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모든 형편을 아시는 주님
둘째 메시지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형편을 소상히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자는 처음 만나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자의 과거에 대해 묻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녀에 관해 속속들이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네가 함께 살고 있는 남자를 데려오라”고 하시지 않고 “네 남편을 불러 이리 함께 오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여자는 당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살고 있는 남자를 데려오라고 말씀하셨으면 아무 문제도 없는데,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시니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인류의 구원자이시기 때문에 사람의 과거는 물론 미래까지 환하게 꿰뚫어 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만나 얘기를 듣고 아시는 것이 아니라, 만나지 않고 얘기를 듣지 않아도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고백하지 않아도 이미 예수님께서 읽고 계십니다. 누군가 우리의 과거와 마음속까지 알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자신에 대해 전부 알고 있다는 사실에 부끄럽기도 하고 한편으로 겁도 날 것입니다. 한편으로 안심도 되고 위로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 더 이상 숨길 게 없어서 일면 편하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존재에게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감추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감춘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게다가 우리에 대해 모든 것을 아시는 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니 감동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아시고 만나 주시니 너무나 감사하고 충격적입니다.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이제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시군요.’”(4,19)
예수님의 언행에 여자는 차츰 눈을 뜨게 됩니다. ‘이제 보니’라는 기록으로 보아 여자는 눈이 밝아져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달라진 것입니다.
여자는 야곱의 우물에서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 ‘사마리아 사람을 무시하는 유다인 남자’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여자가 당신을 알았더라면 그래서 물을 청했다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물을 주셨을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여자의 생각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선생님이 저희 조상 야곱보다 더 훌륭한 분이시라는 말씀입니까?”라고 반응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이리 함께 오너라”고 하시자, 여자는 “선생님, 이제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시군요.”라고 말하며 예수님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4) 믿음만큼 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처음부터 한꺼번에 전부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구세주로 쉽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우선 ‘갈릴래아 바닷가에 살던 30대 유다 청년’에서부터 접근해 갑니다. 예수님의 참된 모습을 볼 수 없어 자신의 믿음 수준에서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후 예수님에 대해 눈을 뜨고 조금씩 알아가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자의 믿음 수준은 ‘예수님이 예언자보다 좀 나은 것 같다’까지 올라갑니다.
“저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선생님네는 예배를 드려야 하는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합니다.”(4,20)
예수님과 여자의 첫 만남에서 화제는 마시는 물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에 대해 눈을 뜨면서 화제는 예배로 바뀌게 됩니다. 우리도 화제와 관심의 대상을 발전적으로 바꿔 나가야 합니다. 먹고 마시는 문제, 자식 및 직장 문제 등에서 한 걸음 나아가 생명력 있는 얘기로 화제를 바꿔 나가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사마리아 여자에게서 희망을 볼 수 있습니다. 사회로부터 한번도 사랑과 존경을 받아 보지 못한 여자가 물 길으러 우물에 왔다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눈이 떠지면서 예배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는 사마리아 여자를 통해 삶을 새롭게 하는 두 가지 방법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는 예수님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물을 달라고 청하셨을 때 여자가 무시하고 그냥 가버렸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전교하다 보면 복음을 듣고 그냥 무시하고 피하려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조금만 더 들으면 좋으련만 사람들은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설교든 강론이든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한꺼번에 예수님에 대해 깨닫고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미사에 참여하고 성경공부와 각종 교육에도 참가해 예수님에 대해 항상 듣고 배워야 합니다. 주일에 성당에 왔다가 미사만 드리고 가 버리는 사람은 정말 불쌍합니다. 그나마 미사 시간에 졸고 나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더 이상 예수님에 관해서는 알 수 있는 기회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여자가 계속 예수님과 대화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적 대화로 옮겨 갑니다.
또 하나는 죄의 문제에 대해 솔직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과거, 상처를 건드리면 싫어합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잇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께 우리는 셈을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히브 4,13)
사람은 자신을 속일 수는 있어도 하느님을 속이지 못합니다. 예수님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처럼, 우리의 모든 것도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갈라티아서 3장 22절은 “성경은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어 놓았습니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한1서 1장 10절은 “만일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고 우리 안에 그분의 말씀이 없는 것입니다.”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인이 아니라고 한다면, 하느님은 거짓말쟁이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앞에 나아가 자신의 죄악과 상처를 드러내 놓고 용서와 치유를 청해야 합니다.
5) 예수님께 자신을 드러내십시오
예수님께서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이리 함께 오너라.”는 말씀에 여자는 매우 곤혹스러워 했을 것입니다. 이 말은 그 여자의 가장 고통스러운 치부를 찌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프고 부끄럽다고 자신의 과오를 숨겨선 안 됩니다. 그 과오의 해결을 유예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과오의 해결을 위해 예수님께 나아와 낱낱이 고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우리의 과오 문제를 해결하시고 축복하십니다.
우리는 마태오복음 11장 28절 말씀을 항상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지금 예수님 앞에 나아가 자신의 죄악을 드러내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삶의 굴레에서 자유롭게 되는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첫댓글 "우리는 끊임없이 설교든강론이든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전 실천하고 있어요.
바바스신부님의 글이3회 정독해야 이해되는 귀한 깊은말씀이 더 더 좋습니다.신선,상큼,톡 쏩니다.
사랑합니다감사합니다신부님
아멘. 아멘. 아멘.~~
"우리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는 존재들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