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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년 2월 3일은 음력 1월1일로 설날이다.
나는 유학자이신 아버님에게서 초등학교 들어가기전에 한학을 배우면서 조상님들에 대한 孝정신과 형제간의 友愛등에 대해 철저한 가르침을 받았고, 그에따라서 조상님들 명절은 빠지지 않고 참여해 왔다.
그런 내가 금년 설날 그 철저하게 지켜오던 설날 祭禮 참여에서 이탈한 것이다.
그것은 삼성전자에 근무하는 朱玄이가 작년 4월1일 오스트리아 주재원으로 나가고, 작년 5월29일엔 막내 며느리와 두손주(영후, 영헌)도 뒤따라 비엔나로 출국하여 이애들 사는 모습도 볼겸 한번 가보아야 겠다고 마음 먹고 있던 차에, 영후엄마 에게서 주현이 약이 필요하다는 전화를 받고, 특히 난우씨와 나는 매년 한두차례씩 외국여행을 다녀오지만 중현과 유진엄마는 직장사정으로, 유진이와 영찬이는 학교때문에 해외여행을 하지못하여 늘 마음에 걸려 왔는데 구정 연휴를 이용하면 중현과 유진엄마의 직장문제도 크게 무리가 가지않고, 유진이와 영찬이도 체험학습으로 처리하면 된다하여 우리 두내외와 중현네 네식구 이렇게 3대가족 여섯명이 주현네 애들도 만나볼겸 유럽여행을 떠나게 된것이다.
우리 모두는 몇일 전부터 가지고 갈 약이며 환전이며 옷가지등 짐들을 준비하고, 출발 당일인 2월3일(목요일) 새벽부터 일어나 공항에서 비행기 탑승전에 먹을 간식과 음료수등을 챙기는 한편 누룸지를 끓여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한후 집에서 5분거리에 있는 공항 셔틀버스 정차장으로 가서 2013번 버스에 타고 출발했다.
유진이와 영찬이는 새로 사준 예쁜 운동화를 신고, 등에는 작은 가방을 메고, 예쁜 모자를 쓰고 집을 나서는데 어찌나 귀여운지 ....
공항에 도착하여 얼마를 기다리니 모두투어 김화경 가이드가 나오고 뒤 이어 강남 성모병원에 근무 한다는 의사 선생과 외국회사에 근무한다는 아가씨 또 다른 아가씨 두사람이 와서 함께 출국 비행기 티켓을 받고 짐가방 두개를 화물로 붙인 후, 입국장을 들어가는데 영찬이가 외국여행을 많이 한사람 같이 앞장서서 거침없이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당당 하던지 모두들 "재 좀 보아" 하면서 웃었다.
비행기 탑승전에 막간을 이용하여 전통문화재보존단체에서 개최하는 제비차기를 중현이가 7번성공하여 엿을 타서 먹기도 하고, 윳도 던저 보면서 거문고를 뜯으며 부르는 국악 감상도 하고 약간의 면세품도 사면서 시간을 보냈다.
드디어 12시반이 되어 아시아나항공541편 비행기에 타고보니 좌석이 반밖에 차지 않아 2~3개 좌석당 한명씩 편하게 자리를 잡았다. 특히 다리관절이 않좋은 난우씨가 다리를 편하게 뻗고 갈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비행기가 이륙한지 한 40분정도의 시간이 흘렀는데 중현이가 와서 "애들은 지금 께임에 푹 빠젔어요, 애들이 더 잘 알아요" 하면서 좌석 앞에 있는 영상 화면에서 골프게임을 찾아주어 18홀 골프라운딩을 도는데 처음에는 16오버타를 치더니 점차 나아저서 7오버타 까지 내려갔다, 덕분에 지루하지 않게 갈 수 있었다.
애들에게는 미리 귀밑에 멀미 방지용 약품 딱지를 붙여 주었는데 그 때문인지 무탈하게 기내식도 맛있게 먹으면서 비행시간을 견뎌내 주었다.
총 11시간 30분을 비행한후 드디어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현지시간 2월3일 오후 4시35분에 도착(우리나라와는 8시간의 시차)하여 짐을 찾고 공항을 빠저 나가니 대형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차에 여행객 10명과 가이드 이렇게 11명이 타니 차가 텅텅비어 더 탈 사람이 없느냐고 물어보니 앞으로 우리 11명만이 이차를 타고 관광할것 이라고 말하면서 운전기사 "이반"씨를 소개해 주었다.이반씨는 4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데 미남이고 인상도 좋아 보였다.
우리 일행은 약 2시간을 달려 뷔르츠부르크("풀잎城" 뜻이라 함)라는 아름다은 지역에 있는 프리멀호텔에 여장을 풀고 여행 첫날밤을 보내게 되었다. 뷔르츠부르크는 음악의 天才 모짜르트가 " 내가 다시 태어나서 고향을 정한다면 당연히 뷔르츠브르크 이다" 라고 하였다는 아름다운 지역 이란다.호텔까지 오는 동안에 소변등 생리적 현상의 애로사항들을 해결하기 위해 화장실을 들리는데 어느곳이나 돈을 내야하고 어렵게 들어간 화장실은 우리나라 화장실 만큼 정결하지 않아 첫날 부터 이국에서의 화장실보기 고민이 시작되었다.
잘 시간이 되어서는 "잘들 자라" "안녕히 주무세요" 라는 인사를 나누며 잠자리에 드는데 장안동집에서 나누던 인사말과는 또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틋날인 2월4일(금요일) 호텔에서 뷔페로 아침을 먹고,약4시간을 달려 백탑의 도시라는 체코의 수도 프라하로 가면서 창밖을 보는데 문득 이제는 먼 역사적 사실이 돼버린 즉, 우리가 못살았기에 겪어야만 했던 광부와 간호사들의 이국만리 독일 나라 취업과 이들을 위로하면서 흘린 故 朴正熙 대통령의 눈물등이 생각 나서 이같은 역사적인 사실을 같이 온 어린 손녀 유진이에게 알려 줌이 좋겠다고 생각되어 옆자리로 다가가 주언부언 설명해 주었다.
" 有辰아! 이나라는 독일인데 네가 알아두면 좋을것 같아 얘기해줄 터이니 들어봐라, 1960년대 초 우리나라는 북한, 필리핀등 어느나라 보다도 가난했다, 그때 우리나라 박정희 대통령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공장을 지어보려고 외국에서 돈을 빌리려 하였으나 못 받을까봐 아무나라도 빌려주지 않았는데 유독 서독에서 "당신네 나라가 광부와 간호사를 보내주면 돈을 빌려 주겠다"는 제의가 왔더랜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선 광부 500명과 간호사들을 보내준 다음에, 독일 돈 1억4천마르크를 빌려와서 공장도 짓고 했단다. 이들이독일로 간 다음해인 1964년도에 당시 70세인 서독 에르하르트 首相이 우리나라 대통령을 초청 했는데 비행기가 없어 가지 못하게 되자 서독 수상이 비행기를 보내 주어서 갔더랜다. 그곳에 간 47세의 젊은 박대통령이 광부들은 지하 천미터가 넘는 곳에서 연탄을 캐올리는 힘겨운 일을 하는가 하면, 간호사들은 그 나라의 병원에서 죽은 시체들을 닦는 험한 일을 하는등 온갖 고생을 한다는 소리를 듣고 이들을 위문하는 시민회관 강당에서 " 나라가 가난해서 여러분들이..."라고 말하며 우시는데 광부들과 간호사들도 엉엉 울고 이를 지켜보던 서독의 老수상도 울었단다. 老수상은 손수건을 꺼내주며 "우리가 도와 주겠으니 우지마오" 라고 하시더란다, 지금 우리가 달리는 이도로가 독일의 고속도로인데 세계에서 가장 역사가 깊고 튼튼하기로 소문난 도로란다. 1964년 박대통령이 이도로를 보고서 처음 만든 고속도로가 경부고속도로 란다.감명적이잔니?, 우리들 할아버지 세대들은 이 역사적인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않고 지낸단다. 너희들 세대도 이렇한 사실을 기억하면서 고마워하고 앞으로 살아가는데 교훈으로 삼아야 할것이다. 체험학습장에도 기록해두면 좋을 것이다."
이렇게 설명도 해주고 창밖에 분주하게 스처지나가는 풍경들을 감상하면서 체코의 수도인 프라하에 들어서니 삼성가 라는 표지판이 선명하게 걸려있고 그로부터 약 천미터 정도의 도로 주변의 가로수에 SAMSUNG 이라는 청색기가 죽 걸려저 있었다. 나는 이 삼성깃발이 걸려있는 도로를 달리면서 그 옛날 박대통령의 눈물과 그분의 집념으로 발전한 우리나라 대표기업 삼성이 이곳에 삼성가라는 가로를 만들어 놓았다니... 만감이 교차되었다. 60년대 70년대에 우리나라가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등에서 석유를 수입하기 위해 중동의 산유국가의 왕자나 장관들을 초청하고는 중앙부처 공무원들로 하여금 공항에 나가 비행기에서 내리는 그들에게 우산과 양산을 씌워주게 하는가하면 서울 한복판에 하얏트호텔을 짓게 해주고, 강남 노른자위 거리를 테헤란로라고 이름지어 부르게 했슴이 떠 올려지면서 그동안 우리나라의 눈부신 경제성장과 삼성기업의 위력을 실감, 가슴이 뿌듯하여지고 애들을 데리고 와서 이런 자랑스러운 모습들을 보여주게 되어 이곳에 여행오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기분좋게 프라하에 들어선 우리 일행은 조각예술을 배우기 위해 이곳에 유학와서 현지인과 결혼하여 살고 있다는 30대의 현지교포 가이드 여자분의 안내를 받아 프라하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카를교를 건너면서 감동적인 전설을 지닌 신부의 동상에 손을 올려 놓고 소원도 빌고, 프라하의 최대 번화가이자 1968년 알렉산더 두브체크 공산당 제일서기가 소련등 바르샤바동맹국들의 압력에 용기있게 맛서서 민주화 운동을 전개했던 "프라하의 봄 ' 전개 장소로 널리 알려진 바츨라프 광장을 돌아 보며 기념사진도 찍고,
고딕양식의 건물인 틴교회와, 매시정각에 7초간 울리는 舊 시청사의 천문시계를 돌아본 후에
흐릿치니 언덕으로 이동하여 현존하는 중세양식의 성중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프라하의 심장이라하는 성으로 천년에 걸처 완성 하였다는 프라하 성을 돌아 보았다.
저녁에 프라하시의 야경을 보도록 일정이 짜여저 있었으나 나와 영찬이가 너무 졸려서 夜景을 못 본것이 일행들에게 미안하고 아시움으로 남는다. 젊어서 여행 하라는 말이 현실로 닥아왔다.
우리들은 프라하의 첫날 관광을 이렇게 마치고 현지 가이드와 작별인사를 나눈 후에 파크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잠자리에 들면서 현지 가이드로부터 들은 이야기들을 메모했다, 체코는 중공업이 발달하여 히틀러가 폴란드 보다 먼저 침공 했다는 것과 지금도 우수한 권총등을 만들어 수출하고 있다는것, 우리나라 보다도 소득 수준이 높다는 것,프라하 인구는 120만명인데 우리 교포는 2천명정도 라는것,체코를 찾는 1년관광객이 여관과 호텔 유숙객 확인 7천만명이나 된다는것,1918년에 첵코와 슬로바키아가 통합하여 첵코슬로바키아가 되었다가 1993년에 국민 투표로 첵코와 슬로바키아 국가로 다시 나뉘어 젔다는 사실, 전세계의 건축을 연구하거나 건축을 하는 사람들은 건축의 르네상스라 할 수 있는 프라하를 찾아와 보고 간다는 것 등등을 적어 둔 후 잠을 청했다,
이틋날인 2월5일(토요일)에는 아침 8시에 호텔을 출발하여 약 2시간 30분을 달려 세계 300대 건축물 중 하나이자 체스키크롬노프의 상징인 체스키크롬노프성과 망토다리를 돌아 보는데 가는 길에 얼음이 깔려 조심조심 올라가 돌아보니 집들과 주변이 그림 같이 아름다웠다.특히 굴속에 설치 된 음식점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는데 돼지바베퀴에 통감자구이 맛이 일품이었다.
다음엔 다뉴브강 상류의 유명한 와인 재배지이며 아름다운 고성들이 있는 바카우 지역의 멜크로 이동하여 붉은색 코트를 입은 키가 큰 현지인 영어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면서,멜크수도원을 돌아보았다. 멜크 수도원은 베네딕트수도원이라고도 하는데 500개의 방이 있고, 도서관에는 10세기부터 전해지는 1800여권의 필사본을 비롯하여 10만여권의 장서가 보관되어 있다고 했다.
이날 저녁은 악사의 연주와 우리말 노래를 들으며 호이리게 정식을 먹었는데 우리 일행 일정상 주현네 집을 가지 못하고 영후 엄마가 애들을 데리고 저녁식사 식당으로 와사 만났다. 너무 반갑고 아이들이 귀여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영후엄마가 일행들 먹으라며 과일도 듬뿍 사가지고와서 주고 여비에 쓰라고 금일봉도 챙겨 주었다, 만남의 시간도 잠시일 뿐 애들을 뒤에 태우고 출발하는데 어찌나 서운한지 가슴이 저려왔다.
이틋날 자고 나서 생각하니 영후네를 따라 가서 알콩달콩 하고 사는 모습을 보고 아침 일찍 올걸 그랬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희 회장이 스위스 오는 준비 때문에 주현이를 보고 오지 못함도 너무 아시웠다.주현이가 있어 영후네 집에서 잤더라면 주현이가 어렸을때 처럼 그 두툼한 손으로 난우씨의 아픈다리며 온몸을 잘도 주물러 풀어 주었을텐데..., 부디 이애들이 건강하게 잘 있다 오기만을 기원하면서 이래 저래 내후년 쯤 한번 더와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일도 그렇고 체코도 우리나라 날씨와 비슷한데 바람이 불어 좀 더 춥게 느껴젔다.
이렇게 아름다운 도시 프라하 관광을 마치고 오스트리아 수도 비엔나로 이동하여 하우스 윈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이틋 날인 2월6일(일요일)에는 현지 음대교수로 있다는 정건영씨의 안내를 받아 비엔나의 옛 합스부르크王家의 여름 별궁인 쉔부르궁전을 돌아보았는데 왕의 접견실, 집무실, 무도회장, 왕비의 화장실,등 26개방을 차례로 돌아 보았다.
쉔부르크 궁전은 1390년대부터 유럽을 지배하던 합스부르크 왕가가 기거하던 별궁으로 쉔은 "시원하다" 란 뜻이며 1311개의 房이 있다 하였다. 이궁전의 일부나마 돌아 보면서 이 왕가의 당시 위력과 호화 생활이 손에 잡히는듯 머리에 그려젔다.
다음에는 구시가지의 중심지인 케른트너 거리와 이나라가 낳은 천재음악가 모짜르트가 결혼식을 올리고 장례식 (시체를 부랑자들과 같이 묻었으나 묻은 사람이 어데다 묻었는지 찾지를 못하여 시체 없는 장례식)을 치렀다는 슈테펜성당과 국립오페라극장과 구시가지의 중심지인 케트너거리등을 돌아본 후에 모짜르트의 고향인 짤즈부르크로 약 3시간을 달려 이동하여 웰즈버그호텔에 투숙하였다.
특히 우리가족 여섯 사람은 슈테펜성당을 본 다음 막간을 이용하여 흰색의 두마리 말이 이끄는 마차를 타고 성당 주변의 거리를 20분간 돌아 보았는데 요금은 40유로(한화로 약68천원) 이었다.
이날 투숙한 호텔은 고속도로에서 얼마 안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밤 새도록 대형차들의 소음과 추워서 고생을 많이 했는데 새벽녁에 난우씨가 커텐을 젔혀 보더니 " 창문이 열려 있어서 그렇게 시끄럽고 추웠었네" 라고 말하면서 창문을 닫았다. "소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옛날 속담이 딱 맞아 떨어지는 순간 이었다.
그런데 컴퓨터로 분석하면 아이큐지수가 230~270일 것으로 추측한다는 천재 음악가 모짜르트와 오스트리아 태생으로 독일 수상이 되어 유럽을 호령 하였던 히틀러를 오스트리아인 들은 상당히 높게 숭배하고 있다고 했다.
다음날 2월7일(월요일)에는 50대의 현지인 영어가이드 여자분의 안내를 받아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배경이 되었던 미라벨정원과 짜르트 생모가 그리고 모짜르트가 세례를 받은 짤즈부르크 대성당등을 돌아본 후에 가이드를 보낸다음 , 유네스코 유산으로 지정된 그림처럼 아름다운 마을인 할슈타트로 이동하여 아름다운 청정 호수(할슈테터호)가의 절벽에 한폭의 동화 속 그림과 같이 앉혀저 있는 할슈타트마을을 돌아본 다음에 볼프강 호수가의 마을에서 점심을 먹었다.그런데 이 마을은 옛날에는 소금을 캐어 풍요로움을 누렸던 지역이라 한다.
우리 일행은 배를 타기로 되어 있었는데 호수에 얼음이 얼어서 안전문제로 타지 못하고 대신에 케이블카를 타고 호수가에 있는 높은 산을 올라가서 약 한시간정도 주변을 내려다 보는데 눈 쌓인 산천과 호수가 정말 환상적이었다. 모두들 배안타고 케이블카 탄것이 잘 되었다고 하였다.(케이블카 요금은 어린이는 18유로 어른들은 26유로) 이날은 뮌헨으로 이동하여 하이웨이 호텔에서 투숙 하였다.
주요 관광지 마다 직.간접적으로 모짜르트의 과거와 관련이 있슴을 부각하고 있고 또 그 덕택에 많은 관광객들을 불러 들이고 있는 것을 보면서 이곳 오스트리아는 모든것이 모짜르트로 시작하여 모짜르트로 끝난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국토면적 86천평방키로미터에 인구 8백만,영세중립국 으로써 1인당 국민소득이 38천불인 오스트리아, 과거 신성로마제국의 수도 이었고 현재 오스트리아의 수도이자 음악도시로 알려진 비엔나, 과거 서독으로 취업해 갔던 우리나라 광부들과 간호사들이 살기 좋은 이나라로 상당수 이주해 옴으로써 한국교민 25백여명이 살고 있다는 오스트리아에 연민의 정을 느끼면서 잠을 청했다.
이틋날인 2월8일(화요일)에는 8시에 호텔을 출발하여 유럽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드라이브코스인 로맨틱 가도를 3시간쯤 달려 중세의 보석이라고 불리는 로테부르크로 이동하여 시청사, 마르크트광장등 시내를 대충 돌아본후 점심을 먹고 다시 약 2시간을 달려 프랑크푸르트공항에 도착하여 탑승수속을 하였다, 모두가 무사히 검색대를 통과하였는데 검색원이 난우씨 가방 속에 들은 물건들을 모두 꺼내 보더니 모자를 들고 따라 오란다. 약 50m를 따라가니 그곳에서 특수 검색기에 모자를 넣어 첵크해본 후에 모자에 붙은 여러개의 악세사리를 손으로 가리키며 이것을 검사했다고 한다. 그래서 살펴보니 이들 악세사리가 다이아몬드와 유사하여 보석 밀수가 아닌가 오해 하였던것 같았다.
즐거운 여행 일정을 마치고 10시간정도의 비행시간을 거처 2월9일 (수요일) 12시40분에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일행들과 다음에 또 만날것을 기약하며 헤어진후 집에도착 하니 모두들 피로가 겹처온다,
이렇게 다녀온 일주일간의 여행을 돌아보니 중현과 유진 엄마는 그간 격무에 시달렸던 스트레스를 이번 여행으로 어느정도 나마 풀었으리라 여겨지고, 유진이와 영찬이는 처음으로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를 따라 비행기도 타보고 유럽의 여러나라도 보면서 나름대로 영원히 기억에 남는 체험학습을 하였으리라 여겨지고, 또 먼 나라에서 주현이를 못 만나서 아십기는 하지만 영후네 세식구를 비엔나에서 만나 짧은 시간이지만 정담을 나누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번 3대가 같이 여행을 하면서 서로 끈끈한 가족애를 재삼 재사 확인하면서 더더욱 공고히 했다고 생각한다.
특히 유진이와 영찬이가 아프지 않고 즐거워 하면서 어른들 이상으로 잘다녀 주어서 이번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치게 되어 이 두녀석들의 공이 자못 크다고 여겨진다.
어머니 아버지를 모시고 다니랴, 애들을 돌보랴 ,등등의 많은 신경을 쓰며 이번 여행을 이끈 중현과 유진 엄마도 수고가 많았고, 많은 여행 경험을 살려 이것저것 세밀하게 준비하고 챙기어준 난우씨도 수고 많이했다.
이번에 여행을 다녀오니까 이 다음에 미국에 사는 현아내와 주현내 중현내 식구들 15명이 함께 외국여행을 다녀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된다, 꼭 그렇게 되기를 소망해 본다.
모두들 시차적응 문제로 약간의 고생을 하지만 특히 유진이는 감기까지 심하여 학교도 결석하고 있는데 빨리 완쾌 되기를 기원한다.
2011년 2월 16일(음력 1월 14일 정월 대보름 전날) 오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