바라옵건대 세존께서는 저들의 밥을 받아주소서.”
부처님께서 나제가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이롭게 하려고 생각하지 말라. 나는 이익을 구하지 않는다. 나를 칭찬하려고 생각하지 말라. 나는 칭찬을 바라지 않는다. 나제가야, 만일 여래처럼 멀리 벗어남·고요함·깨달음의 즐거움을 얻었다면, 어떻게 그런 곳에서 생기는 즐거움을 맛보거나 구하려 하겠느냐?"
- <나제가경> 잡아함경 제47권 (요약)
나제가는 부처님에게 부유하고 세도가 있는 사람들을 만날 것을 간청했습니다. 그런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 명예와 환대가 얻어지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당시 탁발하는 수행자의 입장에서는 힘 있는 신도를 갖는 것은 밥을 얻기에 좋을 뿐만 아니라 교세에도 큰 힘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멀리 벗어남(遠離 멀리 여읨)', '고요함(寂滅)', 그리고 '깨달음의 즐거움'을 맛보면 명예나 이익 등 세속적인 즐거움을 돌아보지 않는다고 말씀했습니다. 나제가에게 수행자가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일깨운 부처님의 가르침은 오늘 우리에게도 큰 죽비입니다.
양자거(陽子居)는 세상에 널리 알려진 학자입니다. 양자거는 노자를 만나고자 했으나 번번이 길이 엇갈렸습니다. 곡절 끝에 양자거는 마침내 노자를 만났습니다.
양자거는 위나라의 수도 대량의 성 밖에서 기다리다가 마침내 노자를 만났다. 성안으로 함께 걸어가는 도중에 노자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는 그대를 가르칠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안 되겠소.”
양자거는 대답도 하지 못하고 숙소로 돌아와서는, 세숫대야와 양칫물과 수건과 빗을 노자에게 올렸다. 그리고 스스로 문 밖에 신을 벗어놓고 무릎걸음으로 기어 와 노자에게 말했다.
“조금 전에 저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서 여쭈고자 했지만, 걸어오시는 도중이라 감히 말씀드리지 못 했습니다. 지금은 한가하시니, 저를 꾸중하신 까닭을 알고 싶습니다.”
노자가 말했다.
“그대는 눈을 부릅뜨고 오만하니, 누가 그대와 더불어 지내려 하겠소? 참으로 흰 것은 때가 타 보이고, 큰 덕은 모자라 보이는 법입니다(大白若辱 盛德若不足 - 노자도덕경 41장).”
양자거는 송구스러운 듯, 얼굴빛을 바꾸면서 말했다.
“삼가 가르침을 받들겠습니다.”
양자거가 전에 여관에 갔을 때는 여관에서 묵는 사람들이 그를 맞이하였고, 여관 주인은 그를 위해 잠자리 시중을 들었으며, 주인의 처는 수건과 빗을 갖다 주었다. 여관에 묵는 사람들은 그를 보면 자리를 양보했고, 불을 쬐던 사람들도 그를 보면 화로를 양보했다. 그러나 이번에 그가 노자를 만나고 돌아올 때는, 여관에 묵는 사람들이 그와 자리를 다투었다.
- <장자> 잡편 (우언편)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 당시에는 재주나 학식이 있는 선비는 왕에게 초빙되어 벼슬을 얻는 일이 많았습니다. 양자거가 여관에 나타나자 여관 주인은 마치 귀한 손님을 대하듯 공손하게 대접했습니다. 양자거의 모습에서 장차 벼슬을 할 사람의 권위를 본 것입니다. 하찮은 수입으로 사는 여관 주인이 이렇게 하니, 여관에 묵는 사람들은 따뜻한 화로에 상석을 양보하는 등 양자거에게 갖은 예를 다했습니다.
사람의 기운을 억지로 누르면 반드시 튀어 오르는 법입니다. 생명 속의 자연은 살아 있습니다. 권력이나 명성으로 누르면 당장은 상대방이 머리를 숙이겠지만, 결국 세도가 다하면 거꾸로 사람들로부터 해를 입기 마련입니다. 처음 양자거가 노자를 만나려고 했을 때, 노자가 피한 까닭도 여기에 있었습니다. 양자거의 앞 날을 본 것입니다. 양자거가 노자의 가르침을 받고 나서 다시 여관에 갔을 때는 사람들은 더 이상 양자거를 알아보지 못 했습니다. 권위나 명예를 버린 사람만이 생명을 존중할 수 있으며, 마음을 비운 사람만이 자연이 주는 조화를 흔연히 누릴 수 있습니다.
<신심명>을 남긴 승찬대사는 '도에 이르는 길은 어렵지 않으니, 오직 간택(揀擇)을 멀리하면 된다'라고 했습니다. 수행자가 명예나 이익 등 외물(外物)에 눈을 돌리는 것은 오직 애착과 혐오가 아직 마음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명예와 재물만큼 애착을 가져오는 것은 없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처지를 혐오하는 것은 명예나 재물이 없으면 남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하찮은 존재가 된다는 두려움에 묶여있기 때문입니다.
명예와 재물을 붙잡으면 법도를 잃어, 반드시 삿된 길로 들어선다.
모두 놓아버리면 자연스럽게 되리니, 몸이 분주하게 오가고 머무는 것이 없어진다.
집지실도(執之失度) 필입사로(必入邪路)
방지자연(放之自然) 체무거주(體無去住)
- 승찬대사 <신심명>
명예와 찬사를 내려놓는 일은 지금 누리는 쾌락을 포기하는 일이라 누구에게도 쉽지 않습니다. 오직 무심해야 분주하게 오가는 일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승찬대사는 무심에서 얻는 흔연한 기쁨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아무것도 마음에 두지 않으니, 기억할 것이 없고.
텅 비고 밝아 절로 비추니, 애써 마음을 쓰지 않는다.
일체불유(一切不留) 무가기억(無可記憶)
허명자조(虛明自照) 불로심력(不勞心力)
내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상의 작용을 무심하게 바라보면, 문득 허공과 같이 텅 빈 자기의 성품을 만나게 됩니다. 배고프면 밥을 먹고 목마르면 물 마시는 일을 달리 보게 되며, 나고 죽는 일이 더 이상 나의 일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무심(無心)은 한가한 기쁨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이처럼 자기의 본성을 보게 합니다. 텅 비고 밝아 절로 비추는 것(허명자조 虛明自照)은 무심수행의 핵심이자, 중국 선불교의 정수입니다.
천지에 두루 하여 허공과 같고,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다.
다만 취하고 버리는 까닭에, 여여하지 못하다.
원동태허(圓同太虛) 무흠무여(無欠無餘)
양유취사(良由取捨) 소이불여(所以不如)
성품은 텅 비어 있지만, 그 속에서 일어나는 작용은 본래의 지혜(질서)가 있어서 모자라거나 헛되게 남아도는 일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성품을 여여하게 보지 못하는 것은 간택하는 마음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대혜종고 선사는 임종에 즈음하여 제자들이 게송을 부탁하자, '태어나는 것도 다만 이러하고, 죽는 것도 다만 이러할 뿐'이라고 하며 죽음이니 임종게니 하는 말로 시끄러운 제자들을 엄하게 경책했습니다.
성품에 맡기면 도와 하나가 되어, 한가하게 소요하며 번뇌가 끊어지고,
생각에 매달리면 진실에 어긋나, 깜깜한데 떨어지니 좋지 않도다.
임성합도(任性合道) 소요절뇌(逍遙絶惱)
계념괴진(繫念乖眞) 혼침불호(昏沈不好)
- 승찬대사 <신심명>
자기의 본성을 본 사람은 성품에 맡겨 한가하게 산책하는 소요의 기쁨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다시는 이런저런 바깥 경계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진실한 성품을 등지고 명예와 권위 칭송 등에 매달리면 마음이 어두워져 우울 슬픔 분노 등 번뇌에 떨어집니다.
한 해를 보내며 그동안 변함없이 후원해주신 회원님들과 자원봉사 보살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새해에도 부처님의 자비로 수행의 기쁨이 늘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여운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