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화진 제1묘역에는 이화학당(이화대학교 전신) 제3대 교장(學堂長)으로 재직(1893-1971)하면서, 한국 최초의 생리학 교과서를 저술하고, 교과 과정을 정비했으며, 헌신적으로 학생들을 보살핀 페인 선교사 묘지가 있다.
조세핀 O. 페인(Paine, Josephine Ophelia, 陛仁, 1869~1909) 여성 선교사는 미국 마사츄세츠주 보스턴에서 1869년 2월 21일 출생했다. 보스턴 공립학교를 졸업하고, 1892년 뉴잉글랜드 교사양성소에서 교육학을 전공했다. 보스턴 상업도서관에서 사서로 잠시 일 할 때에 한국에서 귀국한 선교사의 연설을 듣고 감명을 받아 선교사로 지원했다.
1891년 11월 뉴잉글랜드 지부에서 한국 파송 선교사로 선임되고, 1892년 8월 미국 감리회 소속으로 내한했다. 한국에 도착하여 먼저 한국어를 공부하고 1893년 9월 18일 제3대 이화학당장으로 취임하여 15년 간 여성 교육에 이바지했다.
구약 성경을 가르쳤으며, 교과과정의 편성과 정비에 힘썼다. “여자가 공부는 해 무엇 하느냐”하는 시절에 여성 교육에 횃불을 들고 앞장섰다. 그의 주요 업적과 활동 상황을 살펴보면
첫째, 1899년 생리학(生理學) 교과서를 한국 최초로 프라이(Frey)와 공동 저술했다. 이 책은 “젼톄공용문답(全體功用問答, Lessons on the Human Body)"이라고 했다. 젼톄(全體)란 온 몸이며, 공용(功用)이란 신체 각 부분의 쓰임세(機能)를 의미한다.
68쪽의 총10장으로 분류하여 사람의 몸 즉 인체(人體) 각 부분의 구성과 기능 및 위생에 관한 내용을 문답식으로 만든 교과서이다(자료: 이화100년사1994). 생리학(生理學)이란 용어를 사용하기도 전에 인체의 기능에 관하여 여성에게 교육을 했다는 사실은 사회적으로 큰 관심거리가 되었다.
둘째, 1904년 9월 중학과(중등과정)를 설치하였으며, 교과과정(敎科課程) 정비의 기틀을 마련했다. 1900년대 초반에 들어서면서 우리 민족은 배워야 나라도 잘될 수 있다는 생각이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교육열이 점차 높아갔다.
그러나 외국 선교사들의 한국어 실력이나 학생들의 연령, 지식 수준 등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적절한 교과 과정을 편성하기란 대단히 어려웠다. 이 때 페인은 산수 등 기존 과목 외에 성경, 영어, 체조 등을 교과과정에 편성하였으며 재봉, 자수를 가르치는 가사과를 설치했다.
특히 한국 최초로 여성에게 체육 운동과목을 첨가한 것은 큰 변혁이었다. 여성의 걸음걸이가 뒷 발꿈치 높이 정도로 걷는 것이 미덕(美德)이라고 여기던 시절에 온몸을 흔들어 대는 체육운동은 대단한 혁신이었다. 이 같은 체육운동 때문에 양반층에서 처음에는 크게 반발하고 “집안 명예가 손상되고, 혼사 길이 막힌다”고 하면서 하인들을 시켜 학생을 집으로 데려 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셋째, 학생수 증가로 1900년 11월 정동에 2층 양옥 본관을 건축했다. 이 건물은 규모가 크고 서양식으로 미려하게 건축되어 장안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공부하는 교실과 생활하는 기숙사가 함께 있어 학생들은 좋은 환경에서 즐겁게 생활했다.
페인 선교사는 학생들을 지극 정성으로 보살피면서도 엄하게 훈육하여 학생들은 그를 아버지라 불렀다. 식료품 조달을 위한 <장보기>도 직접 담당하였는데 그의 시장 행렬은 “앞뒤에 각 각 두 사람씩 모두 네 사람이 메는 사인교(四人轎) 가마를 타고 기수(護身人)를 앞세웠다.” 늘 흰밥(쌀밥)을 해주니까 학생들이 팥밥이 먹고 싶다고 하면 가끔 시장에 나가 팥을 사다 팥밥을 해 먹이기도 한 무척 인정이 많은 분이었다. (자료:이화70년사)
넷째. 학생을 보호하고 신앙을 통한 기도회 등으로 민족 운동을 지원했다. 1904년 러ㆍ일전쟁이 있었을 때 학생들을 기숙사에 보호하고 쌀, 콩, 어포 등 각종 식량을 구입 비축하여 안정된 생활 속에서 수업을 계속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되었을 때는 신앙을 통한 기도회로 민족 운동을 지원했다. 조국을 잃은 슬픔 속에서 가냘픈 소녀들은 매일 오후 3시가 되면 수업을 중단하고 전교생이 한자리에 모여 조국의 주권 회복을 기원하는 간절한 기도회를 가졌다.
다섯째, 1907년 이화학당장 자리를 프라이(Frey, Lulu E., 富羅伊, 1907-1921) 선교사에게 인계하고 인천, 평양, 서울의 기독교 학교의 관리와 전도를 위한 선교활동에 주력했다. 신앙이 돈독한 그는 험한 길을 수 백리가 넘도록 걸으면서도 지칠 줄 몰랐다. 열정적인 설교와 전도는 감동을 주었으며 여성 해방 운동에 공헌했다.
40세를 일기로 1909년 9월 25일 해주지방 전도사업 순회 중 콜레라로 별세하여, 양화진 제1묘역(사-9)에 안장되었다. "나는 최선을 다해 살았으며 그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양화진 선교회>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선교문화신문 기자 2004-11-07 (126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