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건한 일상의 삶과 『그리움의 도돌이표』
- 지영자 시인, 상상력의 극대화와 그 해법
엄창섭(가톨릭관동대 명예교수, 한국기독교문인협회 고문)
1. 사유(思惟)의 깊이와 자아 성찰
모름지기 개념도 불투명한 이념의 문제로 대립과 갈등으로 치닫는 혼돈의 시간대에서 당면한 삶의 문제에 대해 불행하게도 정신작업의 종사자마저 깊은 사유와 자기성찰을 망각하고 있다. 그렇다. 창조적 영혼의 소유자라면 응당 예언자로서의 소임을 엄숙히 수행하여야 한다. 일단 우연의 일치일 것이나 글머리에서 평자의 경우, 몇 권의 시집 평설은 그럴 것이나 구약(舊約)의 선지자 엘리야(Elijah)와 연계성을 지닌 아호가 로뎀(Retama)인 지영자 시인의 등단지인『신문예』의 고문과 또 신인상 심사를 담당한 연유도 무관치는 아니하다.
또 한편 시 심리의 현상에서 이 땅의 그 어느 정신작업의 종사자보다 절망의 끝이 보이지 않는 황혼의 인생길에도 ‘생명의 씨앗을 파종하는 농부의 보폭으로 만보(漫步)’하는 그 자신의 삶은 ‘너희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말씀과도 같이 감사의 신앙에 힘입어 더없는 평안일 따름이다. 특히 앞서 출간된『생명의 칸타타』(생각나눔, 2022)의 시집 해설에서도 평자는 그 나름으로 “안타깝게도 개념도 불투명한 극심한 이념의 갈등 구도로 치닫는 사회현상에서 한층 더 창조적 영혼은 위대하고 아름답기에 ‘용서와 통섭(通涉)’을 몸소 수행한 남아연방의 넬슨 만델라(Nelson Rolihlahla Mandela)처럼 꿈을 실현하지 않으면 결코 현실로 전환될 수 없음”을 지적한 바다.
그렇다. ‘주어진 오늘은 내 삶에 있어 최초의 날이며 최후의 날이다.’라는 절박함 뒤 폭넓고 다양하게 시작에 몰두해온 그 자신이 ‘로뎀 시리즈’로 간행하는 제10 시집『그리움의 도돌이표』(생각나눔, 2024)의 편집구성은「제1부 : 꽃 이름은 달라도, 제2부 : 황혼의 역주행, 제3부 : 당신은 누구십니까?, 제4부 : 불청객의 고민, 제5부 : 바람에게 물어본다」로 104편의 시편이 균형감을 적절히 유지하고 있다. 차제에 끈끈하고도 소중한 삶의 연계 선상에서 시의 본말(本末)인 서정성은 감정의 절제와 깊은 사변성(思辨性)에 의해 ‘바람에게 물어보는 그 자유로운 바람의 영혼’으로 어둠의 경계를 헐어버리는 맑은 음조의 페르마타(fermata)다.
특히 아름다운 삶의 잠언을 위하여 공감대의 틈새를 거부하지 아니하고 인간의 본질적인 물음 앞에서 세계고를 통감하면서 ‘영성의 눈금 읽기와 감성의 시학’에 일관성을 지닌 탐색은 소외된 인간 관계성을 회복하는 지난(至難)한 ‘몸의 시학’이다. 이처럼 맑은 영성의 소유자로서 파스(Octavio Pazz)가 “종교의 문제는 신이 아니라 시간임”을 제시하였기에 미로의 출구로 통하는 길과 출구 밖의 세계는 시간의 직선적 개념의 산물이다. 까닭에 그 자신의 시편에 대한 개념 정리는 프랑스의 철학자 뷔퐁(Buffon's)의 “글은 곧 그 사람이다.”라는 측면에서 글 쓰는 이의 생각과 말이 글의 깊이를 결정한다는 지적에 한층 더 일체감을 지닌다.
이처럼 지상에 갈 앉은 나직한 음조와 섬세한 감수성으로 ‘세계의 이색풍경이 생각의 틀을 지나 비로소 창조의 신비를 읽는다’라며 이국적인 풍경 앞에서 저토록 위대한 창조성에서 짐짓 “과거와 미래의 기억보다 오늘을 바라보는/경이로운 세계 살아갈 이유와 가치로/무모한 생각을 지운다/절망을 삼키며 삶이 빛날 수 있도록/하늘에 그려진 석양의 아름다움처럼/이렇게 좋은 세계/오늘 하루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가!(얼마나 아름다운가)”라며 감동의 회복을 느낌표(!)로 빚어내고 있다.
어디까지나 소소한 삶에서 그 자신이 신앙처럼 떠받들며 시를 통해 틈틈이 체득한 ‘영혼의 은총 같은 일깨움’에 잇닿기에 그 자신의 경이로움은 천국을 향해 비상하는 생명의 언어에 의한 영혼의 축복이다. 무엇보다 그 자신의 시적 양식의 구도처리는 다소 의도적인 변명이 주어질 것이나 지는 알 수 없지만, 시집에 수록된 시편은 전체적으로 불협화음에 의해 흐름의 단절이나 일체의 연(聯)구분 없이 특이하게 처리되고 있다. 까닭에 “전동차의 바퀴는 전설의 노래처럼/지나치는 역은 징검다리처럼 문을 여닫고/서울의 허리를 밟고 지나가는 풍광風光에/삶의 희열을 묻고 답하며 외로움을 달랜다(황혼의 역주행)”의 보기는 그 같은 양상에서 거부감이 없다.
또 한편 비록 현실적으로 처한 공간에 관한 지극한 관심사는 자연의 사계를 수묵 담채로 빚어낸 ‘인내하고 기다린 고결한 기품’이 돋보이는 설중매(雪中梅)는 눈 속에서 피어나는 매화꽃을 뜻하기에 그 자신이 “꽃샘바람/겨울잠을 흔들어 깨우니/봄의 문을 열고/그 기품 어여뻐라/소복이 쌓인 눈빛 광채/찬란하게 빛나는 너의 형상에/곱게 물들어가는 흔적/그대의 화사함으로 봄은 오는구나.(설중매)”에서 다시금 확증되듯 일체의 영탄법은 따뜻한 감동을 안겨주고 있다.
2. 삶의 변주(變奏)와 황혼의 역주행
차제에 생명의 존엄성을 인식하고 유형적 인상과 시학의 합리성을 “느림의 시학과 맑은 영혼”의 형상화에 관한 시적 행위의 극대화로 모든 감각을 오랫동안 신중하게 교란하며 그 자신의 시대적 소임을 엄숙하게 수행한「삶의 변주(變奏)와 황혼의 역주행」에 관심을 지닌 주의집중은 결코 지나치지 아니하다. 이처럼 그 자신이 시적 행위로 삶을 자적(自適)하며 영혼의 울림에 귀 기울이는 행위야말로 언어기호의 도식과 유희적 가식에 지나침은 허락되지 아니한다. 따라서 시 쓰기를 즐기는 담백한 품격의 소유자로서 생명의 소중함을 부단히 일깨우는 일상의 삶은 진정성이 묻어있다.
그 같은 일면은 신비주의 시인인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이 “언어를 살려놓는 수단은 시인의 심성과 그의 입술과 그의 손가락들 사이에 존재한다...생략...그가 죽으면 언어는 뒤에 남아 그의 무덤 위에 몸을 던지고는 다른 어떤 시인이 와서 일으켜 세워줄 때까지 슬피 흐느껴 운다.”라는 지적과 동일성을 지닌다. 특히 여성상징인 꽃을 시적 질료로 즐겨 다루는 그 자신이 피안화(彼岸花)로 불리며 학명이 ‘Red spider lily’인 꽃무릇에 대한 관심사는 ‘온통 불타는 혈서를 건네주는 깊은 애정의 발로랄까? 못내 경이롭다.
“사무치다.”라는 말 뜨거운 꽃/솔향기 바람 타고오는 언덕/파르르 떠는 어긋 난 그리움/사랑을 수배하는 나그네에게/
온통 불타는 혈서를 건네주면/오작교도 없는 강을 건너서/그대 푸른 애인들 돌아오는.//
-<꽃무릇> 전문
또 그렇게 ‘이슬에 젖어 한마디 말없이 소소한 햇살에 초연한 삶으로’ 더없이 분망한 일상에서 한 포기 야생화처럼 끈질긴 생명감으로 버텨낸 그 자신이 “낮에는 햇볕에 눈 비비며/당당히 살아남은 신비한 생명/누구 지나가도 개의치 않고/삶의 고달픔도 잊게 하는 너/혼자서 자생력 키우는 담력은/하늘이 준 노하우/바람을 이겨낸 태고의 인내력(야생화)”이야말로 또 하나 신선한 생명의 역동성이다.
각론하고 담백한 시적 형상화로 허망한 삶도 담담히 풀어내지만, 인간은 자기 흔적을 남기는 존재이기에「전도서」의 가르침처럼 ‘허공, 무념, 무상’과도 맞물려 있다. 모처럼 그 자신의 시사(詩史)에서 변곡점을 장식하는 시편은 직물 대상의 평이한 시적 기법(craft)에서 비롯한 경건한 신앙심이 감사의 통로를 열어주고 있다. 이처럼 창조주의 은총은 저토록 놀라워 삶의 황혼 녘에 소중하게 흘려보낸 목숨의 시간대에 인연의 소중함을 가늠하지 않더라도 ‘책갈피 뒤적이는 꽃의 열정에 할미는 말없이 벗어놓은 옷만 다독이는’ 일상의 삶은 더없이 다감하여 눈물겨울지라도 그 자신이 나직한 육성으로 읊조려내는 “알알이 익어 가는 포도처럼/맑고 고운 눈빛 미래의 꿈을 캐고 있다/하나밖에 없는 꽃 중의 꽃/25년의 근심의 벽이 지나자/세상을 놀라게 하려는 듯/생명공학의 나노바이오 시스템의 전공을 위해/작은 신발을 갈아 신었다(꿈을 심는 손녀)”의 시적 정조(情調)는 더없이 평화롭다.
특히 생명 외경심과 감성의 시학을 형상화하는 동기화에서 난해한 현대시의 격랑에 편승하지 않고 삶의 역주 뒤에 숨 고르기를 걸친 담백한 격조에 잇닿은 존재의 뿌리며 화합의 처소인 가정이 무너지는 불행한 삶의 시간대에서 ‘시도 때도 없이 화의 불씨가 이혼 서류에 도장 찍기가 바쁜 세상’의 정신풍경화는 못내 억장이 내려앉은 우리의 더없이 안타까운 모양새는 다음의 시편에서 이같이 확증되는 보기이다.
저장된 핸드폰의 이름 삭제하듯이/쉽게 사랑을 팽개치는 아픔이지만/흔들리는 날씨처럼 변덕이 심한 이슈가/실시간으로
빠르게 달려온다/포기한 사랑 버려지 는 생명/시시비비가 들끓지만 남은 자들은/누구에게 물어야 할 이유 없는 비극이다/
-<바람에게 물어 본다>에서
위에 인용한 시편은 ‘꽃잎들의 왈츠’ 싱그러운 생명의 계절에서 직물 대상이 다소 이채로운 ‘과속방지턱의 파도를 넘어 혹한의 바람에게 물어보는’ 화자의 관심사(關心事)는 못내 망연자실인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
비교적 그 자신의 시편은 ‘시의 본말(本末)인 서정성에 충실하되 보편성에 이끌리지 않아 ‘특이한 육성과 종교성이 수용된 시적 영토’의 확장은 안정적이다. 여기서 삶의 본원을 상실한 현대인의 응고된 영혼을 뜨거운 눈물로 녹아내리게 하고 마침내 무위, 무상이라는 관념은 걸어 잠근 마음의 문을 내부로부터 스스로 열게 하는 놀라움이다. 그렇다. 그 자신의 시편 중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에 소재한 물빛 풍경이 아름다운 마장 호수는 친환경 공원으로 조성되어 호흡이 긴 “살가운 아침 햇살 사이로/병풍처럼 둘러쳐진 오색 빛 물든/가을 산 아래/그린듯 마장 호수의 물결은/유혹의 가을빛이다/밀려 오 가는 관광객의 발걸음/출렁다리 위에 눈을 감았다 뜬다/흔들리는 다리 아래로 유영하는/잉어의 몸짓이 걸음을 멈추게 한다(마장 호수)”의 시적 정감은
깊은 영혼의 상처도 온전히 치유하고 충만한 은총 넘쳐나는 생명감이다.
까닭에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상호대비 시키되 행간의 여백을 좁혀간 그만의 시적 기법은 순백의 언어로 정금을 빚어내는 연금술사처럼 경이로움을 안겨준다. 한편 그 자신의 시적 음계는 낮은음자리표로 지상에 나직이 갈 앉는 투명한 연계음(連繫音)이 자리해 있어 그 이상성(Ideality)의 색조는 못내 신선한 충격이다. 그처럼 거대한 격랑의 물발에 밀리면서도 상실된 자아를 발견하려는 고독한 작업을 통해 소통 도구인 언어공해가 심각한 후기산업사회에서 인생의 테두리를 이룬 가족애에 대한 분별력과 부친을 통해 가슴 저미는 북녘에 관한 남다른 공동의 관심사는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다. 특히 시어에 대한 깊은 이해와 관심을 담백하게 표출하려는 시인으로의 소임, 바로 그 매혹적(魅惑的)인 못내 역동적이다.
3. 시적 상상력의 확장과 꽃의 향기
보편적으로 그 자신의 시적 차별화는 에코토피아의 색조에서 기인(起因)된 연계성으로 경계 해체의 비법을 숙련된 솜씨로 유감없이 활용한 결과물이다. 이처럼 그 자신의 고뇌와 집념은 동질성을 지닌 직물 대상을 다른 시각에서 투시하는 시적 조망으로 잠시 숨 고름에 앞서 자기만의 육성, 느낌을 정렬화(整列化)한 언어 양상을 조명해 보이기에 이 땅의 충직한 독자는 일체 갈등의 요소로 충격을 받지 아니한다.
그 같은 맥락에서 하찮게 인식되는 일상의 질료 하나도 비중 있게 다루면서 자신의 삶을 반추하되 무심히 흘려보낸 시간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하고, 사유의 깊이와 속도를 조절하며 반문하는 그의 삶은 한층 품격을 지닌 시인으로의 자존감을 높여주고 있다. 따라서 그 자신이 못내 ‘황홀한 자태는 신이 내린 은총 고운 빛의 전설을 다시 쓰고 있을지라도’ 다음에 인용하는 시편은 응당 시 의미를 음미하며 가늠할 바다.
정열의 빨간 장미 눈을 현혹하네/오월의 청잣빛 하늘 아래/내가 오월의 꽃 중의 꽃이라고/꽃무늬 속살 들어내어도 할 말이
없네//
매혹적인 모습/당당한 사랑의 화신/풍기는 품위 누구와 견줄 수 없는/그대 내 마 음 사로잡네//
붉게 타오르는 절정의 미소/고통의 가시지나 꽃다운 삶을 뜨겁게/황홀한 자태는 신이 내린 은총/고운 빛의 전설 다시 쓰고 있 네.//
-<장미의 향기로> 전문
위에 인용한 시편에서 새삼 감지될 것이나 비교적 ‘5월의 꽃’인 장미의 꽃말은 색깔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다양하다. 일반적으로 붉은색은 ‘욕망, 열정, 기쁨, 아름다움’을 뜻하고 흰색은 ‘존경, 순결, 매력’을 의미할뿐더러 그 자신의 또 다른 시편에 견주어 시적 질료나 기법의 완성도가 높을뿐더러 삶의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질료를 무리 없이 서정시로 전경화(全景化)한 일면이다.
그렇다. 일상적인 물상과 예술적인 감성의 접합인 점에 비춰 ‘정겨운 사랑 이야기로 푸른 서사시를 쓰는 7월’에서 “7월 녹색 교향곡의 연주/시원한 바람 향기롭다/눈물겨운 파란 빛의 열정/꽃과 열매로 초록 융단을 깔고/잠든 꽃을 깨우는 뜨거운 햇빛(7월)”의 보기에서 그 자신의 시 의미의 다양성은 더없이 확증된다. 따라서 “개념과/창조 사이에/감정과/반응 사이에/그림자는 자리한다.”라는 엘리엇(T. S Eliot)식 발상은 동반자로서의 시 쓰기에 견주어짐도 배경 지식(schema)으로 유념할 바다.
각론하고 그 자신이 극명하게 이 땅의 충직한 독자들에게 역설하는 삶의 일깨움에 앞서 여기서 초록우산은 ‘초록으로 상징되는 싱그러운 아이들의 미래 가능성을 우산처럼 펼쳐주고 담아주고 보호하는 사업목적’인 아동복지 전문기관을 뜻한다. 까닭에 “흰 구름 벽지 안에서/아버지 목소리가 들려요(초록우산)”에서 또다시 명증되듯 ‘벽과 벽이 둘러싼 작은방에 혼자 고립’된 불안과 초조감에서도 끝내 좌절하지 아니하고 막연한 기대일지라도 삶의 존엄성은 상실하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인류의 정신적 스승’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가 “단지 하늘에 떠가는 구름뿐이라고 하여도 우리가 살아 존재하는 한 기뻐해야 한다.”라는 그 지적은 지혜로운 삶의 일깨움이다.
결론적으로 격랑의 세월을 견뎌낸 로뎀 지영자 시인의 시적 대응은 ‘영성(靈性)에 의한 성스러움’이기에 ‘감사와 축복의 삶’은 더없이 절실하다. 까닭에 절제된 감정으로 사물의 본질을 해명하고 본래의 형질을 회복하는 창조적 영혼은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모쪼록 비열한 이기주의로 치닫는 후기산업사회의 차별화를 순수한 서정성으로 삶의 처소에서 꼼꼼히 챙기되 ‘극소수의 창조자’로서 그간의 낡고 고루한 탈 관념화와 심각한 언희(言戱)의 행태를 역사적 소임으로 인식하고 지혜롭게 대처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