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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학 권두칼럼>
서사구조와 운명적인 길 찾기 해법
- 홍숙희 소설 「두 여류작가의 빛」과 예술혼
엄창섭(가톨릭관동대 명예교수, 본지 편집고문)
1. 자의적 은폐와 에펠 레이션(命名)
모름지기 한 사람의 충직한 독자로서 우리가 인지하듯이 ‘문학작품의 의미와 구조 및 가치, 작가의 세계관 등을 일정한 기준에 따라 평가하고 분할·통합하는 작업에 지속적인 관심사로 의식의 날(刃) 푸른 비판 정신의 중개자로서 고뇌 앞의 강직성에 의미성을 높이 평가할 때 비교적 중량감이 실린 홍숙희 소설가의 인간 실존의 혼성과 미완의 디아스포라를 전재한 조선왕조를 대표하는 두 여성의 서술구조는 지극히 시사적(示唆的)이다. 모두(冒頭)에서 「소설의 서사구조와 운명적인 길 찾기 해법 - 홍숙희 소설 「두 여류작가의 빛」, 그 지순한 예술혼」 의 논의에 앞서 따뜻한 감성과 맑은 영혼의 소유자로 지극히 독실한 카톨릭 신자인 홍숙희 소설가는 항만의 도시 부산태생이다. 그 자신은 40여 년간을 교직에 몸담아 오면서도 줄곧 문학에 대한 일념으로 1986년 「교육자료」공모 수필 3회 추천과 1989년 MBC 300만원 고료 창작 공모전의 당선과 1990년『문학세계』수필 신인상, 1993년 『시세계』의 시 신인상을 받았다.
또 한편 강릉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 수여를 계기로 2007년 『한국 탄광 시선집』에 「낮달이 뜨는 지붕」(제1~7화)을 수록을 비롯하여 2009년 장편소설 『거무내미』와 2015년 명상소설 『아름다운 동행』 및 고고학적 접근과 더불어 한국의 무속설화 등에 맞물린 종교의식까지 천착한 소설 『19열차』와 2022년 『나의 산티아고 39페이지』의 출간도 그렇지만, 2023년 6월의 강릉아산병원 갤러리 개인전을 개최한 초 장르적으로 활동하는 존재감 빛나는 감성적인 예술혼의 투혼임에 틀림이 없다. 비교적 작가는 전지성을 지닌 탓에 다양한 인물의 등장에 초점을 옮겨가며 상황을 서술할 수 있는 탓에, 작품 속 인물의 성격 분석과 파악은 작가의 주제나 세계관에 대한 해명과의 접목이다.
아울러 배경 묘사의 설정은 생동하는 존재로 구명되기에 인물의 설정은 사실성과 연계된다. 그렇다. "소설가가 소설을 쓰는 행위는 문학사가 내용하고 있는 인물전시장에 몇 개의 새로운 초상을 부가시키는 일이라."는 그릴렛(A. Robbe Grillet)의 역설이나 한편 특정한 작품에서 등장인물의 에펠레이션(命名)을 통한 성격의 파악과 서사구조, 그리고 방법의 추이는 관심의 대상에 해당한다. 모처럼 그 자신이 소설작품에서 재치가 빛나는 대화 양식을 문학적 대화로 차용함도 그렇거니와 소설로서의 생리적 과정을 보다 작은 용적 안에 소설의 전면모(全面貌)를 수용하고 발현한 점은 특이하다. 이같이 대화의 핵과 주제의 단일성, 구성의 간결성과 엄밀성, 최대의 절약과 최상의 강조법을 치밀하게 사용하여야 단일한 효과성과 인상의 선명성 등의 효용성을 거둘 수 있다. 이 같은 양상에서 복합적 구성을 골격으로 삼아 다양한 삽화를 결부시켜 사건을 구도 처리한 장편소설은 다수의 등장인물이 서로의 관계성을 긴장감 유지하며 사건을 흥미롭게 이끌어간다. 까닭에 장편소설은 주제를 구축하는 사건 이외에도 부수적인 제 요인들이 서로 얽혀 갈등과 대립을 풀어간다. 이처럼 인생과 사회 전체를 총체적으로 묘파(描破)함으로써 주제를 선명하게 해석하고 창조하는데 그 의의가 있음은 주의 깊게 한 번쯤지켜볼 일이다. 여기서 소설작품의 편집 구도처리는 「1부. 묵은 빛, 2부. 리몽(李夢) 카페, 3부. 고고학의 폭풍주의보, 4부. 피렌체, 르네상스 시대로의 초대, 5부. 유랑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6부. 두 여류작가의 만남」으로 결(結) 고운 옷감처럼 존재감이 빛난다.
따라서 작가의 고정인식의 틀 깨기랄까? 새로운 의도적 접근으로 등장인물을 ‘신사임당과 허난설헌(楚姬)을 중심으로 윤슬, 이우빈, 아름을 뒷받침하는 단테, 프랑스와 1세, 다빈치, 지네브라 여인, 니꼴리니 백작 단테, 프랑스와 1세, 다빈치, 지네브라 여인, 니꼴리니 백작을 포함하여 허균, 이달, 안평대군, 안견, 일본인 다수’를 배치한 점은 물론이거니와 소설의 배경인 장소 또한 6곳으로 한정한 홍숙희 작가만의 차별성에 의한 존재감은 이채롭다. 이처럼 소설의 도입부인 <1부. 묵은 빛>의 일면처럼 평상심을 유지한 담백한 분위기로 독자의 시선과 관심을 빚어내고 있다.
특히 시대적으로 문예 부흥기인 르네상스 시기에 ‘천년 하슬라(何瑟羅) 그 영광의 땅’인 강릉(江陵)에 운명적으로 몸담았던 ‘한국의 영원한 모성(母性)인 신사임당(申師任堂)과 동양 3국의 최초의 여류시인 난설헌 허초희(許楚姬)’를 중심인물로 삼고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동시대와 강릉이라는 공간을 현대성에 결속한 구도처리나 기법은 매혹적이어서 신선하고 흥미롭다. 그렇다.’2006년 영화 「다빈치 코드」가 뜨고, 한 여인의 삶을 재해석한 예술의 혼과 불멸의 사랑을 그린 「빛의 일기」가 2017년에 TV 드라마로 방영되었다. 그때로부터 ‘강릉으로 가는 길’은, '여성 천재들에 대한 모종의 비밀', 숨겨둔 다빈치 코드와 흡사한 그 무엇이 뇌리를 의아심으로 휘감았다.’라는 그 일면(一面)이나 2023년 「戀人」의 TV 드라마에서 '환향녀 취급'의 현실을 보여주었다. 병자호란 당시 청은 포로를 잡아갈 때 남녀노소 가리지 않았다. 일부는 포로가 아님에도 납치해 데려가기도 했다. 이렇게 청으로 끌려간 이들 중 다수는 청인들에게 몹쓸 짓을 당했다는 역사적 사실도 그렇거니와 그 예로 권력을 가진 여자가, 약한 여자를 도와주는 2022년 「슈룹」 TV 드라마 이야기를 잠깐 옮겨본다.’라는 구체적 서술은 새삼 뜻깊다.
2. 주제의 해법과 사건 전개 양상
일반적으로 작중 인물의 유형은 다소 미셀러니 경향의 보편적이고 상투적인 유형이기에 긴장감보다 지루함을 안겨주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일차적으로 그 자신의 작품 구도와 내면의식에 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의도적이나마 사건 전개의 추이(推移)를 지켜보며 발단과 결말 부분을 분할·통합하며 그 나름으로 작가의 의식에 접근하되 작품의 틈새 좁히기와 길 찾기를 심층적으로 검토키로 한다. 또 그렇게 ‘오월 ‘꽃분홍 길’을 시작으로 서울이 따뜻해지고 있는‘ 현실적 시간대에서 아름이가 연보랏빛 상위에 청바지 차림으로 꽃분홍 길 따라 출근하고 있다.
윤슬은 창으로 내비친 그녀를 보면서, 젊음이란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지적 토양이 얼마나 비옥하고 활발히 움직이고 있는
가에 달려 있다고도 하지만, 피부 나이가 젊다는 것은 역시 눈에 돋보였다. 아름이가 공문을 들고 연구실 문을 노크하자
“좋은 계절이네요. 블라우스가 청바지랑 아주 잘 어울려요.”
그녀의 옷차림을 칭찬하면서 인사를 건넨다.
-<3부. 고고학의 폭풍주의보>에서
각론하고 독일의 소설가 하이제(Paul Johann Ludwig von Heyse)의 이론을 적용하지 않더라도, 그 자신의 작품에서 ‘다소 평이한 현실 안주의 인물 제시와 직설적인 서술성이 비교적 횟수가 잦게 노출된 점은 소설의 미학적인 형상화 기량이 미숙한 탓이다.’라는 전제는 다소의 무리수가 주어진다. 까닭에 “광활한 바닷길 큰 외침으로 고고학을 연구하는 한 사람의 학자로서 솟구쳤다. ‘저 바닷길에서 길을 잃은 영혼들이여! 말해보라.’ 그때 난데없이 거친 바다에 파란색, 흰색, 빨간색으로 이루어진 프랑스 깃발이 나부끼고 있다.”라는 그 일면도 그렇거니와 “휴가를 고향, 부산으로 가기 위해 서울서 고속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동안 연구실에서 쌓인 피로를 고향 바다가 풀어주었으면 좋겠다. 왠 걸 힘이 쭉! 쭉! 빠진다.”에서 감지되듯 새삼 긴장감과 흥미를 자극하려는 그 자신의 의중은 이처럼 식별이 된다.
비록 독일의 시인 릴케(R. M. Rilke)가 “시는 체험이다.”라고 천명하였듯이 상상력의 의미망을 확장하여 가공의 진실을 역사적 틀에서 그 나름으로 서술한 한 편의 소설은 그 시대의 정신적 산물이기에, 홍숙희 소설의 합리적 해법은 시대성을 반증할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 이 점에 비춰 다소 분량에 문제점이 없지 않으나 ‘①제한된 분량에서 6개 단락의 치밀한 구성, 그리고 간결한 문체의 특성 ②작중 인물을 중심으로 짤막한 스토리의 전개 ③다양한 사건의 언어 망(網)이 이야기의 골격을 유지 ④사건 전개에서 일관성 유지 ⑤사건의 배경에서 시간과 공간의 열림 지향’의 특이성을 동시대의 어느 작가보다 치밀하게 구도처리는 그 존재감의 빛남이다.
어디까지나 “중세 ‘피렌체’ 중심지에서 신비함까지도 그사이 좁은 골목으로 통하는 작은 성당의 십자가상이 눈에 쑥 들어왔다. 노래 가사에 홀린 듯 성당으로 발걸음을 자연스레 옮기자, 내부 왼쪽 재단 바닥에 ‘베아트리체’ 잠들어 있다는 표지판과 마주쳤다. ‘세상에 이런 일이 다 있나?’(4부. 르네상스 시대로의 초대)”의 일면의 보기나 “그때 우연히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운명의 소녀 베아트리체와 두 번째 마주친다. 그녀는 단테를 향해 가벼운 미소로 인사를 하고는 그곳을 떠났다. 그날을 단테는 자신의 시집「새로운 삶」에서 천국의 모든 경계를 훔쳐보았다고 적고 있다.(4부. 르네상스 시대로의 초대 4부. 르네상스 시대로의 초대)에서 장소성(場所性)과 공간을 뛰어넘는 서술의 추이(推移)는 못내 신선한 감동을 안겨준다.
까닭에 “책을 읽는 여성들은 세상과의 소통을 원할 뿐이다. 그럼에 불구하고 권력자의 눈에는 분명 위험부담이 있다. 동서를 막론하고 남성은 존귀하고 여성은 비천하다는 남존여비 관념이 지배적이었다. 여자는 남존여비의 오랜 역사 속에서 스스로 남자를 존대하고 자신을 비하하는 태도를 치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기에 키워드는 열린 사고가 중요해 보인다.”라는 그 자신의 열린 사고와 확고한 집념은 난설헌의 선견지명에 맞물려 놀랍다. 모처럼 “중세 ‘피렌체’ 중심지에서 신비함까지도 그사이 좁은 골목으로 통하는 작은 성당의 십자가상이 눈에 쑥 들어왔다. 노래 가사에 홀린 듯 성당으로 발걸음을 자연스레 옮기자, 내부 왼쪽 재단 바닥에 ‘베아트리체’ 잠들어 있다는 표지판과 마주쳤다. ‘세상에 이런 일이 다 있나?’(4부. 르네상스 시대로의 초대)”의 일면의 보기나 “그녀는 단테를 향해 가벼운 미소로 인사를 하고는 그곳을 떠났다. 그날을 단테는 자신의 시집「새로운 삶」에서 천국의 모든 경계를 훔쳐보았다고 적고 있다.(4부. 르네상스 시대로의 초대)”라는 그 상상력의 확장은 감동적이다.
오랜 날 평자 그 나름으로 “예술에는 국경이 없지만, 예술가에게는 조국이 있음”을 역설해온 점에 비춰 민족의 혼이고 얼인 정신문화에 대한 홍숙희 작가의 지대한 우리 문화예술에 대한 애정과 관심에는 비장감마저 묻어난다. “특히 ‘무릉도원도(夢遊桃源圖)’는 15세기 조선 르네상스를 상징하는 역사적 예술품, 국보이기에 더욱 그렇다. 복사꽃이 활짝 핀 ‘무릉도원도’는 조선 전기의 화가 안견이 3일 밤낮을 몰입한 끝에 완성한 그림이다. 안평대군이 직접 ‘무릉도원도’라는 제목과 함께 칠언 절구의 시를 썼다. 신숙주. 성삼문 등 문사 20여 명이 그림을 칭찬하는 글과 시를 지어 완성한 작품이며 응집된 고도의 집중력이 일시에 발휘되었다. 안평대군은 세종 치하의 좋은 시절, 시(詩), 서(書), 화(畵) 어느 것 하나 못 하는 게 없던 천재 예술인이었다. 그는 사람들을 구름처럼 몰고 다녔다. 장안에 재주 있다는 자는 죄다 그의 문하에 들려고 경쟁했었다. 마치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와도 같은 분위기다. ‘메디치가’의 수장들의 눈에 들기 위해 노력했던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등의 발현과도 일맥 통한다.(5부. 유랑 중인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에서 명증되는 불멸의 예술혼은 경이로운 바람의 초상(肖像)이다.
3. 합리적 해법과 에필로그(epilogue)
어디까지나 다소 통시적 고찰이나 그 자신의 단편을 통해 파악되듯이, 그 나름으로 등장인물의 창조적 성격을 모색하기 위해 작품의 흐름을 통시적으로 열거한 것은 변명 같지만, 전체적 맥락에서의 별견(瞥見)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모처럼 동시대에 활동한 작가에 견주어 그에 관한 다각적이고도 심층적 연구가 비중 있게 논의되지 못한 안타까운 현상에서 다소 생경(生硬)한 그의 문학사적 위상을 점검하는 작업은 선행연구라기보다 각론에 머물고 있을지라도, 작품의 주제의식과 수사의 기법, 그리고 문체 등을 전반적으로 아우르는 다양한 연구와 조망은 현실적 정황에서 실망감을 안겨주기에 자각 의식에 의한 연구의 의미망은 자못 절실하다.
그렇다. 외교부 공식인가 사단법인 세계경제문화교류협의회 ECI는 2022년 3월 14일 체결한 이본궁 기념재단 중요문화재 증여에 관한 협정서와 2021년 10월 20일 체결한 덴리대학 기부행위확약서에 의해 지난 2022년 12월 14일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한국반환을 위한 사실상 일체 권한을 위임받는 체결과 2023년 5월 27일 파이낸셜 투데이의 보도 기사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윤슬은 그동안 강릉을 거쳐 고고학의 시간을 달리는 소녀로 살았다. 서울국립미술관 연구실에서 비단 화폭에 뭉개진 조선 여류 산수화의 원인 규명을 위해 돌아다녔다. 동시대 이탈리아 ‘피렌체’ 르네상스 시대를 탐색하면서 끈기를 요구받았고.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에 한정 없이 매몰되기도 했었다. 때론 고고학의 궤적을 풀어가는 즐거움도 뒤따랐다. 그간에 수집한 르네상스 시대 자료를 중심으로 한국 고고미술사학 ‘두 여류작가의 빛’에 대한 연구논문은 ‘신사임당과 난설헌을 기리고 추모하는 이 땅의 모든 여성에게 기적과도 같은 신의 선물을 안겨줄 기대감이기에 못내 극명하다.
모름지기 홍숙희 작가는 「6부. 두 여류작가의 빛」의 결말에서 막연한 기대감과 함께 “그 옛날 이 공항에서 리(李) 선배의 유해가 담긴 컨테이너가 내려졌던 기억도 새롭지만, 노제는 그의 가족과 친지, 대학교 관련 연구진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공항 화물터미널 도로에서 진행되었고 20여 분만에 간단하게 끝났다. 노제를 마친 유해는 장례용 캐딜락 차에 나눠 실린 뒤 빈소가 차려진 강릉의료원 장례식장으로 향했었다. 3일째 되는 날, 하느님께 고인을 맡긴다는 의미의 장례미사를 초당성당에서 지냈다. 장지는 솔향 하늘길로 이어졌었다. 지금 윤슬은 인천국제공항에서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반환을 기다리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 강릉 두 여류작가를 떠올리며…”라는 아쉬움을 뒤로한 묵언의 응시(凝視) 끝에 이같이 마무리된다.
각론하고 대륙의 심장을 지닌 그 자신의 정신적 생산물에 있어 서술상황의 전개 양상의 특성이나 소설의 미학적 면을 강조하지 아니하여도 자기변명으로 치부될 위험성이 주어질뿐더러 소설 평설의 한계성에 얽매임은 다시금 유념할 바다. 비록 평자 그 나름으로 인상 비평적이나 홍숙희 작가의「합리적 해법과 에필로그(epilogue)」에서 통시적으로 기술한 일면임에 비춰 새삼 천명할 점이라면, 하나의 신앙처럼 미적 주권의 정체성을 켜켜이 지켜내며 상업주의를 경계하고 일관된 의지로 문학인 본래의 영역에 처하면서도, 장르의 이탈을 거부한 날(刃) 푸른 작가의 의중이 다양한 관점에서 천착(穿鑿)될 막중한 과제이다.
그와 같이 불확실한 현상에서 덴마크의 심리학 교수 스벤 브링크만(Svend Brinkmann)이 그의 저서『절제의 기술』을 통한 경계는 유념할 점인 까닭에 견고한 고뇌 끝에 진정한 깊은 사유를 통한 여백의 틈새 좁히기에서 존재감이 빛나는 정신적 작위(作爲)는 더없이 온전한 수행에 잇닿은 정신적 결과물이다. 모처럼 따뜻한 감성의 소유자인 홍숙희 소설가의 이 같은 작품의 양상은 사고가능성(思考可能性)의 긍정적 맥락에서 그 자신의 일관된 뜻을 모아 시적 구도의 특이성에 의미구조를 높이 결부시켜 엄격하게 검증을 끝낸 결과임에 틀림이 없다. 그렇다. 밤하늘의 신비한 성좌(星座)로 자리매김하여 '극소수의 정신작업에 종사하는 현대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그 존재감이 빛남'은 못내 자랑스럽다.
결론적으로 앞서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결정 불가능성의 범주(範疇)를 거듭 역설하기에, 그 자신이 처한 시간대와 공간에서 홍숙희 작가는 삶의 생명감에 충실할뿐더러 대립과 갈등 구도로 절망의 끝이 보이지 않는 조국의 암울한 사회현상에서도 지극히 견고한 성곽처럼 상호보완적 공존의 양상을 지니는 실체이다. 차제에 ‘이 시대의 따뜻한 감성과 영감을 지닌 맑은 영혼의 창조자’로서 비판기능의 수행 또한 각별한 편이다. 모쪼록 최소한 창조적 활동을 끊임없이 펼쳐갈 정신작업의 종사자라면 ‘영감의 비의(秘意)를 해명하는 사제(司祭)로서 비공인의 입법자 역할’을 올곧게 수행할 것을 거듭 확신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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