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웃고 나는 운다
M산악회 원용구 고문의 애칭인 ‘원 장군’은 군대와는 상관없다. 단지 덩치가 크고 힘이 세어서 얻은 이름이다. 그 애칭을 처음 사용한 것은 아마도 내가 아닌가 한다. 81년 12월의 첫 주말, 치악산을 오르고 있었다. 입석대를 거쳐 비로봉 정상에 올랐다가 구룡사 쪽으로 내려가는 코스였다. 그가 우리 산악회에 들어오고 나서 첫 산행이었다. 눈길이라 미끌미끌, 모두가 쩔쩔매는 와중에 그만은 원기 왕성, 주저앉은 사람을 일으켜 끌어주고 힘에 겨운 이들의 배낭을 받아 목에도 걸고 양팔에도 하나씩 끼워 당당하게 걸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
귀경 버스 속에서 내가 그의 초인적 활약상을 소개하면서 ‘원 장군’으로 처음 호칭한 것 같다. 그는 이후에도 ‘장군’이라는 이름값을 톡톡히 해내었다. 나이 든 분들의 석유 버너 같은 무거운 짐을 자신의 배낭으로 옮겨 담는가 하면, 여름에는 한 아름이나 되는 수박을 정상까지 메고 와 모두의 환호를 받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 산악회에서는 본명보다 원 장군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사람이 더 많아졌다.
그와의 첫 만남은 방산시장 안에 있는 우리 매장에 그가 고무밴드를 납품하면서였다. 명함을 교환했다. 노원구 태릉 쪽에 공장을 두고 있는 ‘천일 고무’ 대표, 그는 반들반들 다듬어진 도시인이 아니고 요즘 방송에 나오는 ‘자연인’처럼 원시(原始)의 냄새가 풍기는 사람이었다. 우람한 체격에 무성한 머리칼과 짙은 눈썹 그리고 시퍼런 면도 자국, 약간 도드라진 광대뼈, 눈도 크고 입도 크고, 콧날은 북한산 칼바위 능선처럼 곧게 뻗어 있었다. 팔뚝은 야구 방망이보다 더 단단해 보여 멧돼지를 때려잡고도 남지 않을까 싶었다.
어느 초겨울 저녁녘, 말쑥한 점퍼 차림으로 나타난 그가 밥을 먹자고 했다. 청계천 6가 동대문 상가 옆 골목에 조촐한 술집이 있었다. 비빔밥에다 한 되짜리 ‘백화 수복’ 정종이 병째로 올라왔다. 밥은 제쳐두고 따끈하게 데워 온 술부터 마시기 시작했다. 주거니 받거니 빈속에 들어간 술이 서로의 마음을 터놓게 했을까. 어느새 도란도란 둘 사이에 얘기의 강이 흐르고 있었다.
1·4 후퇴 때 황해도 사리원에서 아버지와 단둘이 내려왔다. 부산에서 ‘비과’를 만드는 과자 공장에서 하루에 12시간씩 토요일이나 일요일도 없이 일해야 하는 ‘공돌이’였다. 아내 홍 여사도 함경도에서 피란 와서 역시 그곳에서 일하는 ‘공순’이였다. 서울에 와서 이리저리 헤매다가 고무줄공장을 차렸는데 힘이 많이 든다. 전화 받는 직원 한 명뿐, 제조와 판매를 혼자 도맡아 하고 있다. 일은 고되어도 2남 1녀 아이들이 공부를 잘해서 뿌듯한 마음으로 살고 있다.
한 되짜리 술병이 바닥에 가까웠는데도 두 남자가 펼치는 얘기의 강은 넘실넘실 아직도 굽이치고 있었다.
햐! 원 사장, 나도 그때 부산에서 ‘공돌이’를 했잖았겠소. 동대신동에 있는 와이셔츠 공장의 ‘시다바리’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세수할 틈조차 없을 만큼 바쁘게 일을 했지요. 월급? 그런 건 당연히 없었지요. 먹여 주고 재워 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던 시절이었잖아요. 그 후로 다방과 음식점을 순례하며 양담배와 껌을 파는 행상을 하다가 종국에는 남포동 뒷골목에서 양키 물건을 파는 노점상을 차리기까지 했다니까요.
어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원 사장의 두 손이 내 두 손을 맞잡아 부르르 떤다. 함께 뛰놀던 코흘리개 고향 친구를 만난 느낌이었을까. 같은 시기 같은 지역에서 똑같이 ‘공돌이’라는 밑바닥 삶을 살아냈다는 유대감, 이번에는 상을 밀치고 와락 서로를 껴안는다. 펄떡이는 가슴과 가슴. 볼까지 비빈다. 공돌이 시절의 아픔들이 복받쳐 오르는가. 두 남자 얼굴이 물기로 얼룩진다.
“♬아∼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나직이 부르는 황해도 사나이의 노래, 망향의 애달픔일까, 텅 빈 늦가을 들판처럼 쓸쓸함이 묻어 있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이번에는 듀엣이다. 높고 낮은 음성, 지난날의 서러움을 멀리, 아주 멀리 날려 보내고 있었다.
그날 이후 나보다 세 살 아래인 그와는 찰떡궁합으로 죽이 맞았다. 곧바로 코펠과 버너 같은 등산 장비를 마련해 내가 임원으로 있는 M산악회에 들어왔다. 1, 3주 일요일마다 전세 버스로 전국의 명산을 찾아가는 산악회에서 그의 인기는 대단했다. 서글서글 활달한 성격에다 힘겨워하는 사람 잘 도와주고 권하는 술잔도 마다하지 않았다. 귀경길 버스 속에서 그가 부르는 구성진 노랫가락은 시쳇말로 인기 ‘짱’ 이었다.
그가 들어오고 이태째에 내가 회장직에 오르면서 그에게 산악회 살림살이를 총괄하는 총무직을 부탁했다. 공장 일에 바쁜 그에게는 아주 버거운 일일 터인데도 군말 없이 맡아 주었다. 임기 2년의 회장직을 일곱 번, 14년 동안 그가 총무를 도맡아 주었다. 그뿐만이 아니고 나를 위험에서 구해준 적도 있었다.
내가 첫 회장직에 오르면서 성당 친구들과 학교 동창들 여럿이 산악회로 들어왔다. 한 대이던 버스를 두 대로 늘려야 했고 그러다 보니 자연 분위기도 좀 어수선했다. 춘천의 삼악산 등반 때였다. 거기에 불만을 품은 어느 회원이 나를 외진 숲속으로 데려가 주머니칼로 위협하면서 새로 들어온 사람들을 모두 다 내보내라고 압박했다. 그는 가정 폭력을 일삼고 주먹질을 잘하는 왈패로 소문이 나 있었기에 공포에 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바람처럼 나타난 원 장군이 그를 한 방에 때려눕히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다짐까지 받아 냈다.
세월이 흘렀다. 머리칼이 희끗희끗 그도 늙고 나도 늙었다. 그는 회장직을 거쳐 고문직으로 물러나 있고 나는 명예회장으로 물러나 있었다. 그는 십여 년 전에 사랑하는 아내 홍 여사를 하늘나라로 보낸 것 빼고는 그런대로 잘 살아가고 있었다. 막내아들이 공장을 물려받아 잘하고 있고 큰아들은 S 전자에 입사해서 스마트폰 홍보를 위해 세계를 누비고 있었다. 장손자는 미국 유명대학에서 장학생으로 공부하고 있었고 당신의 지병인 혈압과 당뇨도 비교적 잘 관리하고 있었다.
한데, 그가 우리 곁을 떠나갔다 오는 9월 25일이 그의 일주기다. 매주 주말마다 우리와 함께 전세 버스에 오르거나 둘레길을 걸었는데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만남이 끊긴 지 오래였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완화될 때면 열댓이 모여 근교 둘레길에 나서곤 했는데 그는 지병의 악화로 참석이 어려웠다. 어쩌다가 힘을 내어 지팡이를 짚고 참석해서도 완주를 못 하고 중도에서 집으로 되돌아갔다. 어떤 날은 모임 장소까지만 겨우 나와서 친구들과 일일이 악수만 하고 들어가기도 했다.
작년 7월의 마지막 일요일, 둘레길은 일산 호수공원을 걷는 것으로 정해졌다.
“원 장군, 내일 일산 호수공원을 걷는데 어지간하면 좀 나와 보시죠. 평지를 걷는 것이고 원 장군은 걷다가 힘이 들면 예약해 둔 식당에 가 계시면 됩니다.”
“예, 강 회장님, 내일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전화상의 목소리는 탁하고 어눌했지만 확실한 의사 표시였다. 이튿날,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쳤다. 10시, 정발산역 1번 출구, 기다려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들 날씨 탓이려니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이튿날도 그다음 날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 보름쯤이 지났을까, 회장이 그가 종합병원에 입원 중이라고 알려 왔다. 코로나19 때문에 면회는 일절 금지, 가족도 장남 한 사람만이 환자의 얼굴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어찌 이럴 수가! 한달음에 달려가 마지막일지도 모를 그분의 손을 부여잡고, 먼 먼 공돌이 시절의 애환을 다시 한번 나누어야 하는데…. ‘두만강 푸른 물에 노젓는 뱃사공∼.’을 한 번 더 듀엣으로 불러야 하는데, 면회가 안 되다니…. 후회막급, 회갑을 지나면서 건강상 이유로 술을 끊어 그분과 가슴을 맞댈 기회를 한 번도 마련하지 못하지 않았던가. 아, 이 어쩌면 좋으냐.
결국 입원 40여 일 만에 그가 떠나갔다. 그를 보내는 게 너무나도 아쉬워 산악회에서 사이버 공간에 그의 빈소를 마련했다. 흰 국화 더미 속에서 원 장군은 여느 때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40년을 함께 한 내 친구 원 장군, 그는 웃고 나는 운다.
첫댓글 그는 웃고, 나는 운다.
이 한 구절이 그간의 애틋한 인연을 다 말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찐한 우정이 남긴 곡진한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